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727.22015200300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26> 부산은 가야인가, 신라인가-하
신라 5세기 중엽부터 부산을 직접 지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7-26 20:04:38/ 본지 15면
동래는 거칠산국, 해운대는 장산국
동래는 신라 경덕왕 때부터의 이름입니다. 동래 이전에는 거칠산군으로 불렸는데, 거칠산군은 신라가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고 설치한 것입니다. 신라 이전의 동래는 거칠산국이란 나라였고, 동래 복천동고분군에서 신라 이전에 가야의 물건이 나오기 때문에 거칠산국은 가야계 소국으로 보아야 합니다. '삼국사기'는 신라사람 거도(居道)가 말 타는 유희로 거칠산국을 병합했다고 전합니다. '삼국사기'는 탈해왕(57~79년) 때의 일로 기록했지만, 복천동고분군의 색깔이 가야에서 신라로 바뀌는 것이 5세기 중반이기 때문에, 훨씬 후대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라의 거도가 말 타는 유희로 거칠산국을 공략했다지만, 3세기말까지의 삼한은 말을 탈 줄도 몰라 보병전만 했었습니다. 더구나 가야와 신라고분에서 마구(馬具)가 나오는 것도 4세기 중엽은 넘어야 됩니다. 따라서 신라 거도의 거칠산국 병합은 빨라야 5세기 이후의 사실이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아울러 '삼국사기'는 신라가 지마왕 10년(121년)에 지금의 당감동 일대에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축조했다고 전하지만, 이 시기의 신라는 아직 경주 일원도 벗어나지 못한 단계로, 이 역시 5세기 이후의 사실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출 이전의 부산에는 또 다른 가야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산국(萊山國)으로도 불렸던 장산국(山國)이 그것입니다. 온천 목욕의 내용도 보이기 때문에 해운대를 가리키고, 장산은 지금도 있으며, 장산 너머는 신라시대의 기장현이었습니다. 장산 앞자락 해운대와 기장군에 자리하고 있었던 가야소국이 장산국이었습니다. 결국 동래의 거칠산국과 해운대~기장의 장산국이 처음부터 신라는 아니었고, 5세기전반까지는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독립국이었습니다. 신라 진출 이전의 부산을 가야사의 무대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동래 복천동 10호의 '마주'(사진 위)와 10, 11호의 금동관.
신라의 부산 진출
신라의 부산 진출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관련기사들의 배열을 볼 때, 경주→울산→동래 방면으로 시작되었고, 동래 북쪽의 양산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완료되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파사왕(79~111년) 때 이미 낙동강을 경계로 김해의 가락국과 충돌하고 있음을 전하지만, 이 연대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훨씬 후대 눌지왕(417~457년)의 신하였던 박제상이 양산의 지방장관이었던 사실은 신라의 양산 진출의 시기와 결과를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부산 진출은 고구려의 후원을 얻으면서부터 였습니다. 당시 가야와 왜의 침략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400년에 광개토왕은 신라 남쪽의 가야를 공략했습니다. '광개토왕릉비'는 5만이나 되는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이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격멸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쟁 결과 신라도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되었지만, 이 기회에 신라는 고구려를 등에 업고 부산 진출에 적극성을 띠게 됩니다.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되고 있는 고구려계통의 투구와 마구, 신라 계통의 금동관과 고리자루의 큰칼(三累環頭大刀)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고대의 부산은 해상교역의 거점과 철의 집산지라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대외 진출의 첫 번째 목표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신라는 3세기경까지 경주 일원의 소집단들을 통합하고, 4세기가 되면서 울산을 거쳐 동래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5세기에는 고구려의 군사적 후원과 금동관이나 큰칼과 같은 신라적 위세품의 분배를 통해 동래와 양산지역에 대한 간접적 지배를 모색하였습니다. 5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복천동고분군의 유물들이 완전히 신라 계통으로 바뀌듯이 직접 지배의 단계로 돌입합니다. 이후 부산은 해산물이나 영도의 말(絶影馬)을 공납하는 신라의 해상 관문이 되었습니다. 거칠산국과 장산국의 가야왕이 신라의 지방장관으로 전락한 셈이었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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