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810.22016205548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28> 알터 암각화와 대가야 건국신화
대가야는 청동기문화 지신족과 철기문화 천신족의 결합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8-09 20:56:45/ 본지 16면
알터 암각화.
알터 암각화
경북 고령 양전동 회천 가의 알터암각화는 너비 6m 높이 3m정도 되는 바위덩어리에 새겨진 그림입니다. 수직으로 깎아 내린 듯한 여러 면에 쪼고 갈아서 새긴 바위그림입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크게는 두 종류의 바위그림이 보입니다. 하나는 3~4겹으로 새겨진 동심원이고, 또 하나는 가면이나 탈처럼 생겼습니다. 가면처럼 생긴 것은 세로로 길며 아래보다 위가 넓은 역 사다리꼴 모양입니다. 가운데를 1~2개의 선으로 가로질러, 상하의 2~3개면으로 나누었는데, 각 면에는 2~3개씩의 구멍이 뚫렸습니다. 또 가면의 둘레는 털이나 술처럼 표현되었는데, 오른 쪽 아랫부분에 있는 것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가 위와 양옆에만 달려 있습니다. 암각화에서 여러 겹의 동심원이 태양을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가면이나 탈 모양에 대해서는 울타리 쳐진 마을이라는 등 여러 의견이 있지만, 시베리아의 샤먼이 제의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가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생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 암각화가 언제 새겨지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근처에서 마제석기·무문토기의 산포지와 고령에서 가장 현저한 고인돌 떼가 확인되고 있는 점, 청동기~초기철기시대라는 암각화의 일반적인 연대를 참고로, 청동기문화 단계의 늦은 시기(B.C300~기원전후)의 유적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원전후라는 시기, 회천 냇가라는 장소, 기원과 주술의 암각화, 태양과 제의를 상징하는 문양들, 여기에다 '알터'라는 시조탄생 관련의 지명을 합하면, 거의 완벽하게 건국신화의 내용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가야의 건국신화
"가야 산신(山神) 정견모주가 천신(天神) 이비가의 빛을 받아,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의 두 사람을 낳았다." 이것은 신라의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한 이정(利貞) 스님의 전기를 적는 속에 포함되어,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고령현 연혁의 기술로 남게 되었던 대가야의 건국신화입니다. 가야산신을 감응시켰던 천신의 빛이 곧 태양이고, 그래서 태어난 대가야왕의 이름 주일(朱日)은 '붉은 해'입니다. 건국신화의 중심인 태양이 알터 암각화에서도 정중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3~4개 중에서도 맨 가운데 높은 곳의 동심원이 가장 깊고 뚜렷하게 새겨졌습니다. 알터란 지명이 고대의 건국과 직결되는 것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가락국의 수로가 그랬고, 신라의 혁거세와 김알지가 그랬습니다. 더구나 알터는 회천이라는 냇가에 위치하고 있고, 암각화에는 샤먼들이 제의를 주제할 때 쓰던 가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김해에서 가락국이 건국될 때 수로왕의 탄강을 빌기 위해 해반천에 나가 목욕재계하고, 고인돌이 있는 구지봉에서 제의를 벌이던 모습에 비추어 볼 수 있을 겁니다. 또 알터 인접의 반운리유적에서 수습되고 있는 철기류와 와질토기들은 2~3세기경 고령지역 철기문화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으며, 알터 일대와 마찬가지로 마제석기와 무문토기도 확인되고 있어, 토착의 청동기문화 위에 새롭게 철기문화가 등장하는 양상의 유적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의 분포와 변화는 시기적 차이는 있겠지만, 수로집단이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청동기문화의 구간사회를 통합하고 가락국을 성립시켰던 것과 같은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대가야의 형성과정은 건국신화에서 가야산신으로 표현된 청동기문화의 지신족과 천신으로 표현된 철기문화의 천신족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건국의 무대가 알터 암각화가 위치하는 회천 가의 양전동과 반운리 일대였을 겁니다. 대가야의 건국신화에서 대가야왕은 '붉은 해(朱日)'라는 형님으로, 금관국왕은 '새파란 후손(靑裔)'이라는 동생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관계의 설정은 가야사의 전개과정과 정반대입니다. 5세기 중반이후 명실 공히 대가야가 되었을 때, 김해의 가락국과 형제관계를 주장하여 중심의 전통계승을 표방하면서도, 가락국을 동생으로 설정하고 대가야를 兄으로 하여, 대가야가 가야의 중심이었다는 자존의식을 대외적으로 주장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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