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5&key=20070525.22016195708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18> 양동고분군-상
2백년 사용 납땜질한 제례 청동정 눈길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5-24 19:59:24/ 본지 16면
현장발표회
1994년 1월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가야사 전공자가 가야의 고도(古都) 김해에 부임하여 이제 막 첫 학기를 마친 겨울이었습니다. 대학 교수가 되어 처음 가 보았던 김해시 주촌면 양동고분군의 발굴조사 현장발표회 였지요. 이런 현장발표회는 대개 발굴개요의 보고, 조사현장의 견학, 간단한 출토유물의 전시로 진행됩니다. 출토유물이 전시된 탁자 위에는 단연 눈길을 끄는 유물이 있었습니다. 다리 3개에 2개의 큰 귀가 달린 둥근 청동제 솥으로, 청동정(靑銅鼎)이라 부릅니다. 모양도 특이하지만, 출토 예가 많지 않았던 탓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기자가 사진을 찍다가 다리 하나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돌리려 하자, 그만 다리가 덜렁거리게 되었습니다. 뒷면을 찍으려 했던 모양이었지만, 마침 그 앞에 서 있던 제 가슴도 철렁하였습니다. 2000년 이상 견뎌오느라 많이 약해진 탓이었겠지요. 물론 잘 보수되었고, 보존처리를 거쳐 지금은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X선 조사
아주 놀라기는 했지만, 보수와 보존처리를 위해 실시되었던 X선 조사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X선 투시를 통해 이미 납 땜질을 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바닥에서는 여러 차례의 납 땜질이 드러났습니다. 조사보고에 따르면 청동정의 아가리 부분에는 모두 1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중에 '서구궁(西口宮)'으로 읽히는 명문(銘文)이 있었습니다. 구(口)는 곡(谷)으로도 읽히고 있지만, 궁(宮)은 궁궐이 아니라 중국의 청동기 공방을 뜻합니다. '서구궁'이라면 1세기경 중국에서 청동기를 생산하던 유명한 공방 이름이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청동정의 생김새로 보아 B.C 1 ~ A.D 1세기에 황하 중하류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새겨진 글자 역시 한대(漢代, B.C 2~A.D 2세기)의 전서체(篆書體)라 합니다.
200여 년의 제사
김해 양동리 322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청동제 솥과 아가리에 적힌 명문.
결국 청동정을 기원전후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청동정이 출토된 322호 목곽묘(덧널무덤)는 무려 200여년 이후가 되는 3세기경의 고분입니다. 무덤과 무덤 속 부장품의 연대가 서로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고분과 청동정의 연대가 다 맞는다면, 기원전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20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 가야의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는 추정이 됩니다. 바로 이 200년의 공백을 메워준 것이 X선 조사로 밝혀졌던 많은 납 땜질 자국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모양의 청동정은 향로(香爐)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향로는 장례나 제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중심 상징물이었습니다. 이 청동정 역시 양동리 가야마을의 제사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바닥이 닳아 뚫어져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땜질까지 해 가며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북한 출신의 가야마을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정을 집단의 상징으로 200년 동안이나 제사의 중심 상징으로 사용했던 사람들이 양동리고분군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양동리 가야마을 사람들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어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서북한지역에서 남하하여 중국제 청동기를 집단의 상징으로 모셨던 사람들로, 수로왕과 허왕후와 같이 바닷길을 통해 김해에 들어 왔던 집단들이었습니다. 양동리고분군 바로 아래쪽에는 유하리 하손패총이 있고, 위쪽으로는 양동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양동산성은 분명치 않지만, 하손패총에서는 수많은 바다조개와 가야토기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손패총의 정상부에 올라 보면 지금은 김해평야로 변해 버린 옛 김해만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해양왕국의 항구로 아주 적합한 지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양동리고분군이 위치한 주촌은 지금 술 주(酒)자 주촌(酒村)으로 표기하지만, 원래는 배 주(舟)자 주촌(舟村)이었고, 고려시대까지 항구마을로 크게 번성하던 곳이었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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