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6503
'원칙주의자' 이순신, 왜 '진린' 앞에선 달랐을까
[게릴라칼럼] 전작권 연기 요청한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이순신
14.08.27 13:55l최종 업데이트 14.08.27 13:55l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서울시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 ⓒ 김종성
이순신이 군사훈련소인 훈련원의 정8품 봉사(奉事)로 재직할 때였다. 이때는 임진왜란 발발 13년 전인 1579년이었다. 당시 이순신은 35세였다.
훈련원 봉사의 권한 중 하나는 인사문제 처리였다. 이때 본청인 병조(국방부)의 인사 담당관인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자기편 사람을 승진시키고자 훈련원 인사 문제에 개입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공평하지 못하고 법에도 어긋난다"며 병조정랑의 개입을 저지했다.
병조정랑은 품계는 중간이지만 병조의 실세였다. 그런 사람의 청탁을 배격한 것만 봐도, 이순신이 원칙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이순신은 상당히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였다.
임진왜란의 제2라운드인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관직을 잃고 투옥된 것도 왕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일본 함대가 부산 해역에 나온다는 첩보가 있으니 부산으로 출동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조선군을 교란하기 위한 허위 첩보일 것'이라는 판단 하에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옥고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은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점이다.
조선-명나라 연합군 군령권 행사한 명나라 군대
그토록 강직한 이순신이 원칙주의를 '살짝' 굽힌 일이 있다. 그것은 명나라군 때문이었다. 이순신의 원칙주의가 명나라군 때문에 살짝 굽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순신을 본받고자 하는 대한민국 장교들이 주한미군 때문에 얼마나 불편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장교들을 불편하게 하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마지막에 다시 언급한다.
임진왜란 초반부터 명나라 군대는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군령권을 행사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 측은 말도 못할 수모를 당해야 했다. 명나라의 종6품인 관료인 애자신이 군량미 조달이 늦다는 이유로 조선 장관급인 정2품 지중추부사 김응남을 곤장으로 때린 일이 있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막판까지도 이런 문제는 이순신과 별로 관계가 없었다. 전작권 문제로 괴로움을 겪은 것은 조선 육군이었다. 바다에서는 조선 해군이 단독으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명나라군과 부딪힐 이유가 없었다.
▲ 조선 해군의 훈련 장면. 서울시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김종성
그런데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명나라는 대규모 해군을 참전시켰다. 대부대를 이끌고 온 것이 진린 제독이었다. 진린은 명나라 해군뿐만 아니라 조선 해군에 대한 군령권도 확보했다. 양국 해군의 전작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것은 임진왜란 기간 내내 바다에서만큼은 황제나 다름없던 이순신의 지휘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을 추천한 장본인이자 이순신을 가장 잘 아는 고위 인사인 유성룡도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에서 "(진린과) 의견이 달라 (진린이) 필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조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니 ……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을 피할 수 있겠는가"라며 이 문제를 염려했다.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진린의 성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학자인 윤휴의 유고 문집인 <백호전서>에 따르면, 진린은 "거칠고 포악하며 교만"했다. 그는 자기 부하들이 선조 임금이 보는 앞에서 조선 수령을 구타하는 것도 묵인했다. 완전히 안하무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측은 '진린은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진린이 전쟁 막판인 1598년 하반기에 이순신과 합세해서 공동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원리원칙을 지키느라 왕명까지 거부한 이순신이 진린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으니, 조선측 인사들은 걱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진린이 조선인 상관이었다면, 이순신은 면전에서 입바른 말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진린이 이순신을 처단했거나 아니면 이순신이 진영을 스스로 떠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번만큼은 강직성을 발휘하지 않았다. 진린에 대해서만큼은 자존심을 억누른 것이다. 진린의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순신에게 거북선 못지않게 중요했던 쌀 한 톨
물론 그렇다고 이순신이 조선 해군사령관(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통제사)의 품위를 떨어뜨린 것은 아니다. 참다 참다 참기 힘든 경우에는 진린에게 바른 말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명나라와의 협력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누르고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다음 두 가지 사례만 봐도 그가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이 참았을지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례는, 군량미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진린을 위해 성대한 환영 파티를 열어준 일이다. 진린의 비위를 맞추고자 향응을 제공했던 것이다. 평소의 이순신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쟁 중에 이순신은 재정위기를 겪는 중앙정부를 위해 재원 조달의 책임도 수행하고 있었다. 또 그는 해군의 전투력 증강에 활용할 목적으로, 바다를 지나는 선박들로부터 통행세도 거두고 군사들을 동원해서 농토도 경작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전투뿐만 아니라 수익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쌀 한 톨이 거북선 한 척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런 식량과 물자를 꺼내 진린에게 향응을 베풀었으니, 이순신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미소를 띠고 진린에게 술잔을 건네는 그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기분 같아서는 술병을 거꾸로 꾹 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진린을 위한 향응 제공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 2000년에 발행된 이순신 기념우표. 서울시 중구 우표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이다. ⓒ 김종성
또 한 가지 사례는, 조선 수군의 전공을 진린에게 양보한 일이다. 명량해전 10개월 뒤인 1598년 8월 25일(음력 7월 24일)의 절이도 해전 때였다. 이때 조선 군함 8척과 명나라 군함 30여 척이 연합하여 일본 해군을 격파했다.
그런데 전공을 세운 것은 전적으로 조선군이었다. 선조 31년 8월 13일자(양력 1598년 9월 13일자) <선조실록>에 수록된 이순신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나라 해군은 일본군을 보고 겁이 나서 멀찍이 떨어진 채 구경만 했다. 그래서 조선 해군은 적의 수급을 70개 정도 획득한 반면에, 명나라 해군은 하나도 획득하지 못했다. 조선 해군이 힘들게 싸우는 동안에 명나라 해군은 바다 산책만 한 셈이다.
전투가 끝난 뒤에 자존심이 상한 진린은 이순신이 보는 앞에서 자기 부하를 꾸짖고 급기야 이순신한테까지 화풀이를 해댔다. 그러자 이순신은 진린을 달랠 목적으로 수급의 과반수인 40여 개를 진린에게 양보했다. "제독까지 직접 싸워서 확보하신 것으로 치십시오"라고 말한 것이다.
이순신은 전투결과 보고에 관한 한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였다. 그가 제출한 전투 보고서들에는 어느 군인이 어떤 전공을 세웠는가에 관해 상당히 세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은 자기의 전공을 이유 없이 양보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의 전공을 가로채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이순신이 진린한테만큼은 전공을 양보했다. 진린의 비위를 맞추고 협력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순신은 별도의 루트를 통해 문제의 진상을 정부에 보고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전공을 양보하게 되었노라고 은밀히 보고한 것이다. 위의 <선조실록>에 수록된 보고서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진린 때문에 정신력 낭비 감내해야 했던 이순신
일본과의 전투에 전념하고 군수물자 확보에 집중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명나라 해군 제독의 비위까지 맞춰야 했으니, 전쟁 막판에 이순신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이해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조선 해군과 이순신의 전투력이 악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추리할 수 있다.
꾹 참던 이순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분노를 터뜨렸다. 이따금 진린과 언쟁을 벌인 것이다. 이런 경우에 진린은 전작권을 앞세워 이순신을 위협했다. 그는 "내게는 황제께서 내린 검이 있다"면서 이순신을 위협했다. 이렇게 전쟁 막판에 이순신은 진린 때문에 정신력의 낭비를 감내해야 했다. 그는 진린 때문에 정말로 질렸을 것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전투는 절이도 해전으로부터 약 3개월 뒤에 벌어진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 때도 명나라 해군이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것은 전투가 격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이순신이 전작권 문제로 인해 전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보다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명나라 제독의 명령을 받으며 싸워야 했으니, 명나라군이 조선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순신이 얼마나 속을 끓였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이순신이 전작권을 보유한 상태에서 단독으로 싸웠다면 진린의 비위를 맞추느라 속을 태우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 덕분에 정신력과 체력을 비축했다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전쟁 종결 직전에 이순신이 일본 해군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린은 일본군의 뇌물을 받고 포위를 풀어주려 했다. 이순신이 항의하자 진린은 전작권을 내세우며 위협했다. 노량해전 이틀 전에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나는 너를 죽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했다.
이렇게 연합군 내에 분란이 있는 틈을 타서 일본 해군이 탈출을 시도했고, 이런 일본군을 잡기 위해 벌인 전투가 이순신의 최후가 된 노량해전이다. 전작권 문제로 인한 진린과의 대립으로 이순신의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노량해전이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어이없게도 적군의 총알을 맞았던 것이다.
꼭 진린 때문에 전사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전작권 갈등이 없었다면 훨씬 더 여유로운 상태에서 노량해전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불의의 전사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작권 연기, 꼭 해야만 할까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영화 <명량>을 관람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군대에 있는 제2, 제3의 이순신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는 2015년 연말로 예정된 전작권 환수를 2020년 이후로 연기하려 하고 있다. 연기 작업은 9월에 서울에서 열릴 한미통합국방협의회에서 사실상 확정되고 10월에 워싱턴에서 열릴 한미안보협의회에서 최종 발표된다.
박 대통령의 전작권 환수 연기는 재정적 부담까지 수반한다. 전작권을 좀 더 오래 대행해주는 조건으로 미국은 한·미·일 삼국 군대의 정보 교환과 고(高)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의 구입까지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군사정보를 자국뿐만 아니라 자국의 대리인인 일본에도 제공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시스템 한 개를 구축하는 데 2조 원 정도나 소요되는 사드 시스템을 구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돈을 받고 내줘도 시원찮을 전작권을 돈을 주고 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을 내 손으로 자주적으로 지키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 군인들은 앞으로도 계속 미군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이순신 같은 훌륭한 군인들이 앞으로도 계속 미군의 간섭을 받고 미군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막대한 돈을 갖다 바치면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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