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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모으기위해 ‘論(논)’ 대신 ‘義(의)’를 지향하라!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④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17호] 승인 2013.10.29  10:35:27

활을 쏘면서도 대화하기를 즐긴 이순신
소통의 목적은 ‘전쟁’ 승리와 백성의 삶 향상


이순신은 자신의 막사인 운주당(運籌堂)에서 부하들과 백성들의 말을 때에 관계없이 들었다. 그는 또한 수시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난중일기>에는 회의, 토론, 대화 등을 말하는 의미하는 ‘의(議)’, ‘논(論)’, ‘화(話)’, ‘담(談)’ 이라는 네 가지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의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표현은 이순신의 가장 큰 장점인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설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한 증거이다.

한자의 본래 뜻을 기준으로 네 가지 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의(議)는 ‘의논해 올바르게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논(論)은 ‘상대방과 논리를 세워서 의논’하는 것이다. 화(話)는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담(談)은 ‘두 사람이 화톳불 앞에서 정겹게 조용히 이야기하다’란 뜻이다.

의(議)가 오늘날의 회의처럼 어떤 결정을 위해 지혜를 모으는 과정을 중시한 것이라면, 논(論)은 도덕적 가치 판단에 따른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자신 입장을 주장하는 논쟁 성격이 강하다. 화(話)는 특별한 목적의식이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담(談)’은 두런두런 편하게 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은 수시로 회의와 토론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했다. 식사를 할 때도, 술을 마실 때도, 활을 쏘면서도 했다.

소통은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

이순신이 오늘날의 회의처럼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는 회의라는 의미로 사용한 “의(議)”를 표현한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593년 8월 8일. 순천 부사, 광양 현감, 방답 첨사, 흥양 현감 등을 불러 복병하는 등의 일을 함께 의논했다(議).
1595년 8월 28일. 이른 아침에 체찰사와 부사, 종사관과 함께 수루 위에 앉아 여러 가지 폐단을 의논했다(議).

이순신은 또한 때때로 주어진 상황에 따른 입장에 따른 논쟁, 즉 논(論)도 마다하지 않았다.

1593년 6월 10일. 우수사(이억기)와 가리포 첨사(구사직)가 와서 군사의 계책을 자세히 논쟁했다(論). 1593년 7월 7일. 아침에 순천 부사, 가리포 첨사, 광양 현감이 와서 만났다. 군사 일을 논쟁(論)하고, 각각 가볍고 날랜 배 15석을 뽑아 견내량 등지로 보내 탐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후 정황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논쟁, 즉 논(論)은 회의 성격의 의(議)와는 큰 차이가 없다. 의논(議論)과 논의(論議)를 함께 사용한 경우도 있다.

1593년 8월 6일. 저녁에 원수사가 오고, 영공 이경수(이억기), 정수사(정걸)도 왔다. 의논(議論)하는 사이에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되니 참으로 가소롭다.
1594년 4월 19일. 첨지 김경로가 원수부로부터 와서 적을 토벌할 대책과 대응에 관한 일을 논의(論議)하고 그대로 한 배에서 잤다.

여러 사람이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는 의미의 화(話)라는 표현은 아주 많다. 회의나 토론과 달리 어떤 결정이나 토론 보다는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거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수시로 듣고 말하는 경우를 화(話)로 표현한 듯하다.

1592년 8월 25일. 경상 우수사와 서로 배를 매고 이야기했다(話).
1593년 2월 24일. 우수사 이영공(이억기), 순천 부사, 가리포 첨사, 진도 군수 성언길과 더불어 기녀들을 물러가게 하고 조용히 이야기했다(話). 
1593년 6월 4일. 충청 수사 정 영공과 이홍명, 광양 현감(어영담)이 와서 종일토록 군사에 대해 이야기했다(話).

담(談)은 아래의 6월 18일의 일기처럼 두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부담 없이 서로의 생각을 말하는 방식으로 주제나 형식에 무관하게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1593년 6월 18일. 오후에 경상 우수사의 배로 가서 같이 앉아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談). 연거푸 한 잔 한 잔 마신 것이 취기가 심해져서 돌아왔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의 회의, 토론, 대화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순신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회의와 토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리더마다 소통방식은 큰 차이가 있다. 특히 다른 리더들의 소통방식과 비교해 보면, 이순신의 표현에는 이순신이 다른 리더들 보다 다양하고 적극적인 소통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패튼 장군은 팀워크를 중요시했지만 주로 자신이 주도하는 브리핑 형태의 회의를 했다. 자신이 확보한 최신 정보를 브리핑하면서 참모들과 작전 계획을 공유했고, 참모들의 피드백을 받아 결정사항을 수정하는 형태의 자기 주도형 회의를 선호했다.

한 걸음 더 다가가 이순신식 소통을 하라

이순신은 부하들과 백성에게 다가갔다. 패튼처럼 자기중심적 일방통행식 소통을 하지 않았다. 또한 맥아더, 나폴레옹, 넬슨이 각각의 개성대로 하나의 소통 방식에 집중했다면, 이순신은 그의 다양한 소통 표현처럼 여러 가지 방식을 활용했다. 또한 시간과 장소도 관계없었다. 그의 운주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또 육지에서 운주당은 물론, 활터에서, 전선(戰船) 안에서, 심지어 바다위에서 배를 맞대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소통 표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이순신의 소통 목적이 승리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입장의 차이를 강조하고,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는 논쟁(論),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계승범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당쟁이 격화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지혜를 모으려는 의(議)’가 아니라 ‘입장의 차이를 강조하는 논(論)’이 난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로의 주장을 강권하는 ‘논(論)’ 대신, 서로의 주장을 듣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모으는 의(議),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듣고 함께 나누는 ‘화(話)’와 ‘담(談)’이 많을 때 서로를 분리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벽을 부술 수 있다. 그것이 소통의 지름길이다. 이순신의 ‘의(議), ‘화(話)’와 ‘담(談)’은 그가 있는 모든 곳에 변화와 승리를 위한 싱크탱크를 두는 효과를 가져왔다.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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