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118.22017200047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9> 아라국의 가야사 (상)
허구의 '가야연맹설'에 평가절하된 함안 아라국 위상
인구 2만 넘은 한강이남 5대 대국
김해 가락국과 교역권 전쟁도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8-01-17 20:01:36/ 본지 17면
4세기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자형(工字形) 토기. 황사리35호분 출토.
가야연맹설'의 허구
오늘의 가야사는 한국사 연구의 독립된 주제로 인정받기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가야라면 으레 '가야연맹'이란 말을 먼저 떠올리는 분이 적지 않을 겁니다. 별로 연구된 적도 없었으면서, 이제껏 중등학교 국사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왔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국사교과서에서 3쪽에 불과한 가야사 서술은 제목부터 '가야연맹왕국'으로 돼 있었고,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겨우 1쪽뿐인 서술에서 전기의 김해와 후기의 고령이 각각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힘을 합해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내던 것 같은 일도 없었고,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이나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동맹처럼 연맹(League)을 맺었다는 사실은 물론, 가야에 관련된 한국·중국·일본의 어느 기록에도 '연맹(聯盟)' 비슷한 말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후대에 김해와 고령의 가야국이 스스로를 높이려고 만들어낸 자기 중심의 정치적 주장대로 현대의 가설은 만들어졌고, 한 번 만들어진 가설은 증명도 없이 사실로 둔갑했습니다.
가야연맹설'의 피해자
가야 여러 나라가 힘을 합해 외적과 싸우기는커녕, 4세기 초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으로 불리는 가야국끼리의 전쟁도 불사하였고, 5세기 초 고구려의 남침에 대해서는 고령과 함안이 따로 전쟁을 치렀으며, 결국은 신라와 백제의 침략에 각개 격파되었습니다. 동래와 창녕은 5세기 중반, 김해는 532년, 함안은 561년, 고령은 562년에 각각 신라에 통합되었습니다. 연맹체로 뭉쳐 함께 싸우다 함께 망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가야연맹설'의 주술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가설의 사실화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맹주'로 상정된 김해와 고령만이 전·후기의 가야사였고, 다른 가야국들의 자율적인 역사는 살펴보려 하지 않았던 게 더 큰 문제입니다. 허구의 '가야연맹설' 때문에 가야사 전개에서 아주 중요했던 한 나라의 역사가 과소평가되고 묻혀 버리게 되었던 겁니다. 지금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함안 아라국의 가야사가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안의 아라국은 '가야연맹설의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중단 없는 대국(大國)
함안의 아라국은 전·후기에 모두 대국(大國)이었습니다. 후기의 위상은 지난주 돌아보았던 말산·도항리고분군의 위용과 다다음 주에 살펴 볼 '일본서기'가 전하는 6세기의 외교관련기술에서 잘 드러납니다만, 전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기가야의 사정을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삼국지'는 3세기 후반 경까지 한강 이남에 있었던 마한(馬韓) 54개국, 변한(弁韓) 12개국, 진한(辰韓) 12개국 등 모두 78개 한국(韓國)의 이름을 전하는데, 그 중에서 변진아야국(弁辰安邪國)으로 기록된 함안은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더불어 5대 대국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함안의 아야국은 한강 이남의 78개국 중 랭킹 5위에 들 만한 큰 나라였다는 겁니다. 대국 4000~5000가(家), 소국 600~700가라 하니까1가를 5명으로 계산하면 3세기 후반 경의 아야국은 2만 내지 2만5000명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었습니다. 현재 함안의 5만 명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인구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아야국은 김해의 가락국과 해상교역권 쟁탈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기 209년에 마산(옛 骨浦) 칠원(漆浦) 고성(古史浦) 사천(史勿)과 같은 김해 서쪽의 8국(포상팔국)이 가락국(구야국)을 공격하는데, 보라국(保羅國)으로 표기된 아야국은 중심의 배후세력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야국이 배후였던 이 공격은 마찬가지 대국이었던 김해가 혼자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접 국가도 아니고, 낙동강 건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자식의 나라이름 안야(安邪)와 안라(安羅)를 왜 아야와 아라로 읽어야 하는지는 다음 주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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