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18584
이보다 더 불쌍한 고려왕이 있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대풍수>, 세 번째 이야기
12.12.26 11:04 l 최종 업데이트 12.12.27 12:21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대풍수>의 고려 우왕. ⓒ SBS
'불쌍한 임금' 하면 흔히 조선 단종을 떠올린다. 하지만, 단종 못지않게, 어쩌면 단종보다 훨씬 더 불쌍한 왕이 있었다. SBS드라마 <대풍수>에 등장하는 고려 제32대 우왕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단종은 열일곱 살에 죽었지만, 우왕은 성인이 된 뒤인 스물다섯 살에 죽었다. 이것만 놓고 보면, 단종이 훨씬 더 불쌍한 임금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죽은 이후를 놓고 보면, 우왕이 훨씬 더 불쌍했다. 왜냐하면, 우왕은 단종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격하됐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중국 역사서에서는 각 군주의 역사를 '○○황제 본기(本紀)'로 묶었다. 사대주의자인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백제·신라 군주의 역사를 이런 본기의 형식으로 묶었다.
그에 비해 조선 건국세력이 편찬한 <고려사>에서는 고려 군주들의 역사를 각각의 세가(世家)로 묶었다. 예컨대, 제31대 공민왕의 역사는 '공민왕 세가'로 묶었다. '세가'는 제후에게나 적합한 표현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제후들의 이야기를 '세가'로 엮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조선 건국 세력은 고려를 제후국으로 폄하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나마 '세가'로도 묶이지 못한 두 왕이 있다. 우왕과 우왕의 아들인 창왕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시대의 역사는 <고려사> 열전에서나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역사는 '신우 열전'과 '신창 열전'으로 묶였다. 이것은 이들이 '왕이 아닌 사람'들과 동격으로 취급되었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우왕과 창왕은 칭호마저 격하되었다. 고려왕들에게는 묘호나 시호가 부여됐다. 태조·혜종 같은 묘호(사당의 칭호)나 충렬왕·충정왕 같은 시호가 부여된 것이다. 그에 비해, 우왕 부자는 묘호도 시호도 아닌 실명으로 불리고 있다. 이름인 '우'와 '창'을 따서 우왕·창왕이라 불린 것이다.
그뿐 아니다. 우왕과 창왕은 역대 고려왕들과 성씨마저 다르다. 고려왕들의 성씨는 당연히 왕씨다. 하지만 이들은 '맵다'를 의미하는 신(辛)씨 성을 갖고 있다. 우왕의 아버지요 창왕의 할아버지인 공민왕은 왕씨인데 이들은 신씨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승려인 신돈이 이들의 조상으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우왕이 단종보다 더 불쌍하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또 왕위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혈통과 성씨마저 빼앗겼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표현하면, 우왕은 성(姓)폭력까지 당한 임금이다.
혈통과 성씨마저 빼앗긴 왕
▲ 공민왕(류태준 분). ⓒ SBS
<고려사> '신우 열전'에서 우왕을 신씨로 몰아붙인 근거는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다. 세간에 그런 말이 있다는 식이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지금의 우왕은 그나마 신돈의 진짜 아들도 아니다'라는 주장이었다. '신우 열전'에서는 신돈이 아이를 낳은 뒤 이 아이를 동료인 능우 스님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능우 스님은 아이를 자기 어머니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첫돌이 되기도 전에 아이가 죽었기 때문에, 능우 스님이 다른 아기를 훔쳐다가 신돈의 아이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신우 열전'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우는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며, 지금의 신우는 그나마 가짜라는 것이다. 카더라 통신을 통해 이런 엄청난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허위라는 점은 '신우 열전' 안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공민왕과 신하들의 대화록이 나온다. 왕과 신하들은 원칙적으로 사관(史官)이 배석한 가운데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므로 신우 열전 속의 대화록은 사관들이 남긴 역사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 대화록에 따르면, 공민왕은 신하들에게 자신과 모니노(우왕)의 관계를 매우 솔직하게 설명했다. 신돈의 집에서 반야라는 여성을 만났고 이 관계에서 모니노를 낳았다고 고백한 것이다. 공민왕은 수시중(총리급)인 이인임에게도 "나는 장남이 있으니 근심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대화록은 카더라 통신이 아닌 사관들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고려사> 편찬자들이 이 기록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완전히 무시하고서는 세상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관들의 기록 속에는 이런 말이 있지만, 소문에 따르면 실제 사실은 정반대다'라는 주장을 할 목적으로, 사관들의 역사기록을 소개하고 카더라 통신을 통해 이를 부정한 것이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사관들의 공식 기록에 근거한 것이고,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카더라 통신에 근거한 것이라면, 우리는 공식 기록에 근거한 전자의 이야기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고려사> 편찬자들은 카더라 통신을 우선시했다.
▲ 반야(이윤지 분). ⓒ SBS
게다가 공민왕이 자기 입으로 우왕을 아들로 인정했다면, 유력한 반대 증거가 없는 한은 우왕을 왕씨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가 파탄으로 끝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판단에 한층 더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나 소설에 묘사되는 것과 달리, 공민왕은 겉으로는 신돈에게 국정을 맡기고 폐인처럼 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최측근인 신돈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감시했다. 신돈이 공민왕의 통제를 벗어날 조짐을 보이자마자 공민왕이 전격적으로 그를 제거한 것은, 공민왕이 항상 그를 예의 주시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완전히 내주지는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민왕은 최측근인 신돈마저도 속일 정도로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모니노가 혹시 신돈의 혈통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면, 그는 사실관계를 철저히 파헤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입으로 '모니노는 내 아들'이라고 인정했다. 이것은 우왕이 공민왕의 혈통이 아니라고 볼 만한 증거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화도 회군이 바꾼 운명
이처럼 우왕은 분명히 공민왕의 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혈통을 둘러싼 논란은 매우 황당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혈통 시비가 생긴 것은 우왕이 위화도 회군(위화도 쿠데타)으로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가 왕이 될 당시만 해도 그의 혈통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조민수 정권은 우왕을 몰아내고 아들인 창왕을 옹립했다. 창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이성계보다는 조민수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민수의 라이벌인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창왕이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성계와 조민수의 권력 투쟁이 발생했고, 이 싸움에서 이성계가 승리했다. 승리한 이성계는 창왕을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낸 명분이 '우왕은 신돈의 아들이므로 창왕 역시 신돈의 핏줄'이라는 논리였다. 창왕을 왕위에서 몰아낼 목적으로 우왕의 혈통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왕과 창왕은 <고려사>에서 왕씨가 아닌 신씨로 기록되고 말았다. 만약 우왕이 위화도 회군을 막아냈다면, 그가 신씨로 둔갑하는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우왕은 단순히 왕위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씨마저 빼앗기고 신돈의 아들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의 역사는 왕의 역사가 아닌 '왕이 아닌 사람의 역사'로 격하되고 말았다. 고려시대에 이만큼 불쌍한 임금도 흔치 않았다. 매울 신(辛)만큼 그의 삶을 잘 표현하는 한자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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