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0612

만주정벌,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신의>, 여섯 번째 이야기
12.10.18 16:18 l 최종 업데이트 12.10.18 19:01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신의>의 최영(이민호 분). ⓒ SBS

고려 말에 혜성처럼 등장한 '왕'이 공민왕이라면, 혜성처럼 등장한 '신하'는 최영이었다. 왜구를 격퇴한 공로로 우달치(왕의 경호원)가 되어 중앙 무대에 데뷔한 최영은 공민왕 및 우왕 시대에 각종 대내외 전쟁에서 무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왕조를 사수하여 고려의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최영의 위상이 최고조에 도달한 시점은 <고려사> 신우 열전에 따르면 우왕 14년 정월이었다. 양력으로는 1388년 2월 8일에서 3월 8일 사이였다. 최영이 일흔세 살 때였다. 이때 최영은 이성계를 끌어들여 집권당 수뇌부인 이인임·임견미·염흥방을 제거하는 친위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로써 우왕의 권력은 물론이고 최영의 위상까지 절정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불법유턴' 막지 못한 최영

이렇게 나이 70세를 넘어 전성기를 맞이한 최영은 1년도 채 안 된 우왕 14년 12월(1388년 12월 29일~1389년 1월 27일)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친위 쿠데타 직후에 명나라가 영토분쟁을 도발하자, 이를 명분으로 만주정벌(요동정벌)을 추진했다가 이성계의 쿠데타를 막지 못해 권력도 잃고 목숨도 잃은 것이다.

그로부터 약 250년 전인 1135년에 개혁파 승려인 묘청이 김부식 등의 보수파에 맞서 북진운동을 추진했다가 좌절된 뒤로, 한반도에서 만주정벌이라는 목표를 명확히 내걸고 군대를 일으킨 인물은 최영이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영의 시도는 한국사에서 매우 뜻 깊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좌절됐다. 최영의 명령을 받고 압록강 위화도까지 군대를 몰고 갔던 이성계는 '소국이 대국을 칠 수는 없다'느니 '비가 많이 와서 불가능하다'느니 하며 시간을 끌다가 군대를 개경 쪽으로 확 돌렸다. 이 '불법 유턴'을 막지 못해 만주 정벌의 꿈과 더불어 최영의 운명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사실, 이성계 입장에서는 최영의 동기를 의심할 만도 했다. 이인임을 함께 몰아낸 최영이 자기더러 명나라를 공격하라 하니, 혹시 자기를 국외로 쫓아내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만도 했다. 

이성계가 내건 명분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은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힘으로는 만주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과연 맞는 것이었을까? 그의 말처럼 최영은 불가능한 꿈을 꾸었던 것일까? 

내란 초란 부실 국정 명나라, 빈 틈 노린 몽골과 여진


▲  전북 전주시 경기전에 보관된 이성계 영정. 사진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 ⓒ 국사편찬위원회

공민왕 때인 1368년에 명나라가 세워지고 몽골제국이 망했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몽골은 실제로는 그때 망하지 않았다. 중국 땅을 잃고 외몽골(현재의 몽골인민공화국)로 이동했을 뿐이다. 외몽골로 쫓겨난 몽골을 중국인들은 북원(北元)이라 부른다. 북원은 1402년까지 존속했다. 

한편, 당시의 만주는 형식적으로는 명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명나라가 실질적으로 지배한 공간은 만주 서부에 불과했다. 만주 동부는 여진족 군소집단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명나라나 조선을 상국으로 떠받들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정치세력이었다. 

중국 땅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중국을 차지한 명나라는 외형상으로는 큰소리를 치고 고려를 압박했지만, 속사정은 이만저만 심란한 게 아니었다. 

건국 초기 명나라의 수도는 양자강 주변의 남경(난징)에 있었다. 남경은 상해(상하이)보다 약간 위쪽에 있다. 명나라가 북경(베이징)으로 천도한 것은 1421년이었다. 수도가 남쪽에 있었다는 것은 주력 부대가 그곳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최영이 만주 정벌을 추진한 1388년만 해도, 명나라의 주력 부대는 만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만주와 가까운 북중국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태조 주원장과 황태자 주표가 아니라 넷째아들인 연왕 주체였다. 훗날 조카를 죽이고 명나라 제3대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황태자 주표는 1378년부터 국정 전반을 사실상 관할했지만, 원래부터 허약한 탓에 1392년에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래서 주표의 아들인 주윤문이 1392년에 황태손이 되고 1398년에 제2대 황제가 됐다. 그가 혜종 황제(별칭 건문제)였다. 연왕 주체가 죽인 조카는 바로 이 사람이었다. 

주체는 열한 살 때인 1370년에 연왕(燕王)에 책봉됐다. 오늘날 북경에서 생산되는 맥주가 연경맥주(옌징맥주)로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연(燕)은 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가리키는 약칭이다. 그래서 고려가 만주를 공격할 경우,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것은 태조나 황태자가 아니라 바로 연왕 주체였다. 

주체의 관할지인 연(燕)은 부강한 지역이었다. 이 덕분에 그는 가장 강력한 제후로 떠올랐다. 이런 상태에서 황태자가 유약했으니, 주체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것은 중앙에 있는 황태자는 물론이고 그를 계승한 황태손 주윤문에게도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주윤문도 그런 우려를 품었다는 점은 열여섯 살에 황태손이 된 주윤문이 그 같은 두려움을 입 밖으로 드러난 데서도 알 수 있다. 명나라 역사를 기록한 <명사>의 '황자징 열전'에 따르면, 황태손 주윤문은 측근인 황자징에게 "제후 왕들이 군대를 일으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주윤문은 1398년에 황제가 되자마자 삼촌인 연왕을 제거하려고 했다가 도리어 내전을 초래하고 말았다. 


▲  최영 장군의 상상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에 있는 최영장군묘의 입구에 있다. ⓒ 김종성

이런 분위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명나라에서는 내부적으로 분쟁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고려군이 만주 서부를 공격했을 경우, 명나라가 총력을 기울였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고려군이 만주를 공격했다면, 황태자 주표를 지지하는 중앙정부에서는 고려와 가까운 곳에 있는 연왕 주체에게 좀더 많은 부담을 지우려 했을 것이고, 주체는 이 전쟁으로 자신의 전력이 약화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연왕 주체는 몽골과도 대립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몽골에 이어 고려까지 적이 되는 것은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주체로서는 고려군과 싸우면서도 자신의 기본 전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야만 그는 황제의 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연왕 주체가 고려군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한다고 해서, 중앙정부가 나서서 전력을 다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왕 주체를 경계해야 하는 상태에서 대규모 군대를 만주나 고려로 보냈다가 자칫 황태자의 권력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당시의 명나라는 고려군을 상대로 최선의 방어전을 하기가 힘들었다.  

설사 황족들이 단결하여 고려군을 막는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몽골과 여진족이 이 틈을 놓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인접한 만주에서 벌어지는 고려-명나라 전쟁을 어떻게든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몽골과 여진족의 움직임은 전쟁의 판도를 얼마든지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명나라가 내부 단결을 이룬 상태에서 고려와 단둘이 일대일로 대결한다면, 명나라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몽골·여진족이 가세해서 판도를 복잡하게 만들 경우에는 결과를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만주에서 고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명나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정세 때문에, 고려가 만주 서부를 공격한다 해도 당시의 명나라로서는 최선을 다하기가 쉽지 않았다. 명나라는 몽골·여진족의 개입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고려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최영의 만주수복은 충분히 가능했던 시나리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최영의 만주수복운동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고려가 이겼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명나라가 최선을 다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고려가 한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최영이 5만 대군을 동원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성계 역시 겉으로는 만주정벌 불가론을 내세웠지만, 이것이 그의 진심은 아니었다. 이성계 역시 조선을 세우자마자 정도전과 함께 만주정벌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나? 이성계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1388년에 만주정벌을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만주정벌에 내몰리기보다는 쿠데타를 벌이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영의 만주수복운동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일흔세 살의 최영이 민족적 숙원인 만주수복에 나선 것은, 그가 생각해도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가 쿠데타를 막을 능력만 있었다면, 만주수복의 꿈은 그의 시대에 성취되었을지도 모른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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