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75358

'뼛속까지 친몽골' 군주의 변신, 자주·개혁 둘 다 잡았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신의>, 세 번째 이야기
12.09.08 10:14 l 최종 업데이트 12.09.08 10:14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신의>의 공민왕. ⓒ SBS

가장 존경하는 왕이 누구냐고 물으면, 세종이나 정조라고 답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이분들도 훌륭하지만, 알고 보면 이분들 못지않게 대단한 임금이 있다. 드라마 <신의>에 나오는 고려 공민왕이 바로 그이다. 

공민왕은 인간성은 좀 좋지 않았다. 자신을 대신해서 수구세력을 제거한 신돈을 가차 없이 토사구팽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울 때는 의리나 신의도 과감하게 휴지통에 내다버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공민왕보다 139년 뒤에 출생한 이탈리아 정치학자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17장에서 "(군주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외경을 받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충고했다. 외경이란 말 그대로 두려움이 섞인 존경심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에 누구보다 적합한 인물이 바로 공민왕이다. 그는 남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성이 좀 안 좋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을 접고 객관적 업적만 보면, 공민왕을 따라잡을 군주가 별로 없다. 아래 내용을 읽다 보면,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인 발해 멸망 사건 이후로 공민왕만큼 대단한 군주도 없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자주와 개혁 '두 마리 토끼' 모두 잡은 공민왕

서기 926년 발해 멸망을 계기로 활동무대가 한반도로 축소된 이래, 한민족이 처한 최대 문제점은 사대주의와 반개혁이었다. 한반도에 갇히다 보니 대륙과의 충돌을 기피하는 사대주의 집단이 정권을 잡게 되고, 이들이 외세와의 동맹을 이용해서 권력을 공고히 하다 보니 개혁세력이 설 자리가 좁았다. 이러다 보니, 대부분의 왕들이 자주보다는 사대, 개혁보다는 반개혁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달랐다. 그는 자주와 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포획했다. 대한민국의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이 건국 60년이 넘도록 제대로 잡지 못한 이 두 가지를, 그는 재위기간(1351~1374년) 내에 잡아내는 성과를 이룩했다. 아들인 우왕과 손자인 창왕이 그의 포획물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공민왕은 자기 시대에 두 마리를 동시에 잡은 성공적인 군주였다. 


▲  종묘의 공민왕 신당.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소재. ⓒ 김종성

공민왕이 '자주'를 성취해낸 과정은 이렇다. 그는 왕이 될 목적으로 뼛속 깊은 친몽골파로 행세하다가, 권좌를 차지한 뒤에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확 돌변했다. 순식간에 뼛속 깊은 반몽골파로 둔갑해서 몽골을 몰아내는 데 전력을 다한 것이다. 

일국의 군주가 순식간에 친몽골파에서 반몽골파로 돌아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지지기반을 포기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웬만한 용기와 배짱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공민왕이 바보가 아니므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모험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몽골제국과 친몽골파를 몰아내기 위해 신속하게 동맹군을 만들어냈다. 그는 아웃사이더들 중에서 그런 동맹군을 찾아냈다. 

공민왕이 뽑아 무대에 데뷔시킨 아웃사이더 그룹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새로운 선비 그룹'이란 뜻의 신진사대부들이다. 지방 출신의 중소 지주인 이 유학자들은 중앙 출신의 대지주인 권문세족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이었다. 또 하나는 동북방 여진족 거주지역의 지도자들이다. 이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조돈(조광조의 조상)이다. 

몽골이 지는 태양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몽골이 세계 최강인 상태에서 몽골을 몰아내고자 비주류 세력을 과감히 발굴하고 이들의 힘을 결집한 것은, 공민왕이 탁월한 정치 감각과 고도의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광해군의 자주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는 여진족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선에서 머물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는 공민왕처럼 드러내놓고 명나라에 대항하지는 않았다. 공민왕처럼 과감하게 세계 최강을 상대로 맞짱을 뜬 군주는 발해 멸망 이후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공민왕이 '단순무식'했던 것은 아니다. 몽골을 몰아낸 뒤에 사정변경이 생기자, 그는 몽골에 다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몽골제국 내의 중국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 홍건적이 몽골뿐만 아니라 고려까지 위협하자, 그는 홍건적을 견제할 목적으로 몽골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몽골이 명나라에 밀려 몽골초원으로 쫓겨나자, 공민왕은 잡았던 손을 얼른 떼버렸다. 때로는 범처럼 때로는 여우처럼 세계 최강을 상대했던 것이다. 지난 1000년간 이처럼 대담하고도 유연하게 자주를 실천한 군주가 또 있었을까?

범처럼 여우처럼 '세계 최강국' 상대... 냉혹한 모습도 보여


▲  공민왕 신당에 걸린 준마도. 공민왕의 작품이다. ⓒ 김종성

공민왕은 외부의 적만 몰아낸 것이 아니다. 흔히, 외부의 적과 싸우려면 내부를 통합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공민왕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몽골에 맞서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수구세력인 권문세족에게도 맞섰다. 세계 최강과 싸우는 것도 벅찬 일인데, 내부의 적들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권세 있는 가문과 세력 있는 족속'이란 의미의 권문세족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개경 출신의 대토지 소유자인 이들은 실력보다는 가문을 배경으로 출세한 집단이었다. 신진사대부들이 주로 자기 실력을 통해 출세한 것과 대조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의 경제민주화 세력이 재벌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듯이, 지방 출신의 중소 지주인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에게 불만을 품었다. 이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꼭 경제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은 실력으로 승진하고 출세하는 데 반해, 권문세족은 가문의 후광으로 쉽게 출세한다는 것도 이들에게는 불만이었다. 

공민왕은 이런 불만을 십분 활용했다. 그는 무명의 승려인 신돈을 내세워 권문세족에게 타격을 가하고 신진사대부들을 요직에 앉혔다. 이 과정을 통해 이른 시간 내에 지배층을 교체함으로써, 그는 자주의 과제와 더불어 개혁의 과제까지도 성사시켰다.

오늘날의 대통령들은 자신이 직접 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경험 많고 명망 있는 국무총리를 발탁하곤 한다. 그런데 공민왕은 자신이 통제하기 쉬운 무명의 승려를 전격 발탁해서 그런 소임을 맡겼다. 전혀 검증이 안 된 인물을 내세워 개혁을 수행한 것을 보면 공민왕이 도박사의 기질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의 개혁으로 지배층의 자리에 오른 신진사대부들은 공민왕이 죽은 지 18년 뒤에 조선왕조의 건국 주역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고려왕조는 싫어하면서도 공민왕만큼은 존경했다. 공민왕의 개혁 덕분에 지배층의 자리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세력이 공민왕을 존경했다는 점은, 조선왕조의 사당인 서울 종묘에 공민왕 신당이 별도로 모셔진 데서도 감지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경험했듯이, 자주나 개혁 같은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는 통치자들은 그렇지 않은 통치자들에 비해 인간적으로 모질지 못하고 뻔뻔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공민왕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냉혹하고 뻔뻔한 모습까지 동시에 보여준 것이다. 

공민왕은 신진사대부들에게 은혜를 베풀면서도 그들을 견제했다. 승려인 신돈을 내세워 유학자인 신진사대부들을 중용한 것은, 개혁 과정에서 유학자들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렇게 개혁을 완수한 뒤, 공민왕은 신돈에 대한 탄핵 분위기를 조성해서 그를 제거했다. 고려가 신돈의 나라가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처럼 공민왕은 자기편에 대해서도 모질게 굴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 친몽골파로 행세하다가 하루아침에 반몽골파로 돌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필요하면 주저 없이 이미지를 변신하는 인물이었다. 좀 '뻔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이상을 추구한 군주 중에서 이렇게 모질고 뻔뻔한 '정치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성이 좀 안 좋기는 하지만, 자주와 개혁이라는 과제를 공민왕처럼 성취한 군주는 지난 1000년간 거의 없었다. 자기의 업적을 지켜낼 후계구도를 확립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점이 아쉽지만, 어쩌면 공민왕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갈구하는 통치자의 모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별로 생기는 것도 없이 미국에 굽실거리고, 미국에 아부하는 집단이 60년이 넘도록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뜯어고치는 길은, 공민왕 같은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공민'왕'이 아니라 공민 '대통령'이 나오는 날, 대한민국에서도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친미 수구세력이 사라지는 드라마틱한 역사가 펼쳐지리라 기대해본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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