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66933
▲ 내몽골자치구 흥안맹(盟) 오란호특(우란하오터)시에 있는 칭기즈칸사당(칭기즈칸묘). 맹(盟)은 내몽골자치구 특유의 행정단위. 칭기즈칸묘의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을 가리킨다. ⓒ 김종성
칭기즈칸 후예들,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무신>, 열두 번째 이야기
12.08.14 09:57 l 최종 업데이트 12.08.14 09:57 l 김종성(qqqkim2000)
▲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파림좌기(旗)의 한 식당에 걸린 칭기즈칸 초상화. 기(旗)는 내몽골자치구 특유의 행정단위. ⓒ 김종성
중국 북쪽의 몽골초원에는 강력한 유목국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많았을'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중국 땅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거나 아니면 저 멀리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몽골족이 바로 그들이다.
몽골은 MBC 드라마 <무신>의 시대적 배경인 13세기 중반보다 약간 앞선 13세기 초반에 채택한 국호를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골제국의 본거지인 몽골초원의 상당부분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는 비결은 무엇일까?
지금의 몽골공화국과 내몽골자치구(중국령)는 넓은 의미의 몽골을 구성한다. 이 몽골의 삼면은 산림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몽골의 서쪽에는 알타이산맥, 동쪽에는 흥안령(싱안링)산맥, 북쪽에는 바이칼호수 밑의 산림지대가 펼쳐져 있다. 한편, 남쪽은 중국 농경지대와 맞닿아 있다.
13세기에 채택한 국호 여전히 사용하는 이유
산림지대로 둘러싸인 몽골을 남북으로 가르는 것이 고비사막이다. 중국인들은 고비사막 이북을 외몽골, 이남을 내몽골이라 부른다. '몽골초원'은 외몽골 초원과 내몽골 초원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외몽골 초원은 중앙아시아·중동·동유럽과 통하고, 내몽골 초원은 중국과 통한다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기원전 수세기부터 동아시아 유목민들은 기본적으로 몽골초원 주변의 산림지대에서 출발했다. 칭기즈칸의 조상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목지대에서는 돌궐족과 위구르족이 패권을 행사하고 농경지대에서는 당나라가 패권을 행사하던 시절, 칭기즈칸의 조상들은 흥안령산맥 북부의 산림지대에 거주했다.
이들은 처음부터 유목민족이 아니었다. 산림지대에서 수렵채집 경제를 영위하는 산림민족이었다. 물론 농경이나 유목도 병행했지만, 이들의 가장 지배적인 우클라드(경제제도·생산양식)는 산림에서의 수렵채집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산림민족이라 부르는 것이다.
수렵·채집보다는 목축이나 유목이 훨씬 더 안정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산림민족은 항상 몽골초원을 동경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초원으로 진출할 수는 없었다. 뻥 뚫린 초원으로 나갔다가 종족 파멸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냥 산림지대에 남는 것이 더 나았다. 산림지대는 발전 가능성은 낮아도 외적 방어에는 유리했기 때문이다.
▲ 내몽골자치구 흥안맹(盟) 오란호특(우란하오터)시에 있는 칭기즈칸사당(칭기즈칸묘). 맹(盟)은 내몽골자치구 특유의 행정단위. 칭기즈칸묘의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을 가리킨다. ⓒ 김종성
산림민족이 초원으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초원지대의 정치변동이었다. 초원의 역학구도가 바뀌어 빈자리가 생겼을 때만 산림민족이 진입할 수 있었다. 빈자리란 것은 기존 강자의 종속세력일 수도 있고 새로운 강자의 자리일 수도 있었다.
칭기즈칸의 조상들도 그런 변동을 틈타 초원지대에 진입했다. 위구르족의 패권이 붕괴하고 몽골초원에서 대규모 민족이동이 발생한 9세기 중반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초원에 진입한 뒤 이들은 기마문화 및 유목문화를 배워 유목민족으로 전환됐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때가 12세기 중반이므로, 그는 자기 조상들이 불과 3백 년 전만 해도 유목민족이 아니라 산림민족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칭기즈칸의 조상들은 외몽골 초원의 동부에 자리를 잡았다. 내몽골이 아닌 외몽골 초원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은 훗날 몽골족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아직까지 몽골이란 국호를 갖고 초원지대에 웅거하는 비결도 이 점과 관련이 있다.
산림민족이 외몽골 초원을 지향하느냐 내몽골 초원을 지향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외몽골초원으로 나가 유목민이 되는 민족은 향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방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흉노족이나 돌궐족이 서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외몽골 초원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반면, 내몽골초원으로 나가 유목민이 되는 민족은 중국 쪽으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북중국을 장악하고 남중국 및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농경지대와 인접한 내몽골 초원을 거점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족은 서방 세계로도 뻗어갔고 중국 쪽으로도 뻗어갔다. 동유럽·중동·중앙아시아·중국을 동시에 석권한 유목민족은 몽골족뿐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외몽골 초원을 장악한 뒤 내몽골 초원까지 접수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초원을 모두 장악했기에 두 개의 방향으로 동시에 팽창할 수 있었다.
몽골족의 생명력, 지리적인 영향도 크다
이제, 다음 문제를 고려해보자. 두 개의 초원 중 어느 쪽을 장악한 민족이 훨씬 더 오랫동안 유목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내몽골보다는 외몽골을 장악한 쪽이 생명력이 더 길었다는 것이다.
내몽골 유목민족은 설령 중국을 정복한다 해도 결국 유목문화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하면, 농경지대인 중국을 지배하자면 농경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초원 위에 건설된 파림좌기가 멀리 보인다. 풀을 뜯고 있는 당나귀들이 가까이 있다. ⓒ 김종성
중국에 진출한 유목민족이 농경문화를 수용하는 것을 보고 중국인들은 "우리 쪽에 동화됐다"고 자찬하고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그들은 매우 타락하고 말았다"고 평가했지만, 유목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농경지대에 와서 유목문화를 유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목민족은 새로운 생활환경에 금방 적응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유목민이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떠돌아다니다 보면, 현지 문화에 쉽게 적응하기 마련이다. 유목민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중국에 '동화'된 게 아니라 '적응'했을 뿐이다.
내몽골 유목민족은 이처럼 중국 농경지대로 나가 농경민족으로 전환되기도 쉬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의 공격을 받아 파멸될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본거지가 중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들은 항상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 외몽골 유목민족은 중국을 압박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대신에, 중국의 공격을 받아 파멸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중국 군대가 외몽골 초원으로 가자면 내몽골 초원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으로 보나 거리로 보나 중국이 외몽골을 제압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외몽골 유목민은 설령 중국 군대에 쫓긴다 해도, 중앙아시아나 중동 쪽으로 도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흉노족이나 돌궐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몽골에서 동유럽까지 펼쳐진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여전히 유목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외몽골 초원에서 기반을 잡은 뒤 내몽골 초원으로 나갔다. 다시 말해, 그들의 본거지는 외몽골에 있었다.
이 점은 몽골족이 대제국의 해체 후에도 여전히 몽골의 이름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비결을 설명해준다. 내몽골이 아닌 외몽골에서 유목민족의 첫발을 내디뎠고 그곳에서 기반을 잡았기에, 몽골족은 몽골제국의 잔존세력을 분쇄하려는 명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해 외몽골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또다른 요인들도 함께 작용했다. 14세기 후반에 한민족과 여진족이 명나라를 교란한 덕분에 몽골제국 잔존세력이 여유를 얻은 측면도 있었다.
특히 고려 말의 최영과 조선 초의 정도전이 요동정벌운동을 일으켜 명나라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명나라가 몽골제국 잔존세력에게 더 이상의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했다. 한민족과 여진족이 명나라를 교란하지 않았다면, 몽골족은 어쩌면 외몽골까지 잃고 중앙아시아·중동·동유럽 쪽으로 도피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다른 요인들도 함께 작용하기는 했지만, 몽골족이 계속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그들의 출발지가 외몽골이라는 점에 있다. 만약 내몽골에서 출발했다면, 수많은 유목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나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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