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3658
'산업스파이' 문익점, 인간 평균수명을 연장시키다
[역사 파고들기 ⑤] 사람 냄새 풍긴 문익점, '국민 의류' 탄생시켜
12.06.14 10:14 l 최종 업데이트 12.06.14 17:04 l 김종성(qqqkim2000)
▲ 옷을 입지 않은 구석기 초기의 사람들. 전곡리 유적지에 있는 모형.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소재. ⓒ 김종성
최초의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고 살았을 것이다. 성경 창세기 2장 25절에서도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고 했다.
구석기 사람들은 식물의 잎이나 짐승 가죽으로 몸을 보호했다. 창세기 3장의 이야기도 동일하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에덴동산 중앙의 과일을 먹은 뒤부터, 비로소 수치심을 느끼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다음에는 가죽으로 몸을 가렸다.
인간이 직조기술을 발명한 것은 신석기 시대에 접어든 뒤의 일이다. 이집트인들은 삼베를, 인도인들은 무명을, 중국인들은 비단을, 유럽인들은 모직물을 개발했다.
고대 한국의 경우, 모시나 삼베는 서민층의 옷이고, 비단은 부유층의 옷이었다. 의복의 빈부차이는 <명심보감>(성심편)에도 반영되어 있다. 재산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란 의미로 "꽃이 졌다 꽃이 피고, 피고 또 지며, 비단옷과 삼베옷도 교대로 바꿔 입는다"고 했다.
이 말은 비단을 입는 부유층도 삼베를 입는 서민층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부유층은 비단을, 서민층은 삼베를 입는 실정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은 여름에 시원하라고 입는 모시나 삼베를 옛날 서민들은 한겨울에도 입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추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봄·여름·가을에도 밤에는 꽤 쌀쌀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600년 전만 해도 한국인들은 이렇게 살았다. 한국인들이 옷을 든든하게 입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600년 전에 한국인들의 의류생활에 일대 혁명을 갖다 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문익점이다. 그가 목화씨를 갖고 오지 않았다면, 우리 선조들이 밤마다 추위에 얼마나 떨었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고려 멸망 61년 전인 1331년, 문익점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과거시험에 급제한 것은 서른 살 때인 1360년이다. 4년 뒤, 그는 사신단 서열 3위인 서장관 자격으로 몽골제국(원나라)을 방문했다.
비교적 일찍 과거에 급제했지만, 몽골 방문을 계기로 그는 비운을 맞이한다. 몽골에 체류할 당시 고려 왕족 덕흥군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것이다.
덕흥군은 몽골의 지원을 받아 고려를 침입했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반(反)몽골 자주화 정책을 펴는 공민왕에 맞서, 몽골이 덕흥군을 대항마로 내세웠던 것이다. 하필 그때 몽골을 방문한 것이 악연이 되어 문익점은 '직장'을 잃고 말았다.
그 대신, 문익점은 귀중한 것 한 가지를 얻었다. 양자강 지역에서 목화씨 두어 개를 얻은 것이다. 그는 이것을 붓대 속에 숨겨 몰래 귀국했다. 지금으로 치면, 볼펜 속에 목화씨를 숨겨서 반입한 셈이다.
▲ 비교적 옷을 갖춰 입은 신석기인들의 모습.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전시된 그림. 서울 강동구 암사동 소재. ⓒ 김종성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누에알의 유럽전파와 흡사
인도에서 기원한 목화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송나라 때인 12~13세기였다. 고려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중국에서 목화 재배가 발달한 것은 몽골제국 때인 13세기 후반이었다. 문익점이 몽골 치하의 중국을 방문한 14세기 후반에 중국에서는 목화 재배가 한창 성행하고 있었다.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은 누에알의 유럽 전파와 흡사했다.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서는 비단 제조법을 극비에 부치고 누에알의 유출도 방지했다. 한국·일본 쪽으로는 이런 것이 유포됐지만, 서양 쪽으로는 쉽사리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6세기 중엽에 기독교 성직자 두 명이 누에알을 지팡이 손잡이에 숨기고 중국을 빠져나가 비잔틴제국으로 갔다. 문익점도 그런 방식으로 목화씨를 갖고 나온 것이다.
중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문익점은 일종의 산업스파이지만, 그는 일반적인 산업스파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사람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휴머니스트였던 것이다.
첨단산업의 소재인 목화씨를 갖고 돌아왔으니 이걸 갖고 돈을 벌거나 정치적 복권을 시도하려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도 복권을 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려사> '문익점 열전'에 따르면, 1364년에 귀국한 문익점은 정천익과 함께 목화씨를 시험 재배했다. 처음에는 거의 다 말라 죽었다. 충분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3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결국 재배에 성공한 문익점은 고향 사람들에게 목화씨를 무상으로 분배하고 재배를 권장했다. 조선 <태조실록>에 실린 '문익점 졸기'에 따르면, 그는 목화를 갖고 무명을 만드는 기술까지 무상으로 가르쳐주었다.
목화 재배와 무명 제조는 불과 10년 만에 고려 전역에 파급되었다. 대단한 기술이 요구되지 않는데다가, 무명이 질기고 따스해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재배하고 제조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무명은 서민의 대표적 의류로 급부상했다.
어찌나 빨리 전파됐는지, 고려 멸망 직전에는 혼수용품으로 비단 대신 무명을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법률이 제정될 정도였다. 비싼 비단 대신에 값싼 무명이 혼수용품이 되었으니, 서민들의 가계부담도 크게 줄었을 것이다.
목화와 무명은 그야말로 들판의 불처럼 번져나갔다. 태종 1년 윤3월 1일자(1401년 4월 14일)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이미 무명은 온 국민의 대표 의류가 되었다. 고려 말에 들어온 무명이 조선 초에 이미 '국민 의류'가 된 것이다. 한국인의 의류생활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 문익점의 무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소재.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문익점의 진심이 통하다
이렇게 온 나라를 따스하게 만들었는데도, 정작 주인공인 문익점과 그 가족은 여전히 가난했다. 문익점이 관심을 가진 것은 세상 사람들이 무명옷을 입고 따스하게 지내는 것뿐이었다. 익점(益漸)이란 이름에는 '더해지고 늘어난다'는 의미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세상의 이익이 더해지고 늘어나는 데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문익점의 진심은 결국 통했다. 조선 건국 6년 뒤인 1398년에 그가 사망하자, 태조 이성계는 강성군이란 작위를 추증했다. 왕족이 아닌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작위인 군(君)을 수여한 것이다.
3년 뒤인 1401년, 제3대 태종 이방원은 문익점의 아들인 문중용을 정6품 사헌부 감찰(오늘날의 검사)에 임명했다. 문익점의 공로에 대한 보답이었다. 장원 급제자가 최초로 받는 관직은 보통 종6품이었다. 문중용은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다. 문익점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쓸쓸하게 죽었지만, 세상에 베푼 그의 사랑이 자손을 영광스럽게 만든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두고두고 문익점을 칭송하는 것은 그의 사랑이 질기고 따스하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륙을 정복한 위인도 훌륭하지만, 서민들에게 따스함을 선사한 문익점 역시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인물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오래 사는 것은 원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주가 끊임없이 개선된 덕분이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까지도 밤마다 벌벌 떨어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인간의 평균수명이 40년을 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의 경우에 인구의 절반정도가 20년도 못 살았고 나머지의 90%는 40세 이전에 죽었다고 한다. 의복이 불충분했다면, 현대 인류의 수명도 지금보다 현저히 짧았을 것이다.
의류의 개선은 인간의 평균수명 연장에 기여했고, 문익점의 활동은 한국인의 평균수명 연장에 기여했다. 그러니 우리가 문익점에게 얼마나 큰 신세를 지고 있는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문익점 같은 기술자, 문익점 같은 기업인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한층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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