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52N5Ed (문서파일)
* "박물관역사문화교실 ⑧ 구지가(龜旨歌)가 말하는 가야사 - 이영식"에서 "Ⅱ.구지가와 수로왕의 가락국 세우기"내용을 가져왔습니다.
구지가와 수로왕의 가락국 세우기
1. 가야사의 고향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아마도 이 노래를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 노래는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가락駕洛의 아홉 촌장(九干)들이 모여 가락국을 세우는 수로왕(首露王)을 맞이하면서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입니다. 그렇지만 가락국의 건국 신화에 포함되어 있는 구지가의 내용이 가락국의 성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철거된 구지봉 석조기념물>
김해시의 중심에서 진영으로 통하는 국도 변 구산동(龜山洞)에 위치한 허왕후릉 옆의 구지봉(龜旨峰)은 구지가가 불렸던 무대였습니다. 지금은 구지봉 끝자락에 국립김해박물관이 들어서 있어 박물관 뒤편의 낮은 언덕이라는 편이 찾기 쉬울 겁니다. 허왕후릉 쪽에서 구지봉에 오르면 그 끝에 여섯 개의 알을 형상화한 석조기념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지봉이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면서 원형회복의 명목으로 철거되어 현재는 6란의 석조물만이 수로왕릉으로 이전되어 있다)
<구지봉고인돌과 김해시내 전경> <구지봉석 명문>
가락국을 세우기 위해 가장 큰 알로 다른 다섯의 알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수로왕의 건국신화를 표현한 것으로 1970년대에 김해시민들이 만들어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가야시대의 유적은 아닙니다. 진짜는 따로 숨겨져 있습니다. 석조기념물에서 왼편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평평하고 널찍한 뚜껑돌(蓋石)이 대여섯 개의 짧고 둥근 돌다리(支石)로 받혀진 석조물이 눈에 들어 올 겁니다. 무려 2천2백년 전에 만들어 졌던 고인돌입니다. 뚜껑돌(蓋石)에 깊게 새겨진 구지봉석(龜旨峰石)의 명문은 한석봉 글씨라고 전해집니다. 그 진위야 ‘TV진품명품’에 맡겨야겠지만, 이 고인돌이야말로 구지가가 노래되고 수로왕이 김해에 가락국을 세우던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았던 산 증인입니다. 왜냐구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이 김해에 등장하여 가락국을 세웠던 해는 서기 42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원전 2세기가 되면 남해안지역에서도 구지봉석과 같은 고인돌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지봉의 고인돌이 아무리 늦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연대적으로 기원전 2세기보다 더 내려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지봉의 고인돌은 수로왕이 등장하기 200년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라서, 수로왕이 등장할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구지봉의 고인돌이야말로 가락국의 성립을 지켜 본 산 증인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2. 가락의 아홉 촌장들
<부여 송국리유적 돌널무덤 출토품>
그런데 이러한 고인돌이 구지봉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남지역에는 무려 2만 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고, 김해지역에서도 수십 기 이상 확인되고 있습니다. 먼 데까지 갈 것 없이 김해시 장유면 중심의 광석廣石마을에는 길이 11m 넓이 4m 이상 되는 엄청나게 큰 고인돌이 있고, 그 주변의 고인돌들은 1960년대에 발굴되어졌습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전시실의 거의 맨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대롱옥(管玉), 간돌칼(磨製石劍), 좁은놋단검(細形銅劍)은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출토되었던 것이지만, 광석마을의 고인돌에서도 같은 세트가 출토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고인돌에서 청동기는 출토되지만 철기는 아직 출토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인돌은 철기시대 이전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죽은 조상을 묻기 위한 무덤이었던 것이 확인되는 셈입니다.
반면에 수로왕이 김해지역을 장악하고 처음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바탕은 철을 다룰 줄 알았던 선진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해金海의 「쇠바다」라는 이름은 지금의 김해평야 일대가 바다였다는 것과 가락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수로왕과 그 일행들이 처음으로 철을 발견하고 다루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지봉의 고인돌을 비롯해서 김해지역의 고인돌들을 세웠던 사람들은 수로왕집단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구였겠습니까? 가락국의 건국신화에는 구간(九干)이라는 가락의 아홉 촌장들이 구지가를 부르면서 수로왕을 맞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김해지역에는 수로왕 이전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각 집단들은 아홉 촌장에 의해 영도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가락국 성립 전의 구간사회(九干社會)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구간사회는 가장 오래된 무덤인 고인돌을 만들었고, 청동기를 무기나 제기와 같은 상징적 심볼로 사용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사회가 김해지역에서 종말을 고하는 것은 고인돌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기원전 2∼1세기경이 되지만, 그 이전의 몇백 년 동안은 아홉 촌장이 지도하는 부족사회가 계속되어 왔었던 겁니다.
3. 잘린 거북이 목
<구지봉(좌) 허왕후릉(우)>
끝으로 여담 한 가지. 사진과 같이 지금은 구지봉(왼쪽 숲)과 허왕후릉 (오른쪽 숲) 사이를 돌로 된 구름다리(중앙터널)로 연결해 놓았습니다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부산에서 마산으로 통하는 국도를 개설하면서 잘라 놓은 언덕길을 얼마 전에 이어 놓은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구지봉을 거북이가 엎드려 고개를 앞으로 내민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가 거북이의 목 부분입니다.
김해의 어르신들은 ‘일본 놈’들이 거북이 목을 잘랐기 때문에, 김해에서 더 이상 ‘큰 인물’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탄식해 왔습니다. 그래서 구름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지맥을 연결했더니, 드디어 김해에서도 인물이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한림면 출신의 박찬종씨가 그 분이라 하더니, 요즈음은 지금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때 대통령, 김종필 국무총리, 김중권 비서실장을 들기도 하고, 1500년 만에 부활한 김해 김씨의 가야왕국이라는 농담도 합니다. 다시 진영 출신의 노무현 전 대통령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믿으시는 편입니까? 믿거나 말거나의 한 토막이었습니다.
4. 구지가는 각색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구지봉 고인돌 앞에 서 있습니다. 구지가와 김해지역의 고고학자료가 말하는 가야사의 시작을 좀 더 얘기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구지가는 누가 불렀다 했지요? 가락의 아홉 촌장들이 불렀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지가는 부족사회인 구간사회의 제의에서 불려지던 노래였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구지가에서는 “머리를 내어라”고 했고, 그래서 나타난 우두머리가 수로였습니다. 머리 수(首)에 나타날 로(露)가 수로왕의 이름이 되었던 거지요. 따라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구지가는 구간사회의 노래가 아니고, 가락국의 성립과 수로왕의 등장을 신성하게 꾸미는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 구간사회(청동기문화)의 구지가가 가락국(철기문화)의 구지가로 각색되었던 것입니다.
5. 위협주술
이러한 사실은 구지가를 비슷한 고대의 노래와 비교해 보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구지가는 고대인들이 어떤 기원을 할 때 펼쳤던 주술(呪術)의 노래였습니다. 주술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구지가는 위협주술 또는 협박주술의 형식입니다. “머리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이거야말로 협박이나 위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때 위협을 당하는 대상은 거북(龜)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위협주술의 패턴이 세계적인 것이긴 하지만, 우리 고대사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산신(山神)에게 어떤 기원을 하고자 할 때, 사슴(鹿)을 잡아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는 창으로 꾹꾹 찔러 가며 주술을 외웠습니다. 백제에서는 천신(天神)에게 기원을 하기 위해, 매(鷹)를 잡아 좁은 틀 안에 가두고 물과 먹이도 주지 않으면서 주술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떻습니까?
<동래 복천동고분 기대> <기대세부-거북토우> <동래 복천동고분 청동오리>
산신에게 기원할 때는 산짐승인 사슴을 위협하고, 천신에게 빌 때는 하늘의 새인 매를 잡아 괴롭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 하느님께 기원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인간이 신에게 직접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메신저(messenger)(使者)를 통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따라서 우리 고구려인과 백제인은 사슴과 매를 산신과 천신의 메신저로 파악하고, 그들을 위협하거나 괴롭히면 각각의 신들이 자신의 메신저를 불쌍히 여겨, “괘씸한 놈들”이라 하면서도 인간의 소원을 들어 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6. 가락국의 성립
이제 다시 구지가로 돌아가 봅시다. 구워 먹겠다고 위협 당하는 동물은 거북입니다. 그런데 거북을 위협한 결과로 이루어진 소원은 하늘에서 수로왕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사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위협 당하는 거북이는 바다동물인데 소원을 들어 주는 것은 하늘의 천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구지가가 누군가에 의해 각색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위협주술의 패턴대로라면 거북을 위협하면서 기원하는 대상은 천신天神이 아니라 해신(海神)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수로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구간사회인들은 구지봉의 고인돌을 우러러 보며 봄과 가을에 굿판을 벌였습니다. 이때 거북이를 위협하면서 해신에게 많은 생선과 조개가 잡히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우두)머리를 내어라”가 아니라, 많은 해산물을 내라고 비는 풍요제의(豊饒祭儀)에서 불렸던 것이 원래의 구지가였던 겁니다. 그런데 수로왕이 선진의 철기문화를 가지고 김해지역에 등장하여 가락국을 세우고 보니, 자신의 출신을 신성화할 도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건국신화의 창작입니다. 마침 김해의 먼저 주민이었던 구간사회인들이 신성시하는 장소(龜旨峰)와 노래(龜旨歌)가 있었습니다. “됐다! 이 노래에 이 장소에 나의 출현이야기를 담아보자.” 그래서 원래 구지가의 ‘해산물’은 ‘우두머리’로 둔갑하였고, 거북이를 괴롭혔는데 하늘에서 소원을 들어 주는 우스꽝스런 모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야시대라 해서 거북이가 하늘을 날았을 리는 없었을 겁니다. 또 수로왕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요소를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건국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강신화(天降神話)는 단군신화나 일본의 건국신화와 같이, 다른 지역에서 들어 와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수로왕 집단이 선진의 철기문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게 멸망당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후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신성화를 위해 구지가의 각색은 필요하였지만, 원래의 출신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7. 무덤은 말한다
<김해 대성동 39호분> <김해 양동212호 목걸이>
다시 이러한 사실은 김해지역의 고고학적 증거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구간사회인들이 만든 고인돌은 김해의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고, 각각에서 출토되고 있는 껴묻거리(副葬品)에서 분명한 우열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인돌의 분포나 유물에서 볼 때, 아홉촌장이 나누어 이끌던 부족연합의 구간사회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락국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지는 목관(木棺)․목곽묘(木槨墓)에서 처음으로 철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목관․목곽묘 역시 김해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기는 하지만, 김해시내에 위치하는 것들만이 대형화되고 아주 화려한 부장품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대성동고분군과 양동고분군 같은 김해시내의 목곽묘와 주변의 것에서는 삼성 이건희와 서민 이영식의 재산만큼이나 너무나 분명한 우열의 차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홉 촌장의 구간사회 시대가 수로왕의 가락국 시대로 바뀌면서 김해의 부와 권력이 김해시내의 특정지역으로 집중되고 있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1972년 이전까지 1시(市)․1읍(邑)․9면(面)으로 나누어져 있던 행정구역이 얼마 전에 하나의 김해시로 통합되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8. 가야 각국 형성의 모델
이러한 해석을 도식화해 본 것이 아래의 표입니다.
다행히도 김해지역에는 구지가의 건국신화라는 문자기록이 있고,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의 교체양상을 짐작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있어 가락국 형성의 비밀을 풀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남해안에 인접한 다른 가야에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지역에서 가야라는 최초의 소국정치체가 형성되었던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얘기한 내용을 가야 각 국 형성의 모델로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야사의 시작은 이렇게 김해의 구지봉을 무대로 막을 올리게 되었다고 해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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