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4895.html
잊혀진 가야의 흔적 위엔 이성계 승리의 역사만이
[신백두대간기행 ④ 고남산]
지리산 북쪽 줄기에서 만난 노치마을과 운봉고원에서 옛사람들의 삶을 마주하다
▣ 윤승일 [2009.05.08 제759호]
백두대간의 미덕은 물길을 가르고 물길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일러주는 일이다. 정령치를 내려온 백두대간길은 60번 지방도로를 타고 북진한다. 어디가 높고 어디가 낮은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지인 고원에서도 대간은 미덕을 잃지 않는다. 올해의 수확을 위해 물을 댄 논들의 둑은 도로를 중심으로 왼쪽 논은 왼쪽으로, 오른쪽 논은 오른쪽으로 계단 져 내려간다. 언뜻 오른쪽이 높아 보이는데도 물은 도로를 넘나들지 않는다. 전통 지리인식인 산수경 체제는 산 따로 물 따로 존립하지 못한다.
» 고남산 아래 권포리 마을의 돌장승과 조산탑. 돌장승은 500여 년 전에 세운 것이라 한다. 태조봉으로 불리기도 하는 고남산 정상이 보인다. NIKON D90. NIKKOR17-55, F/6.3, 1/1255
‘백두대간이 관통하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자부심
아스팔트를 따르던 대간길이 이내 마을길로 접어든다. 노치마을이다. 비보풍수(裨補風水·풍수의 원리에 따라 재앙을 막는 것)의 한 모습인 조산탑을 돌아들어 자리잡은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에 백두대간 기념물이 세워져 있는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당산나무를 만난다.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풍모를 잃지 않아 지나는 이들을 감탄케 하는 잘생긴 소나무 다섯 그루는 덕유산에서 흘러온 기운이 넘쳐 지리산에서 오는 정기를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멀리 지리산의 주능선은 병풍처럼 버티고 서 돌아드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그리 믿는 데는 내력이 있다.
“일본 사람들이 땅을 잘 알잖우. 저그 지리산의 기운이 시작하는 곳에 뜸을 떴다니께.” 노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물을 댄 논에 지리산의 그림자가 비친다. 일본인들이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구덩이를 파 숯을 묻고 돌침을 놓은 뒤 아예 저수지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마을 사람들이 저수지를 없애고 돌침을 꺼내놓았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내린 물도 덕유산에서 내린 물도 물길은 정확하게 노인이 일러준 곳에서 만나 좌우로 갈라져 흐른다. 마을의 조산은 마을 좌우로 헛헛한 기운을 보하고 흐르는 물을 따라 마을의 정기가 새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미신으로 치부하면 보이지 않지만 이치를 따져보면 비보풍수는 자연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옛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흐름은 발원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산을 하나의 줄기로 이해하니 산의 발원지도 백두산 한 곳이어야 하고, 지리산의 시작은 덕유산의 산줄기가 내리막을 타다 비로소 오르기 시작하는 노치마을로 보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노치마을 당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비로소 다시 산으로 오른다. 수정봉이다. 수정이 많이 나 그리 불린다는 설명은 산을 삶과 단절시킨 산맥 개념으로 풀이하는 산 이름이다. 온 나라의 70% 이상이 비탈인 탓에 삶은 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산은 사람들의 생활과 따로 있지 않는다. 춘궁기를 버텨낼 수 있는 먹을거리부터 집을 지을 재목에 겨울을 이겨낼 땔감까지 산에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 옛사람들의 살림살이다. 그만큼 산은 귀했기에 산 자체가 신앙이기도 했다. 수정봉이라는 이름의 내력에는 산을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이 담긴 것이다.
» 백두대간이 지나는 노치마을의 백두대간 기념비. 백두대간은 마을 가운데를 지나 당산을 오른 뒤 수정봉으로 이어진다.
왜구 능욕에 자결한 여인의 전설 품은 여원치
수정봉을 내려서 임도와 능선을 오가던 백두대간의 길이 다시 아스팔트를 만나 주춤거린다. 운봉과 남원을 잇는 여원치에서 ‘운성대장군’이란 이름을 단 돌장승이 외롭게 분주한 자동차 흐름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잦았다. 규모가 큰 왜구들은 남해로 상륙해 강을 따라 올라와 운봉을 지나 전라도 곡창지대로 향했다. 왜구는 여원치에서 주막으로 생계를 잇는 여인을 희롱했다. 여인은 왜구의 손길이 닿은 가슴을 스스로 도려내고 죽음을 택했다. 여인은 후일 산신으로 부활해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를 도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단다. 고갯길이 여원치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내력이다.
지리산 주능선과 백두대간 능선이 품어낸 운봉은 해발 450~550m에 이르는 드넓은 고원 지역이다. 남북으로14km, 동서로 5~6km에 이르는 방대한 고원은 물 또한 풍부해 사람이 살아온 내력이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길고 길다. 산자락에 기댄 마을의 내력 또한 박하게 잡아 수백 년이고 넉넉하게 잡으면 2천여 년에 이를 정도로 전통이 깊다. 이야기 또한 많아야 하지만 마을의 이야기는 대부분 조선시대 이상을 거슬러 오르지 않아 이야기의 끝은 대부분 이성계에 머문다.
KT의 중계탑이 선명한 고남산 역시 이성계에 뿌리를 둔다. 고려의 장수이던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전승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는 산이 고남산이다. 이야기는 산자락으로 내려오면서 정도전의 이름이 더해져 마을 이름으로 자리잡는다. “정도전이 이성계가 고남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펴라는 기원을 담아 마을 이름을 ‘권포리’라 부르게 했다”는 것이 마을 이름의 내력이다. 고남산의 다른 이름을 ‘태조봉’ ‘제왕봉’으로 부르는 내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내력을 더 더듬어 들어가면 백제와 신라의 시대를 지나 가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중계탑을 세우느라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상 부근에 남아 있는 돌로 쌓은 성벽이 가야의 봉화대 흔적이라는 것이다. 운봉고원을 동무 삼아 덕유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능선 20여 곳에 남아 있는 성의 흔적은 이미 허물어져 그 시작을 찾기 어렵지만 덕유산 가까이 봉화산 자락 아래 아막성터와 산 아래 아영면 월산리와 두락리 고분에서 가야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가야의 강역과 그 실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진다.
» 일부가 복원된 아막성 북문 근처와 방치된 남쪽 모습. 대가야 유물이 출토된 두락리 고분과 함께 운봉 일대가 대가야의 강역이었음을 증명하는 유적지다.
왜구 격파한 이성계가 제사 지내 태조봉·제왕봉으로도 불려
아막성터는 흥부마을로 알려진 아영면 월산리에서 가깝다. 고남산을 내려선 대간길이 매요마을을 지나고 88고속국도를 땅굴로 건너 다시 산을 오른 뒤에 철쭉꽃 붉은빛이 아지랑이처럼 산을 뒤덮어갈 때 돌무더길인 너덜처럼 무너져내린 성을 만난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무왕이 자신의 군사 3분의 2를 잃은 곳으로 알려진 성은 산 정상 부근을 두르는 633m의 석성이다. 성의 내력은 백제와 신라의 전투에서 멈춰 불분명하고, 무너진 성돌은 백두대간길의 디딤돌로 사용되고 있다. 살기 위해 쌓은 성에 갇혀 죽고 빼앗은 성을 다시 빼앗기기를 거듭하면서 돌에 남았을 피자국과 통곡은 바람과 비에 씻겨져 흩어졌다. 다만 역사는 침묵하지 않아 세월의 지층을 걷어낸 자리에서 가야의 유물이 출토되고 산 아래 마을 월산리와 두락리 일대와 백두대간 넘어 서쪽 장수에서도 가야의 것으로 알려진 양식의 고분이 발견돼 가야 강역이 이제까지의 상식의 선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게 했다.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이라 믿었던 가야 왕족은 하늘집(고분)을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의 능선에 지었다. 아영면 두락리 일대의 고분들은 지리산 백두대간을 향해 뻗은 능선 위에 자리잡고 있다. 미워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잊는 것이다. 일본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가야의 가치를 알렸던 미국인 존 카터 코벨 박사는 가야에 대한 망각을 “일본과 왜에 대해 남아 있는 앙금”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금관가야는 서기 400년 일본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고구려의 원군을 받아 겨우 위기를 넘긴다. 신라는 이후 한반도를 통일했다. 일본에 대한 앙금은 오래고 오래된 일이다.
무너진 성벽은 가야 봉화대의 흔적
아막성의 자리는 장수와 남원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아막성에 남겨진 가야의 유물은 금관가야의 뒤를 이은 대가야의 것이다. 금관가야 몰락으로 가야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대가야는 왜와 중국의 다른 나라와 연결할 바닷길이 필요했고 아막성은 섬진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한다. 섬진강에서 아막성에 이르는 봉우리에 남아 있는 봉화대터는 물길을 지키려는 가야가 세운 것이다.
1500여 년의 세월의 강을 건너 가야의 기억을 더듬어갈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은 산 아래 월산리와 두락리의 고분들이다. 높이 4~5m에 직경 20m 안팍의 고분은 나무가 자라 산이 되었다가 개간돼 경작지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유물들은 도굴됐고 전설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반복된 전쟁으로 사람살이가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되풀이된 탓이다. 백제의 것으로만 알려졌던 고분이 1989년 전북대발굴단의 조사 결과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가야 양식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가야의 역사는 긴 침묵을 끝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숙제를 남겼다.
존 카터 코벨 박사는 자신의 책 <한국 문화의 뿌리를 찾아>에서 “가야를 지도에서 되살려내자. 그것은 한국의 자랑이요, 뿌리이다”라는 말로 가야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역사는 침묵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역사의 소리를 듣는 귀를 키울 차례다.
참고 자료: <한국 문화의 뿌리를 찾아>(학고재·1999), 〈HD역사스페셜2〉(효형출판·2006)
남원=글·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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