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뿔 난 사람’의 진실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설화로 채워진 <일본서기>에서 추려본 사실적 ‘알맹이’…
제대로 해석하면 가야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
[2009.05.01 제758호]
[2009.05.01 제758호]
<일본서기>에서 가야가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숭신(崇神)과 수인(垂仁) 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두 ‘군주’는 각각 기원전 97~30년과 기원전 29년~서기 70년 사이에 왜국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들을 실존 인물로 보는 학자들은 물론 극소수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들이 주로 2~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각종 씨족 전승과 설화로 채워졌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 전승들이 완전한 허구에 불과할까? 가야 관련 전승을 보면, 그 나름의 ‘알맹이’를 건질 수 없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관모를 쓴 김해 가락국 고위자’
» 귀족들의 화살통이나 방패를 꾸미는 파형동기는 원래 일본열도 추장 계층의 상징물이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파형동기(맨 위)는 ‘가야-왜 복합체’를 이룬 적극적인 교역관계를 보여준다. 일본열도 고분시대의 일상적 연질 토기인 하지키(가운데)는, 특히 김해 등 영남 남부 무덤에서 많이 발굴됐다. 고분시대 일본의 고급 도질 토기인 스에키(아래)는 많은 면에서 가야의 토기를 모방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http://nagaeyari.wordpress.com
숭신·수인 관련 기록에서 보이는 가야 관계 기사를 종합해보면 ‘의부가라(意富加羅·김해의 가락국) 왕자인 이마에 뿔 난 도노아(都怒我) 아라사등(阿羅斯等)’이란 이가 왜국에 귀화를 하려다가 결국 다시 본국에 돌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왜의 왕에게 선물로 받은 빨간 비단을 나중에 신라인들에게 빼앗긴 고로 그의 나라와 신라 사이에 적대관계가 생겼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덧붙인 이야기는, 그 도노아라는 인물이 본국에서 도둑맞은 소의 보상금으로 제사의 대상인 하얀 돌을 받았는데, 그 돌이 나중에 미녀로 변했다는 것이다. 도노아가 미녀와 교합하려 하자 그 미녀가 왜국으로 날아가 나니와(難波·오사카 지역)의 신이 됐다고 한다.
‘이마에 뿔 난 사람’과 ‘미녀로 변한 신성한 돌’. 얼핏 봐도 이는 한반도와 왜국 관계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후대의 ‘설화’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하다. 사실 <일본서기>에서 약 6세기 중반 이전까지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와 같은 ‘설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일본서기>의 최초 대외관계 관련 기사인 만큼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상당히 관심을 기울였을 법하다. 그리고 우리가 주몽이나 박혁거세 설화에서 고대 사회조직이나 신앙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읽어내듯, 이 설화에서도 취할 것이 없지 않다. 예컨대 ‘도노아’를 일본어로 읽으면 ‘쓰누아’가 되는데, 이는 일본어 ‘뿔’(쓰노)에서 파생된 말로 보인다. 일찍이 이병도 박사가 지적했듯이 고대 한반도의 뿔 모양 왕관·관모들을 설화화한 것임이 틀림없다. 6세기 가야 지역과 관련한 <일본서기>의 기사에서 가끔 보이는 ‘아라사등’도 역시 이병도 박사가 일찌감치 이야기했듯이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이름에서도 보이는 ‘알’(‘큰’) 추장의 위호였을 것이다. 결국 “기나이(교토∼오사카) 지역의 왜국 성립 초기에 뿔 달린 듯한 관모를 쓴 김해 가락국 고위자가 다녀갔다”는 게 이 설화의 ‘알맹이’일 것이다.
‘돌’과 ‘미녀’의 관련성은 <삼국유사>(권4)에 실린 김해 지역 호계사라는 사찰의 파사석탑(婆娑石塔) 연기 설화에서도 보인다. 그 설화에 따르면 수로왕의 왕후인 허황옥이 큰 파도를 일으켜 항해를 방해하던 해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그 석탑을 배에 실어 한반도에 왔다는 것이다. 여성을 ‘땅’ ‘산’ ‘바다’와 연결하고 ‘하늘’ ‘말타기’ ‘활쏘기’로 상징되는 남성과 대조하는 동북아 고대인들의 상상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가야와 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아선 사연
왜국 군주가 준 비단 때문에 가야와 신라가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한반도 국가들이 앞다투어 일본에 조공해온 속국들’이라는 <일본서기> 편찬자들의 ‘기본 설정’을 반영한 설화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3세기에 동북아의 고급 직물 생산 중심지는 왜국이라기보다는 중국의 군현들이었다. 그러나 한창 강성했을 때의 가락국과 나중에 신라로 발전된 경주평야의 사로국이 다소 적대적 관계에 있었음을 한국 자료도 이야기해준다. <삼국사기>(권1)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21년(77년)부터 지마이사금 5년(116년)까지 사로국과 가락국은 낙동강 하류 지역인 황산진 등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열세에 몰린 가락국이 화친을 청한 것은 내해이사금 6년(201년)의 일이었으니 거의 한 세기 반에 걸친 장기적 항쟁이라 하겠다. 교통 요충지를 놓고 벌이는 영토 싸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왜국과의 교역을 장악하려는 진한(사로국)과 변한(가락국) 세력 사이의 각축이었을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도 중국 군현들과 구야국(가락국), 그리고 대마도 등 일본열도 지역들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언급된다.
실제 김해의 초기(2~3세기) 고분에서 발견되는 철부(鐵斧·쇠도끼), 철정(鐵鋌·덩이쇠) 등과 거의 유사한 유물들이 일본열도의 북부 나가노부터 남부 후쿠오카까지 여러 지역에서 많이 발굴된다. 즉, 가야가 일본열도 각종 추장 집단들의 주된 철 공급자였는데, 해양 무역과 연관성이 깊었던 탈해 집단 세력들이 이윤이 많이 나는 이 장사를 빼앗으려 했다. 한편으로는 김해 양동리 고분군을 조성한 초기 가락국 지배집단은 일본열도에 철을 공급한 대가로 왜인들이 중국 구리거울을 모방해서 만든 거울이라든가 동모(銅矛) 등 각종 위신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일본서기> 설화에서 이야기하는 ‘빨간 비단’은 아니지만, 가락국의 지배자들이 일본열도에서 나온 이국적 물건으로 위상을 높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일본서기>의 최초 가야 이야기는 그 설화성에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봐야 한다.
약 2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락국과 일본열도 각종 세력들의 긴밀한 우호·무역 관계는 4세기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4세기 가락국 지배자들의 무덤들이라고 봐야 할 김해 대성동 고분들에서는 파형동기가 부착된 방패를 비롯해 일본열도 기나이 지역 지배집단의 위신재 등이 발굴돼 주목을 끈다. 권력의 종교적 상징으로 보이는 파형동기 외에 석제 화살촉이라든가 연질토기인 하지키(土師器) 등 왜인 생산의 의례·실용 물품 등이 곳곳에서 보여 가락국과 왜인들이 거시적 의미에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루었다는 인상마저도 준다. 그 ‘복합체’ 형성의 중심축은 물론 왜국 각종 세력들의 지배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가야의 철이었다.
하지만 4세기에 접어들어 ‘가락국-왜 복합체’는 상당한 위기에 봉착했다. 가락국 등 가야 세력들이 왜인들에게 수출한 물건 가운데는 자체 생산한 철뿐만 아니라 중국 군현들이 생산한 선진 물품들도 있었는데, 313년에 낙랑군이 끝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자 이 중계무역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한편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이라는, 군소 남부 가야 세력의 가락국에 대한 도전(<삼국사기>에는 209년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4세기 초반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됨)에서 가락국을 구해준 신라가 4세기 전반부 내내 왜국의 여러 세력들과 적극적인 외교·교역을 전개해 가락국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그것보다도 더 위험한 도전자는 이미 동진(東晉) 등 남부 중국 왕조들과의 교역 루트를 확보해 가야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선진 문물들로 왜인들을 유혹할 수 있었던 백제였다. <삼국사기>는 백제와 왜국의 국교 수립을 397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는 이를 훨씬 더 일찍 일어난 일로 취급한다. 즉, 신공(神功)황후 46년(수정 연대는 366년)에 왜국 사신들이 탁순국(주로 창원으로 비정됨)에 도달하자 탁순의 왕인 말금(末錦) 한기(旱岐)가 2년 전에 백제 사신들이 와서 왜국에 가는 길을 물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사람을 보내 왜인 사절단을 백제에 안내했다는 게 <일본서기>의 백제-왜국 관계 수립에 대한 이야기의 골자다. 또 그 이야기에 따르면 백제 군주가 왜국 사신들에게 비단과 철정을 주면서 백제의 진기한 보물을 과시하는 등 교역을 적극적으로 이끌려 했다는 것이다.
» 가야의 기마병 모습. 1~4세기 가야 소국들은 가끔 백제의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주로 신라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왜병들이 그들의 지원세력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진 한겨레 자료
백제의 철정, 매우 사실적인 기록
각종 설화와 일본에서 보존된 백제의 고대 기록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가? 신라와 가락국을 동시에 적대시하는 남부 가야의 군소 세력 중 하나인 탁순국이 왜국·백제와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자는 취지에서 왜국 세력과 백제의 초기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상정할 수도 있다. 탁순 군주의 이름을 제대로 기록하지도 못하고 ‘추장’이라는 뜻의 두 위호인 ‘말금’(매금·임금)과 ‘한기’만을 적었을 뿐인 <일본서기>는 기록면에서는 부실하지만, 어떤 현실을 꼭 반영하는 듯하다. 더군다나 근초고왕(재위 346~375)으로 추정되는 백제의 왕이 왜국 사신에게 철 소재인 철정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적인 기록이다. 철의 공급자로서 가락국이 아닌 백제를 상대해달라는 요청이었을 것이다. 즉, <일본서기> 기록의 설화적·이데올로기적 껍질을 잘 벗기기만 하면 그 안에 숨겨진 ‘알맹이’는 고대 한반도 역사를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백제가 철과 비단으로 왜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왜군은 국교 수립 3년 뒤에 비자발(창녕)부터 남가라(가락국)까지, 안라(함안의 아라가야)나 다라(합천)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가야 지역(‘가야 7국’)을 ‘평정’하고, 이후 전라남북도 일대, 침미다례(해남 내지 제주도)까지 ‘정복’했다는 것이다. 백제 계통의 사료를 근거로 하는 지명 표기 등을 보면 완전히 ‘창작’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기사의 주체를 왜국이 아닌 백제로 보더라도 이미 360년대 말에 백제가 전라도 일대와 낙동강 유역을 다 공략했다는 것은 우리가 고고학적으로 아는 사실에 잘 부합되지 않는다. 전라도 지역만 해도 백제의 지배하에 완전히 들어간 것은 5세기 말이고, 문화적으로 ‘백제화’된 것은 대체로 6세기쯤의 일이다. 따라서 이 기사는 5~6세기에 일어난 일들을 소급해서 4세기 중반의 사건인 것처럼 기술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기사에서 건질 만한 ‘알맹이’는 백제가 가락국 등을 따돌리면서 왜인들과의 연맹관계를 줄기차게 모색했던 목적에 대한 이야기다. 백제가 왜국에 철 등을 보내는 대가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열도 세력의 군사적 지원이었다. 왜인 부대들은 인접한 마한·가야의 소국들을 적당히 압박하는 데에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었고, 일차적으로 4세기 말 백제의 숙적인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백제의 승리를 보장해주리란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인들의 지원으로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보겠다는 백제 군주들의 구상은, 결국 광개토왕 시절(391~413) 한반도 남반부에서의 커다란 ‘국제 전쟁’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399년 가야 지역의 남부를 기지로 삼았던 듯한 왜인들이- 백제와의 ‘연합 전선’의 일부분으로-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 될 각오로 고구려 군대를 불렀다. 고구려 군대는 그 이듬해에 대대적 남정(南征)을 단행해 창원·김해 지역 등 한반도와 왜 사이의 ‘관문’인 가야 남부를 완전히 격파했다. 고구려 군사의 말굽이 김해 지역까지 밟은 400년의 역사적 사건은 한반도 정치·외교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된 패전국 백제가 그때부터 한 세기 넘게 중국 남부 및 왜국과의 관계 강화에 주력해 초기 일본 문화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우산’ 밑에 들어간 신라는 점차 대국으로 성장할 만한 안정적 국제 지위를 얻게 됐다. 한편 왜인들의 새로운 핵심 파트너인 백제와 고구려의 대리인인 신라 사이에 낀 김해 세력은 5세기에 들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가야의 새로운 중심으로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가 부상하게 됐는데, 이 두 나라와 왜인 사이의 관계를 다음 칼럼에서 <일본서기> 등 일본 자료를 중심으로 다루려 한다.
윤색됐으나 ‘단순 창작’은 아냐
‘임나일본부설’을 포함한 ‘황국사관’의 근거 자료가 된 <일본서기>에 대한 반감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한반도와 왜국 사이의 ‘관문’인 가야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사들은 많이 윤색됐을지언정 ‘단순 창작’은 전혀 아니다. 설화 등이 뒤섞이고 연대가 불확실하고 후대의 시각이 많이 개입돼 있어 엄격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가야 역사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자료임이 틀림없다. 이 자료를 제대로 해석하기만 하면 일본열도의 고대사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가야사의 진면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게 된다.
참고 문헌
1. <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엮음, 혜안, 2001, 131~451쪽
2. <한국 고대사 연구> 이병도, 박영사, 1976, 339~350쪽
3. <고대한일관계사> 연민수, 혜안, 27~61, 107~133, 163~269, 515~534쪽
4. <새로 쓰는 고대 한-일 교섭사> 박천수, 사회평론, 2007, 201~249쪽
5. ‘가야 출토 토사기계 토기의 의의’ <가야의 대외교섭>, 신경철, 김해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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