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181136501&code=96020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옛날 15살, 요즘 15살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 입력 : 2012-04-18 11:36:50ㅣ수정 : 2012-04-18 11:38:52
“15살 정도가 아닐까요.”
가야 및 신라시대 갑옷 20령을 분석한 연구자의 해석이 흥미롭다. 원사고고학(전쟁)이 전공인 송정식씨(울산발전연구원)의 연구결과이다. 그는 6월24일까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양동리, 가야를 보다’) 도록에 연구결과를 수록했다.
그가 조사한 갑옷은 이른바 종장판갑(縱長板甲), 즉 세로로 긴 철판을 구부려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서 만든 것이다. 그는 이 20령 갑옷을 최초로 제작했을 당시의 가슴둘레 평균을 구해보았다. 80.16㎝였다.
그런 다음 한국인의 신체조사결과(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1979년 자료)에 대입시켰다. 그 결과 갑옷의 평균 가슴둘레에 해당되는 나이는 15살(80.1㎝)이었다. 15살에 갑옷을 입었다?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닐까?
김해 양동리 가야고분에서 발견된 갑옷. 15살 무렵의 소년이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15살 가야 소년이 갑옷을 입은 까닭은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한가지가 있다. 즉 처음 갑옷을 입는다는 것을 통과의례의 하나인 성인식이 아니었을까.
성인식은 한마디로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인의 자격을 획득하는 의례를 뜻한다.
송정식씨는 통과의례 가운데서도 특정집단에 자원 가입할 때의 의식을 주목했다. 이것을 흔히 입사식(入社式)이라 한다.
“지금도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누얼족 소년들은 14~16살 때 이른바 입사식을 한답니다. 작은 칼로 얼굴과 귀 사이의 얼굴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냅니다. 이때의 고통을 참아야 함을 물론이구요. 케냐의 유목민 가운데는 12~16세 소년들이 백점토를 바르고 무기를 소지한 채 대략 2개월 동안 격리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할례의식이고….”
양동리에서 확인된 투구. |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후한서> ‘동이전·마한전’을 보면 수상한 대목이 나온다. “그 사람들은 장대하고 용감하다. 소년들도 성을 쌓고 집 짓는데 힘을 쓴다. 문득, 허리에 줄을 매어 큰 나무에 매달려 소리치며 강건함을 부르짖었다.(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鎚以大木 歡呼爲健)”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나라에 일이 생기거나 성곽을 쌓도록 시키면 용감하고 건강한 여러 소년들이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에 묶고 큰 나무를 붙들어 맨 뒤 종일 지껄이며 고함치면서 힘쓰는데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힘쓰기와 건강함을 권하는 것이다.(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삽之 通日歡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물론 ‘나라에 일이 있거나 성곽을 쌓을 때(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라는 제한적인 의미가 분명히 있다. 이를 두고 북한의 백남운(白南雲·1894~1979)은 1933년에 쓴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소년들의 등에 가죽을 꿰면서까지 강제노역을 시켰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삼한사회의 비참한 강제노역’으로 본 것이다.
■ 마한의 혹독한 성인식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성인식 혹은 입사식의 원형이 아니냐’고 보는 이들이 있다.
성인식은 육체적·정신적인 시련을 통해 성인의 자격을 인정받는 풍습이다. 이런 성인식의 표현이 바로 할례의식이다. 여자는 음핵제거, 남자는 포경수술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송곳니 발치, 문신 새기기, 콧구멍 뚫기, 귓구멍 내기, 피부에 상처내기 등이 있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면 남자는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여자는 여인의 취급을 받지 못해 혼인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따라서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
일본학자 미니자 아키히데(三品彰英)는 ‘등가죽에 긴 끈을 꿰어 온종일 환호하는’ 기이한 행위는 단순한 고역이 아니라고 했다. 바로 원시적인 성인식에서 볼 수 있는 고통과 시련의 할례의식이라는 것이다.
광주 신창동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대의 삼한시대 농경문 청동기. 따비(손잡이를 잡고 발판을 밟아 삽질하듯 땅을 일구는 농기구)가 그려져 있다. 마한의 소년들이 등가죽을 뚫어 줄에 매달아 가래(따비에서 발달된 농기구)로 땅을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나 <후한서>에서 보이는 목삽(木삽)은 긴 자루의 삽 형태를 갖춘 가래를 뜻한다. 3명이 한 조를 이뤄 가래의 양쪽 구멍에 끈을 묵어서 양쪽에서 잡아당기며 땅을 파는 농기구이다. 목삽은 소로 논밭을 가는 우경(牛耕)이 발달하기 전에 땅을 갈아엎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여기서 15살이라는 나이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찍이 공자는 15살을 ‘지학(志學)’, 즉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라고 했다. 인격의 수양과 완성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둘 나이라는 것이다.
■ 부역에, 전쟁에 끌려간 백제의 15살
여기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자.
“온조왕 41년(기원후 23)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했다.”
“진사왕 2년(386)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을 설치했다.”
“전지왕 13년(417) 동·북부의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다. 병관좌평 해구(解丘)가 공사를 감독했다.”
“동성왕 12년(490) 북부의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현성과 이산성 두 성을 쌓았다.”
“무령왕 323년(523) 한강 북쪽 백성 중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성인식에 나오는 내용에 ‘15세 이상’이라는 나이만 추가됐다. 아마도 ‘노동력의 기준나이=15세 이상’으로 규정한 온조대왕의 유훈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아마도 평시에는 국가 토목사업에 동원되고, 전쟁이 나면 곧바로 징발되는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삼국통일의 중추가 된 신라의 15살
신라의 화랑도 조직도 비슷했다. 최근 발견된 <화랑세기>를 보면 13~14살이 되면 낭도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15살에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사다함은 걸출한 화랑이었다. 사람들이 풍채가 미끈하고 뜻과 기개가 곧은 그를 화랑으로 받들었다. 1000명이 그의 밑에 들었다. 561년 진흥왕이 가야를 정벌하려 하자 사다함은 출전하겠다고 나섰다. 임금이 ‘너무 나이가 어리다’고 불허했지만, 사다함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다.
결국 예하 장수가 되어 출전한 사다함은 기습작전의 선봉을 자처했다. 사다함의 전공으로 가야는 마침내 멸망했다. 진흥왕이 가야 정복의 1등공신이 된 사다함에게 가야 노예 300명과 전지(田地)를 하사했다. 하지만 사다함은 가야 노예들을 모두 풀어주고 논밭과 토지도 사양했다. 왕이 “그래도 받아야 한다”고 강권하자 사다함은 조건을 달면서 받았다.
<사진5>경주 구정동 출토 종장판갑(갑옷)의 복원도./ 국립경주박물관
“그러시다면 알천(閼川· 경주시 북천)의 땅만 주옵소서.” 이곳은 아무 것도 심을 수 없는. 무엇에도 쓸모 없는 땅이었다. 이 모든 일이 15살에 있었단다.(<삼국사기> ‘열전·사다함전’) 사다함 뿐이 아니다. 삼한일통의 꿈을 이룬 김유신 역시 15살(609년)에 화랑이 됐다.
“김유신은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다. (김유신을 따르는 낭도집단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했다.”(<김유신전>)
17살 때 고구려·백제·말갈이 침략한 것을 보고는 분기탱천해서 중악(경주 단석산)의 석굴로 들어갔다. 그가 눈물로 나라를 구할 방도를 구하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감탄하면서 비법을 일러주었다.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장하구나. 함부로 쓰지 마라. 의롭지 못한 일에 쓰면 재앙을 받을 것이다.”
김유신은 1년 뒤인 18살 때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삼국유사> ‘김유신전’)
하기야 유명한 화랑 관창이 황산벌 전투에서 순국한 나이가 16살이었다. 계백 장군이 그를 붙잡아 투구를 벗긴 뒤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장탄식했다지 않는가.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구나! 소년이 이럴진대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야!”
어쨌든 관창의 순국에 크게 용기를 얻은 신라군이 맹진격하자 백제군은 대패했다. 백제는 최후의 회전인 황산벌 전투에서 패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사다함·관창·김유신…. 가야와 백제, 고구려를 멸하고 삼한일통을 이룬 주역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15살 무렵에 뜻을 세우고, 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했다. 그랬으니 신라 및 가야시대에는 15세 무렵에 갑옷을 입었을 것이라는 송정식씨의 연구를 허투루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15살
그런데 말이 15살이지 옛 사람들이 말하는 15살은 지금의 만 나이로 치면 14살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 2학년이다.
중학생이라. 지금 밤늦게까지 학교다 학원이다 해서 뺑뺑이를 돌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오는…. 그리고 요즘 문제가 된 학교폭력의 주된 연령대라는…. 볼수록 애처롭기까지 하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저 공부에만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저들을…. 심지어는 학업스트레스에, 집단따돌림에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그래도 마한·백제·신라의 15세 소년들에 비해서는 나은 처지가 아닐까.
등가죽을 뚫어 줄을 매고는 하루종일 노동을 해야 했던, 그래야 성인의 자격을 얻었던 마한의 소년들은 어떤가. 또 나라에 대규모 토목공사가 있거나 전쟁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끌려가 일해야 했던 백제의 소년들은 어떻고…. 게다가 어깨에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채 전장으로 전장으로 나서 목숨을 바쳤던 신라의 화랑들은 또…. 이 ‘선조들의 15세’를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참 그러고 보니 또 “옛날 사람들은 이랬는 데 너희는 뭐냐”는 식의 ‘옛날엔~타령’이 됐나. 하기야 필자도 요즘 둘째딸에게 ‘이러고 있다.’
“아빠는 옛날에 아침저녁으로 매일 2시간씩 통학하고 다녔어. 그래도 불평 한마디 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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