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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 서남해안 포구들은 중국과 가야, 일본이 해상교류 활동을 하는데 있어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낙랑 대방 ↔ 가야 일본 해상교역 중간 포구
백포만에서 시작된 서남해안 고대해상교역로를 가다 3.
노영수, 박영자 기자 | 5536@hnews.co.kr 승인 2008.10.24 13:32:42
경남 사천 늑도 패총지에서는 송지 군곡리와 같은 동일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돼 철기시대 서남해안 포구들이 해상을 통해 활발한 대외 교류 활동을 했음을 알게 해 준다.
고대사회 서남해안 포구들은 중국과 가야, 일본이 해상교류 활동을 하는데 있어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서남해안은 철기시대
대외 교류 중간 기착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주 교통로는 해상로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해상교통보다는 육지를 선호하는 정책을 펴게 되면서 해로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항구들은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남 화산·현산 일대에 있었던 백포만 항구였다.
백포만 항구는 철기시대 중국과 가야, 일본과 활발한 교류활동을 시작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중국 송나라와 관무역 및 사무역을 담당하는 중간 기착지 항구였다.
고려시대까지 국제 해상교역로 역할을 했던 백포만이 가장 활발한 대외 교류를 펼쳤던 시기는 철기시대였다. 이 시기 서남해안 여러 바닷가에도 해상세력들이 활동하며 활발한 대외 교류를 펼치고 있었다.
이 때 활동했던 각 나라들을 보면 평양지역에는 낙랑과 대방이 자리하고 있었고 호남과 충청 지역에는 마한이, 경상 지역에는 가야가 위치해 있었다. 이때 일본은 중국과 가야, 마한의 선진 문명을 활발히 받아들이며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야요이 시대였다.
이들은 해상교역을 통해 서로 간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은 중국의 선진문화를 마한과 가야지역, 일본 등에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또한 철 생산의 중심지였던 가야지역은 철을 매개로 낙랑과 마한, 일본 등지와 활발한 해상교역을 전개했다. 이들의 해상교역 가운데에 끼어있던 곳이 바로 해남 백포만을 포함한 고흥, 여수, 거제도, 남해, 사천 등 서남해안 포구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 이와 관련된 해상 교역로가 기록돼 있다. 삼국지에는 낙랑과 대방군이 왜로 이르기 위해 서해안-한국-남해안-구야한국-대마도-왜로 통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한국이란 지명은 충청도 일대인 아산만 일대로 보고 구야한국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김해지역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따라서 낙랑과 대방은 서남해안의 복잡한 해로를 거쳐 가야와 일본으로 갔고 반대로 일본과 가야도 이 경로를 통해 낙랑과 교류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중국의 화폐인 화천과 오수전이다. 이들 화폐들은 해남 송지 군곡리를 비롯해 거문도, 경남 사천 늑도, 마산 성산, 김해 회현리 그리고 제주도에서도 수습되고 있어 이들 상호간에 바다를 통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특히 경남 사천지역의 늑도 패총지는 고대 해상교통로에서 송지 군곡리 만큼 주목되는 곳이다.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늑도 패총지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에 해당되는 유물 1만3000여점이 수습되는데 낙랑계 토기와 중국 한대에 주조된 반양전과 거울, 일본 야요이 중기 문화와 관련된 토기들이 발견된다.
특히 김해 삼천포 늑도 패총지에서 출토된 단면삼각형 구연토기와 토기뚜껑, 고배, 조개팔치, 골각기 등의 유물은 송지 군곡리에서도 출토되었다.
철기시대 서남해안의 해상 네트워크의 실체는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 고분군에서도 확인된다. 이곳 고분군은 소가야의 당시 정치 지도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신라 백제를 비롯해 일본과 가야지역의 다양한 유물들이 수습된 바 있다.
또한 순천시 서면 운평리 유적에서도 대가야시대 유물이 다수 출토된다. 이곳 고분 발굴을 맡았던 순천대 발굴팀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이전에 순천지역은 대가야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음을 확인시켜준 예라고 밝혔다.
가야계 토기는 중국의 화폐와 함께 서남해안 여러 포구도시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서남해안을 끼고 있는 고흥, 여수, 순천, 거제, 통영, 사천, 남해, 고성 등 여러 포구들이 낙랑과 일본, 가야와 대외활동을 전개했고 낙랑과 일본, 가야 해상세력들이 이곳 포구들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했음을 추정케 한다.
또한 해남 백포만을 비롯한 서남해안에 위치한 포구들이 국제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것은 가야를 비롯해 일본과의 근접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가야와 일본과의 근접성 때문에 중국과 일본, 가야는 서남해안의 복잡한 포구들을 거쳐 가며 교역을 했던 것이다.
특히 해안선이 매우 복잡해 곳곳에 해상포구가 잘 발달된 거제지역만 보더라도 일본과 교류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거제시는 대마도와 약 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고대사회 국제항의 거점 역할을 했던 서남해안은 그 해로상의 위치 때문에 숱한 왜침과 함께 임진왜란 때 주요 해전의 장소로 떠오르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최초 거북선을 이용했던 사천전투와 한산도 및 노량해전, 명량해전 등이 모두 이 해로상에서 치러졌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던 만큼 일본은 철기시대 국제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던 서남해안의 여러 포구들을 거쳐 가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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