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75726
'한글창제' 세종, 왜 겉과 속이 달랐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여덟 번째 이야기(최종)
11.12.27 11:12 l 최종 업데이트 11.12.27 11:17 l 김종성(qqqkim2000)
▲ <뿌리깊은 나무> 세종 '이도' 한석규 ⓒ SBS
조선 전기는 좀 특이한 시대다. 이 시기의 조선은 명나라를 세계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한편,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미니 세계'를 열렬히 추구했다. 명나라의 패권을 존중하면서도, 조선의 패권에 승복할 세력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때는 제4대 세종 재위기였다. 한글 창제나 과학기술 개발 때문에, 세종은 지적이고 학술적인 군주로만 비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는 '강력한 조선'의 건설을 위해 대외팽창에도 열정과 관심을 기울인 군주였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한석규 분)은 툭하면 "지랄하고 있네!"란 말을 연발했다. 실제 세종은 명나라를 상대로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을지 모른다. 겉으로는 명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명나라, 지랄하고 있네!'라며 수도 없이 비웃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세종의 속마음까지 알 수 있냐고?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세종이 실제로 명나라의 패권에 배치되는 외교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패권을 존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조선 중심의 세계질서를 열심히 꿈꾸었다. 그리고 꿈은 이루어졌다.
세종 때 가장 강력했던 '조선 중심 미니 세계'
우리는 세종이 최윤덕·김종서를 통해 여진족을 압박해서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에 4군·6진을 설치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그가 이종무를 파견해서 대마도를 정벌한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세종은 강온 양면의 전략을 함께 구사했지만, 조선시대에 세종처럼 강력하게 팽창정책을 추진한 임금은 없었다.
세종의 팽창정책은 단순히 여진족과 왜구의 준동을 억제하는 효과만 산출한 게 아니다. 그것은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 중심의 미니 세계'를 공고히 하는 결과도 함께 가져왔다. 이런 미니 세계는 세종 이전과 이후에도 있었지만, 세종 때에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을 조선 중심의 미니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은, 여진족과 대마도가 조선의 패권을 인정하고 조선을 종주국으로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사대관계가 존재했듯이, 조선과 여진족·대마도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존재했다.
▲ 중국 북경시 중화민족원의 여진족(만주족·만족) 코너. 중화민족원은 소수민족 박물관이다. 중화민족원 건너편에 올림픽경기장이 있다. ⓒ 김종성
명나라 초기의 관찬 지리서인 <대명일통지>에 따르면,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체결한 184개의 여진족 정치집단 중에서 79개는 조선과도 똑같은 관계를 체결했다. 한편, 조선 개국공신 이지란의 아들인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처럼, 명나라를 따돌리고 조선만 종주국으로 떠받드는 여진족 지도자들도 적지 않았다.
1869년 일본에 편입되기 이전의 대마도는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그 이전의 대마도는 조선·일본 양국을 종주국으로 떠받드는 가운데 정치적 자주성을 유지했다. 대마도 통치자는 조선 주상에 의해 대마도주(對馬島主)에 책봉되는 동시에, 일본 막부 쇼군(군사정권 지도자)에 의해 슈고(지방장관) 혹은 다이묘(제후)에 책봉됐다.
여진족이 조선·명나라 양쪽을 종주국으로 받들고 대마도가 조선·일본 양쪽을 종주국으로 받든 것을 역사학 용어로 양속(兩屬)이라 부른다. 양쪽을 상대로 동시에 속국의 예를 행했다는 의미다.
조선-명나라 모두 떠받들어야 했던 여진족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사례는 세계사에서 비일비재하게 발견된다. 1874년 이전의 오키나와는 청나라와 일본을 동시에 종주국으로 받들었다. 고구려도 중국 남북조 시대에 남조(남중국 왕조)와 북조(북중국 왕조)로부터 동시에 책봉을 받은 적이 있다. '고구려의 등거리 외교'라는 것은 그런 양속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17세기 이전의 네덜란드는 한때는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오스트리아+α)과 부르고뉴 공국(지금의 프랑스 동부)을 동시에 종주국으로 떠받들었고 한때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동시에 종주국으로 떠받들었다. 또 지금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었던 사보이 공국 역시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종주국으로 떠받들었다.
갑(종주국)과 을(속국)의 사대관계는 두 당사국 사이에서만 유효했다. 그래서 '을'은 '갑'의 또 다른 속국인 '병'을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소국인 병이 갑과 을 사이에 끼어 있을 경우, 병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양속뿐이었다. 갑이 을보다 강할지라도, 병의 입장에서는 갑·을 모두 자국보다 강하므로 양쪽을 똑같이 종주국으로 받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과 대마도도 마찬가지였다. 여진족 입장에서는 명나라와 조선의 국력 차이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명나라와 조선 모두 자기들보다 더 강했으므로 양국을 동시에 떠받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마도 역시 그러했다.
명나라가 조선을 끊임없이 의심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국을 종주국으로 떠받들면서도 여진족과 대마도를 상대로 끊임없이 영향력을 팽창하는 조선을 바라보면서, 명나라는 의혹과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명나라가 보기에 조선은 '불량한 속국'이었다.
'명나라 천하' 속에서 '조선 천하'를 꿈꾼 세종
▲ 대마도 최북단에 있는 한국전망대. 맑은 날에는 육안으로도 부산항이 보인다. ⓒ 김종성
명나라의 의심을 받으면서도 조선이 여진족과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데는 세종의 강력한 팽창정책이 큰 몫을 했다. 만약 세종 같은 군주가 계속 나타나서 여진족과 대마도를 끊임없이 단속했다면, 조선 후기에 벌어졌던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벌어졌던 일'이란 것은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워 조선을 도리어 속국으로 만든 일과 대마도가 일본 쪽으로 계속 기울다가 1869년에 일본에 편입된 일을 가리킨다. 세종 같은 군주가 후대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여진족과 대마도가 계속해서 조선과 멀어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 여진족을 침공한 군주들은 계속 나왔지만, 세종처럼 여진족과 대마도를 동시에 압박한 군주는 드물었다. 이런 공격적 대외전략이 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 개발, 민생안정 사업 등과 더불어 동시에 진행되었으니, 세종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22명이나 되는 자녀들까지 낳았으니, 그는 여러 가지로 참 부지런하고 대단한 군주였다.
'명나라 천하' 속에서 '조선 천하'를 꿈꾼 세종의 대외전략은, 오늘날 '미국 천하' 속에서 '중화 천하'를 꿈꾸는 중국의 대외전략을 연상케 한다. 중국의 대외전략은 팍스 아메리카나 속에서 팍스 시니카의 영역을 '야금야금' 확장시키는 것이다.
'틈새외교'에 공들이고 있는 중국
오늘날 중국은 미국의 파워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아프리카·중앙아시아·동남아시아 등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은 이런 지역들에 돈도 많이 투자한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취약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봉쇄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을 상대로 중국이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것 역시 그들이 틈새외교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 보여준다. 중국은 겉으로는 미국의 세계패권을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지랄하고 있네!'라며 자국의 영향력을 끊임없이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세종 역시 그러했다. 세종은 겉으로는 명나라의 팍스 시니카를 인정하면서도, 명나라의 영향력이 취약한 여진족·대마도를 상대로 끊임없이 '팍스 코리아나'를 추구했다. <뿌리 깊은 나무> 속의 세종은 사대부들을 두고 "지랄하고 있네!"라고 중얼거렸지만, 실제의 세종은 명나라를 상대로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수없이 외쳤을 것이다.
비록 국력의 한계 때문에 명나라를 상대로 대놓고 욕설을 퍼붓지는 못했지만, 세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강력한 조선'을 추구했다. 그런 자주적 정신이 있었기에, 한자에 맞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자 그렇게 열성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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