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Ⅴ.백제의 성장과 교통로 - 3.광활한 동남아시아 海路의 개척"을 가져왔습니다.

광활한 동남아시아 海路의 개척
이도학 1997년 
 
백제가 자리잡은 한반도의 서남해안 일대는 굴곡이 매우 많은 까닭에 육상교통은 불편한 반면 도처에 항만(港灣)이 발달하여 이른 시기부터 해상교통은 편리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을 이용하여 마한제국(馬韓諸國)은 중국대륙과 활발하게 교섭을 전개하였다. 마한제국의 일원인 백제의 왕성인 서울의 몽촌토성에는 서진(西晋)의 전문도기편(錢文陶器片)이, 서울의 석촌동 고분에서는 동진(東晋)의 청자(靑磁)와 배젓는 노(櫓)가, 그리고 풍납동토성에서는 동진의 초두(鐎斗)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백제 영역이었던 강원도 원주와 충청남도 천안 등지에서도 중국제 자기와 초두가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물품들은 백제의 해상활동 능력을 반영해주고 있는데, 일본열도로의 진출은 사족을 불허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26)

백제는 남중국에도 거점을 확보하였는데, 송서(宋書) 백제조(百濟條)의 진평군(晋平郡)과 백제군(百濟郡) 가운데 전자는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복주시(福州市) 혹은 광서장족자치구내(廣西壯族自治區內)로, 후자 또한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로 비정되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절에는 강한 병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하였다”라고 한 구절과, '신․구당서'에서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越州) 즉,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 부근이라 한 것은 까닭 있음을 알겠다.

백제는 한반도의 서남해안→요동반도→발해만→산동반도→남경으로 이어지는 항로를 이용하였으나, 항해상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지만 남양만에서 산동반도로 직항(直航)하거나 혹은 흑산반도를 거쳐 강회(江淮) 지방으로 가는 항로도 개척하였다. 그 밖에 백제는 오키나와를 기항지로 하여 인도지나반도와 인도에 이르기까지 항로를 확대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미륵불광사사적기'에 의하면 성왕대의 백제 승려인 겸익(謙益)은 항로를 이용하여 중인도(中印度)에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흠명 4년(543)조에 의하면 인도지나 남부의 메콩강 하류 지역에 있던 지금의 캄보디아인 부남(扶南)과 교역한 기사가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54년에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 양모(羊毛)를 주성분으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서 북인도 지방에서 산출되는 탑등(Taptan)의 존재가 보이는 점에서도 입증이 된다. 이 무렵 백제의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교역루트는, 제주도→북큐슈→오키나와→대만→필리핀 군도→인도지나 반도→인도에 이르는 선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는 발달한 항해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하겠다.

때문에 백제는 독점적인 동남아시아 교역으로써 대외(對倭) 관계의 정치적 주도권까지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백제는 왜와의 독자적 교섭을 시도한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인 곤륜(昆崙)의 사신을 바다에 밀어 넣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6세기 중반 백제 문화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자료에 잘 응결되어 있다. 즉, 일본 나라시(奈良市)에 소재한 백제적인 요소가 강한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의 부장품 가운데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그것이다.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 지역과 연결되는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 주는 물증이기 때문이다. 백제에는 “신라․고구려․왜인들 뿐 아니라 중국인까지 거주하고 있다”는 '수당(隋書)' 백제 조의 기록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준다.127)

부체제(部體制) 단계의 백제는 남쪽 영역이 금강선이었다. 이 단계에서 백제의 교통로는 원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영서산간로(嶺西山間路)와, 천안을 분기점으로 하여 온양과 장항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와, 천안에서 청주와 대전 방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 천안시와 원주시에서 동진제(東晋製) 청자(靑磁)와 초두(鐎斗)가 출토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들 지역은 백제가 호남과 영서 방면으로 진출하는 요로(要路)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지역적 비중을 헤아린 결과 이들 호족에게 사여(賜與)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128)


주석

126)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일지사, 1995) pp.178~182
127)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p.11~12;'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1996) pp.41~52.
128)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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