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0607030303888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백제시대 최고급 옻칠 갑옷, 왜 저수지 한가운데 묻혔을까
입력 2017.06.07. 03:03
<34> 공주 공산성 발굴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산정 앞에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이 위원이 손으로 가리키는 공북루 안쪽 공터가 백제시대 건물터가 발굴된 성안마을이다. 공주=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발아래 금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백제 700년 역사는 온데간데없었다.
지난달 31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꼭대기 정자(亭子)에 오르자, 공북루(拱北樓)로 뻗어 내린 성벽 옆으로 금강이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서기 660년 이곳에서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벌인 의자왕도 저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까…. 475년 한성(현 서울)에서 천도한 이후 64년 동안 백제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은 백제 부활과 멸망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공북루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최근 발굴을 마친 공터가 보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민가 7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성안마을’이다. 여기서 백제시대 건물 터를 비롯해 ‘옻칠 갑옷’ 등 각종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단은 당초 견해를 바꿔 백제 왕궁 정전(正殿) 터가 성안마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발굴단장)와 함께 오랫동안 공산성 발굴에 참여한 이훈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스승을 회고했다. “사람이 세상 떠날 때를 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30년 넘게 공산성 발굴에 매달린 분답게 마지막 9차 발굴까지 모두 마친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 당나라 연호 적힌 옻칠 갑옷 출토
‘○○行貞觀十九年四月卄一日’(○○행 정관 19년 4월 21일)이라는 명문이 적힌 백제시대 ‘옻칠 갑옷’.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발견됐다.
“아 행정관(行貞觀) 명문이다!”
2011년 10월 중순 성안마을 내 저수지 발굴현장. 지표로부터 6.5m 깊이 바닥에 깔린 풀을 대나무 칼로 조심스레 떼어내던 이현숙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행여나 유물을 밟을까 오랜 시간 쪼그린 자세로 까치발을 한 탓에 그의 탄성엔 고통이 배어 있었다. 햇볕에 노출된 직후 감청색 빛깔을 드러낸 옻칠 갑옷 조각 위로 빨간색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행정관’ 뒤로 ‘十九年四月卄一日’(19년 4월 21일) 글자도 있었다. 행정관이 무슨 뜻인가.
전화로 보고를 받은 이남석이 급하게 현장으로 뛰어왔다. 명문을 유심히 들여다본 스승이 제자를 슬쩍 나무랐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정관(貞觀)으로 읽어야지. 당나라 연호 아닌가.” 백제시대 유물에서 당나라 연호가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정관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 태종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서기 645년(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에서 연대가 적힌 명문은 역사 해석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핵심 자료다.
명문도 명문이지만 옻칠 갑옷 발굴도 대단한 성과였다. 가죽에 10여 차례 이상 옻을 덧바르는 갑옷은 삼국시대 최고 사치품으로 통한다. 더구나 옻칠 갑옷과 함께 쇠 갑옷, 마갑(馬甲), 대도(大刀), 장식칼 등 기마병의 화려한 말갖춤이 한 세트로 묻혀 있었다. 백제시대 공산성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1급 유물들이다.
주변 발굴을 끝낸 직후 발굴단은 갑옷 발견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게 됐다. 이현숙의 기억. “성안마을 주민들이 저수지에만 우물 5개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 중 관정(管井) 하나가 옻칠 갑옷과 불과 20cm 떨어진 곳에 설치됐더라고요. 조금만 옆쪽으로 뚫고 지나갔다면 갑옷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 누가 왜 최고급 갑옷을 저수지에 묻었나
옻칠 갑옷과 함께 공산성 성안마을 안 저수지에서 발견된 ‘쇠 갑옷’. 공주대박물관 제공
고고 유물은 발굴 못지않게 해석이 중요하다. 관련 역사 기록과 연관성은 기본이고 때론 문헌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옻칠 갑옷 등이 불탄 기와와 화살촉이 가득한 지층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말 탄 기병을 연상시키듯 갑옷, 무기, 마갑 순으로 유물들이 층위를 이루며, 물건을 감추듯 1m 두께의 풀을 갑옷 위에 덮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긴급 상황에서 옻칠 갑옷 등을 저수지 한가운데 놓았다는 얘기인데 왜 그랬는지가 미스터리다.
이를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된다. 우선 “백제는 간지(干支)를 사용했다”는 중국 역사서 한원(翰苑) 기록을 토대로 당나라 연호가 적힌 옻칠 갑옷은 중국에서 만든 거라는 견해가 있다. 당군이 웅진도독부에서 철수하면서 버린 갑옷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에 중국 연호가 새겨진 사실이 있으므로 백제가 외교용으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 “645년 5월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했을 때 백제가 금색 칠을 한 갑옷과 검은 쇠로 무늬를 놓은 갑옷을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옻칠 갑옷에 적힌 645년 4월과 시기도 비슷하다. 발굴단의 해석을 이현숙이 정리했다.
“백제가 당나라에 외교용으로 갑옷을 보내면서 국가기록물 차원에서 추가로 제작한 게 출토품인 걸로 보입니다. 당나라와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갑옷을 저수지 아래 묻으며 승전을 기원한 의례를 올린 게 아닐까요.”
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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