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운동 종말 신라 삼국통일에 ‘한발짝’
<100>백강전투
2014.03.26 16:30 입력

백제에 주둔한 왜 대군은 식량이 문제였다. 그해 봄 신라군이 백제 남부의 4개 주에 불을 지르고 워낙 싹쓸이해 가는 바람에 백제 해안 지역에서는 도무지 먹을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전한다. “(633) 봄 2월 신라인이 백제 남부(南畔)의 4개 주(州)를 불태우고(燒燔) 아울러 안덕(安德)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몹시 건조한 봄에 이뤄진 신라의 대규모 방화는 계산된 것이었다
 
나당연합군 백강서 4전4승 왜군 격멸… 
한반도서 축출 백제 부흥운동군 거점인 주류성도 신라군에 함락

변산반도 적벽강에서 바라본 고군산군도. 백강의 위치가 금강 또는 동진강 어디라고 해도 여러 섬이 가로막아 항만을 이루고 있는 고군산군도는 왜의 수군이 백강전투 당시 중간 정박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필자제공


일본의 고대 갑옷인 단코.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왜의 병참선

병참선을 확보하기 위해 왜군은 현 후쿠오카에서 대마도를 거쳐 닿는 신라 해안의 사비(沙鼻) 지역과 기노강(岐奴江) 두 개의 주요 항만을 차지하고 그곳의 요새를 증축했다. 방어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켰으며, 백제 서남해안 지역의 만(灣)을 낀 호예성과 침복기성(枕服岐城) 등에도 배가 접안하고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놓아야 했다. 이보다 후대인 임진왜란 때도 왜군은 남해에서 서해로 향하는 병참선을 확보하기 위해 이순신과 싸웠다. 

662년 겨울 12월 백제의 수뇌부는 식량문제를 염두에 두고 산악지역인 주류성을 떠나 들이 넓은 김제의 피성(避城)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듬해 봄 신라군이 피성과 가까운 안덕을 점령하는 바람에 다시 주류성으로 물러났다. 그곳은 도저히 식량을 생산할 수 없는 산악이었다. 본국에서 식량을 배로 실어 와야 했던 왜군들은 식량운반선들로 이뤄진 소함대를 꾸려야 했다. 전력 분산이 불가피했고, 작전을 위한 전력을 집중시키는 데 시간이 소비됐다. 그 와중에 왜는 때를 놓쳤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주류성이 포위된 후에야 백강에 도착한 것이다.

663년 8월 13일 나당연합군은 주류성 앞에 도착해 압박을 가했다. 어린 시절 음모의 온상인 백제궁정에서 자란 풍장은 교활함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핑계를 대고 포위되기 이전에 성을 빠져나갔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전한다.

“지금 들으니 왜국의 구원 장군이 용사 1만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 여러 장군은 미리 도모함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스스로 백촌(白村)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접대하리라.” 

풍장은 기병을 이끌고 주류성을 나와 백촌으로 향했다. 그곳에 왜군의 선박이 일부 와 있었다. 풍장은 왜의 지휘함에 올랐다. 남은 그의 기병들이 언덕에서 선박을 호위했다. 그때 신라군 기병이 공격해 왔고 기병전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풍장은 배를 타고 빠져나갔다. 

백제 기병이 전멸당하는 광경은 나당연합군의 사기를 고조시켰고, 성 위에 있던 백제와 왜 연합군의 사기를 죽였다. 4일 후인 8월 17일 나당연합군의 육군이 주류성을 포위했고, 당 수군 170척이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으로 옮겨와 진을 쳤다. 신라 육군은 문무왕과 김유신 등이 통솔했고, 당 육군은 유인원과 손인사 등이 지휘했다. 전함과 식량운반선으로 구성된 당 수군은 유인궤와 부여륭이 이끌었다.

당 수군의 작전

당 수졸들은 산동반도 출신이었다. 그곳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로 뛰어난 선원의 배출지다. 660년 백제 멸망전쟁과 이듬해 평양 포위전을 수행한 수군들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한 그들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한반도 쪽의 바다에도 정통해 있었다. 왜 선원들은 대부분 얼치기였다. 세토내해의 바다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한반도 쪽은 몰랐다. 대마도 출신들은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바다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서해안은 무지했고, 백제 선원들의 도움 없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그 바다를 항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유능한 당 수군의 지휘관들은 먼저 백강 입구의 좁은 해협에서 전투할 계획을 세웠다. 나당육군에 포위돼 주류성에 갇힌 백제와 왜군의 목숨은 그 작전의 담보물이었다. 백강의 수로를 당군이 장악하고 있는 한 그 포위망을 풀 수가 없고, 그들은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좁은 해협에서 싸울 경우 함선이 무거워야 한다. 가볍고 날랜 함선에 허를 찔릴 염려가 없는 그곳에는 선박 아래에 무게가 나아가는 물질을 채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람만 불어준다면 금상첨화다. 가벼운 배는 흔들릴 것이지만 무거운 배는 그렇지 않다. 

663년 8월 27일 왜 수군이 나타났다. 선발대가 백강으로 들어와 당 수군을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탐색전이라 큰 피해는 보지 않은 것 같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7일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자와 대당의 수군과 대전했다.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 당 수군 함대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풍장과 왜 수뇌부는 ‘우려’를 공유하고 있었으리라. 문제는 시간이었다. 당군 전력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후퇴한다면 당장 주류성이 함락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백제부흥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당장 싸워야 했다. 당은 진형을 가다듬고, 싸우지 않을 때부터 적을 압박해 불리한 상황인 줄 알면서도 결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싸운다 해도 방어만 해 전력소모를 피하고 충분히 우위에 선 상태에서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강의 결전

‘일본서기’는 왜군 수뇌부의 결정을 이렇게 전한다. “일본의 여러 장군들과 백제의 왕이 ‘기상(氣象)’을 보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왜군의 중군(中軍) 400척이 당 수군이 버티고 있는 백강으로 기수를 돌렸다. 기록을 바탕으로 전투 장면을 그려보자. 왜군이 백강에 들어와 두 번에 걸쳐 싸웠다. 당군은 연승했다. 마지막 세 번째 싸움에서 당 수군의 가운데 대열이 뒤로 물러났다. 왜군 선단은 대오가 흩어진 상태로 전진했다. 물러나면서 만들어진 당 수군 대열 속으로 왜군의 선단이 들어왔다. 왜군이 포위된 장면을 ‘일본서기’는 “대당은 좌우에서 수군을 내어 협격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당이 기다리던 바람이 불어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는 기상변화 결과를 이렇게 전한다. “뱃머리(?)와 키(?)를 돌릴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묵직한 당 선단은 요지부동이었지만 왜의 배들은 크게 흔들렸다. 왜군은 발사도 힘들었고 적중력도 떨어졌다. 불화살을 쏘기도 힘들었다. 잘못하면 불통이 쓰러져 자신의 배가 화염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포위된 상태에서 배들이 몰려 있어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시야도 제한적이었다. 당군은 이와 정반대였다. 헝겊에 휘발성 물질을 적신 당군의 불화살이 왜 선단에 비처럼 쏟아졌다. ‘자치통감’은 결과를 이렇게 전한다. “왜병을 백강 입구에서 만나 4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00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빛냈고 바닷물도 모두 붉게 됐다.” 

663년 9월 7일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다. ‘일본서기’는 백제인들의 탄식을 이렇게 전한다. “국인(國人)들이 서로 말했다. 주유(주류성을 의미)가 항복했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백제는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한중일 삼국 동아시아 세계의 원형의 틀이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다. 백제 통합의 중요 걸림돌인 왜가 한반도에서 밀려났고, 신라는 삼국통일에 한 걸음 다가섰다.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의 권고로 왜국은 국호를 일본으로 바꿨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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