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8p1FYw

唐軍 배 2000척 13만 병력에 백제군 혼비백산
<93>당군의 침략 개시
2014.02.05  17:42 입력

당 660년 7월 9일 금강하구 대규모 병력 상륙 감행 
버드나무 가지로 짠 카펫이 갯벌지대 극복의 비밀병기


서천 쪽 금강 방조제에서 바라본 금강철새조망대 주변 모습. 건너편이 소정방이 상륙한 지점으로 추정되고, 그 뒤에 바위산과 오성산이 보인다. 필자제공.

660년 7월 9일 D-day, 황산벌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그 시점에 병력 13만을 실은 당의 함대가 금강하구에 나타났다. 약 2000척에 달하는 함대의 장대한 행렬이었다. 역사상 그렇게 많은 배와 병력이 한꺼번에 상륙을 감행한 사례는 보기 힘들다. ‘구당서’ 소정방전은 상륙을 저지하려는 백제군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정방이 웅진강구에 이르니 적(백제군)이 강 입구를 막고 군사를 주둔하고 있었다.” 웅진강구는 지금의 금강하구다. 

신라군 기벌포 점령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상륙작전 감행을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7월 9일) 그날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 (신라왕자)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해 백제 군사를 맞아 싸워 크게 깨뜨렸다.” 한국 측 기록에서는 금강하구 전투가 기벌포에서 시작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신라의 수군 100척이 기벌포 상륙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벌포는 대규모 함대를 일차적으로 정박시킬 수 있는 지점이라 상륙이 필히 감행될 곳이었다. 그곳을 점령하지 않으면 당군의 함대는 언제 태풍이 몰아칠지도 모르는 여름 바다 위에 대기해야 했다. 

상륙군은 장항(기벌포)에 주둔한 백제 궁수들의 밥이 될 터였다. 기벌포의 포구(浦口)는 ‘질구지개’라고 한다. 진흙뻘 구덩이 땅이라는 의미다. 나당연합군이 상륙할 그 지점이 가장 위험했다. 사방이 탁 트인 그곳에는 엄폐물이 없다. 다리가 빠져 병사들의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적의 화살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게 된다. 

하지만 신라군이 이전에 준비한 비밀병기가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로 짠 상륙용 카펫이다. 현대에도 해병대 상륙에 합성수지 카펫이 사용된다고 한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이렇게 전한다. “장군 소정방과 김인문 등은 바다를 따라 기벌포로 들어갔는데, 해안이 진흙이어서 빠져 갈 수 없으므로 이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군사를 진군시켰다.”

기벌포 해안 뻘에 접안한 배들은 미리 준비한 버드나무 카펫을 깔았다. 이어 방패를 든 병사들이 그 위를 밟고 상륙을 감행했으리라. 이러한 형태의 상륙은 강 건너편 군산 쪽에서도 되풀이된 것으로 보인다. 기벌포의 백제군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당황했으리라. 나당연합군의 빠른 상륙 속도에 놀라 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던 것으로 보인다. 

소정방의 교두보 확보

신라 주도하에 장항 쪽 기벌포가 점령되자 당의 함대가 금강하구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당군은 강 건너 군산 쪽으로 상륙을 시도했다. ‘구당서’ 소정방전은 이렇게 전한다. “정방이 강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 산을 타고 진을 쳐서 크게 싸웠다.” 

여기서 ‘동쪽 언덕’은 당군의 첫 상륙지점에 대한 귀중한 암시를 주고 있다. 서쪽으로 물을 쏟아내는 금강하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방조제 가기 직전인 구암동 부근에서 강은 북쪽으로 비스듬하게 꺾인다. 방향으로 봤을 때 군산 쪽이 동안(東岸)이 된다. 소정방의 선발대가 상륙한 금강 동안의 언덕은 현 금강철새조망대 뒤에 위치한 바위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산’을 타고 올라가 진을 친 곳은 오성산(227m)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고 고지였다. 당군이 지속적으로 상륙하면서 병력이 증강됐고, 이어 오성산에 진을 치고 전략적 거점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당군은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을 조직직으로 방해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서포리에서 나포면 나포리 사이의 긴 강안지대에 당군의 대규모 상륙이 개시된 것으로 여겨진다. ‘구당서’ 소정방전은 이렇게 전한다. “(당군이 산에 진을 치고) 크게 싸우니 바다를 덮은 (배들이) 돛을 펴 서로 이어나가 (상륙을 감행해서 백제) 적군이 패배해 전사한 자가 수천이었고, 저절로 무너졌다.”
  
당군 13만의 성공적 상륙

진지를 구축한 소정방의 군대가 백제군을 공격해 수천 명을 살상했고, 새로 상륙한 당나라 군대가 여기에 합세하면서 백제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군 선발대의 성공적인 상륙이 이뤄진 후 만조가 되자 하구 기벌포에 정박했던 함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 강을 따라 올라갔고, 당나라 본대의 상륙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오성산의 소정방 군대는 전진해 망해산(望海山)에서 함라산으로 이어지는 강안을 따라 늘어선 언덕을 장악해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당서’ 소정방전은 이렇게 전한다. “조수를 만나 또 위로 나가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으로 들어가 정방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수륙으로 동시에 나아갔다. ”

수륙병진은 상륙한 군대가 강을 따라 전진해 가면서 따라오던 배들이 차례로 강안에 접안을 하고 병사들이 계속 배에서 내렸으리라. 약 2000척의 배에서 13만에 달하는 병력을 하역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시간이 걸리며, 상상을 초월하는 긴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금강하구 방조제 부근에서 성당면 제성리 부근까지의 광활한 강안이 당나라 군대로 찼던 것으로 상상된다. ‘신당서’ 소정방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수를 만나 또 위로 나아가니 배가 꼬리를 물고 북을 치고 소리를 치며 나아갔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갔다.” 그들이 도착할 1차 목적지는 논산 강경 부근이었다. 그곳에서 황산벌 방면에서 도착할 김유신의 신라 5만 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교수>

 
※ 탄현과 침현… 서로 다른 고개일 수도
 
660년 6월 말께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이뤄진 백제 어전회의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일부 남아 있다. 탄현에 대한 백제 대신들의 묘사도 있다.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으로 올라오게 해 좁은 길을 따라 말을 가지런히 할 수 없게 함과 같지 못합니다. 이때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록은 현 옥천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는 마도령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금산에서 운주면 숫고개를 거쳐 논산으로 넘어가는 긴 계곡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곳을 지나면 연산면 신양리가 나온다. 그 부근에 나제 양군의 피와 땀이 범벅이 돼 흘렀다고 하는 벌곡면의 한삼천(汗三川), 신라군이 지나갔다고 하는 산직리의 나리치(移峙), 적을 맞아 승리했다고 하는 산직리 승적골(勝敵谷) 등의 지명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신라군이 탄현을 쉽게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흥수의 지적대로 한 명의 병사가 한 자루의 창으로 1만을 막을 수도 있는 그 길고 험한 계곡을 5만 대군이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어떻게 통과했다는 말인가?

‘삼국사기’를 저술할 당시 김부식은 신라군이 통과한 탄현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그는 그 텍스트 내에서 일관성을 갖기 위해 탄현이란 지명을 하나로 통일해 사용하려 했던 것 같다. 그 흔적은 백제본기에 보인다. 요충지 ‘탄현(炭峴)’을 언급하면서 “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김부식은 ‘침현’의 위치를 몰랐다. 그는 ‘삼국사기’ 지리지 위치 미상 지명에 ‘침현’을 포함시켰다. 백제본기를 보면 656년 백제장군 성충(成忠)은 ‘침현(沈峴)’을 막으라고 의자왕에게 탄원했고, 660년 흥수는 ‘탄현(炭峴)’을 막으라고 했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에 쫓겨 사비성을 빠져나오면서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여기서 탄현이 침현과 다른 고개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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