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GGA1FH

당나라, 서기 660년 3월 10일 백제 침공 결정
(왜사신) 당나라에 억류 조치
<89>전쟁의 서막
2013.12.25 14:49 입력

한반도 이해관계 많은 산동파 권력 장악 … 
개전 논의 가속화  전쟁 준비 정보유출 차단 위해 왜국사절


산서성 태원에 위치한 진사(晉寺)의 전경. 이곳에는 당태종의 비석이 남아 있다. 660년 당고종은 무후와 함께 아버지의 흔적이 있는 이곳을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제공

659년 4월 신라왕 김춘추는 당나라에 청병을 위한 사절을 보냈다. 차남 김인문이 이끄는 사절단은 다음 달 당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무작정 청병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당군이 백제 상륙에 필요한 현지 정보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지참하고 있었고, 그것은 일종의 전쟁기획제안서 같은 것이었으리라. 6월 초께 당의 산동 등주에 내린 그들은 역마를 타고 15일 만에 장안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병부 산하 정보부 역할을 하는 직방에서 신라의 사절이 갖고 온 자료들이 일단 접수됐을 것으로 보인다. 주로 상륙할 여러 후보 지역들의 조수간만의 차이와 지형 그리고 소요 시간과 식량의 양에 관한 정보였다. 어느 지점은 언제 물이 들어오고 나가며 그곳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어느 거점을 먼저 점령해야 하고, 개펄에 상륙하는 병사들이 다리가 빠지지 않기 위해 버드나무 카펫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 당군이 어느 정도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지와 그들을 먹이기 위해 당 측이 지참해야 할 식량과 신라 측이 보충해줄 수량이 적혀 있었으리라.

● 관롱파 숙청 

하지만 신라의 청병사절이 출발한 그 시기부터 측천무후와 그 일당은 내부 숙청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자치통감’은 그 시작을 이렇게 전한다. “현경 4년(659) 4월, 무황후는 태위인 장손무기가 무거운 하사품을 받았으나 자기를 돕지 않자 그를 깊이 원망하였다. 허경종은 누차 이해를 가지고 장손무기에게 유세하였으나 매번 면대하여 이를 끊어버리니 허경종도 원망하였다. 무황후가 이미 세워지고 나자 장손무기는 내심 스스로 편안해하지 아니하였는데 황후는 허경종으로 하여금 그 틈을 엿보다가 그를 모함하게 하였다.” 사건을 조작할 건수를 찾고 있던 허경종은 태자선마 이계방을 고문해 장손무기가 그와 함께 반란하기로 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외삼촌인 장손무기에게 눌려 지냈던 당고종은 직접 만나서 이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고, 조작된 사건이 흘러가는 대로 방치했다.

4월 22일 장손무기의 사천성 유배가 결정됐다. 그의 아들 조카들도 유배지로 떠났고, 현지 도착했을 때 수령들이 알아서 때려죽였다. 저수량 아들들도 베트남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시체로 변했다. 7월 27일 허경종은 사천에 사람을 보내 장손무기를 협박해 주막에서 스스로 목을 매게 했다. 두 치세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누린 재상, 전황후의 동생, 황제의 외숙부인 무기의 죽음은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의 죽음은 측천무후를 해하려는 자들에게 본보기가 됐다.

관롱군사집단의 거두 장손무기가 사라지고 산동파가 조정 내 결정의 대세를 움직일 수 있는 우위를 갖게 됐다. 청병을 위한 외교의 상대가 확실해졌다. 김인문은 활동을 본격화할 수 있었으리라. 산동파는 한반도와 만주에 이해관계가 많았다.
 
● 왜국사절 귀국 금지령

10월 중순 김인문은 낙양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백제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왜국의 사신을 목도했으리라.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의 서(書)를 보면 10월 29일 왜국의 사절단이 낙양에 들어왔고, 30일 당고종을 만났다. 11월 1일 황제가 주재하는 동지(冬至) 모임이 낙양에서 열렸고, 그 자리에 많은 나라에서 온 외국사절들이 모였다고 한다. 당과 함께 백제를 칠 연합군사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던 신라사절 입장에서 왜 사신들의 출현은 눈엣가시였다. 

그해 12월 3일 왜의 사절은 신라가 원하던 대로 출국금지명령을 받았다. 왜의 사신 이길련박덕의 다음 기록은 그때 신라와 당의 백제 침공이 어느 정도 결정된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국가(당)는 내년에 반드시 해동(백제)에 쳐들어갈 것이다. 그들 왜인들도 동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서경(장안)에 묶어두고 다른 곳에 유폐하였다.” 왜인들은 필시 귀국하는 길에 백제에 들러 당과 신라가 진행하고 있었던 백제침공전쟁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줄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당시 당 조정이 신라에 그 사안을 통보해 주지 않았다. 확실한 결정은 아직 미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659년)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 토번의 등장

‘돈황본토번역사문서’를 보면 659년 토번왕의 섭정이며 군부의 수장이기도 한 대론(大論) 가르통첸(綠東贊)이 8만 대군을 이끌고 현 청해성 부근인 토욕혼으로 진군해 와 있었다. 소정방과 토번군 사이의 접전이 있었다. 소정방이 오해(烏海)의 동대(東岱)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토번군에게 승리했다. 그래도 티벳고원의 강대국 토번의 등장은 당 조정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그것은 서돌궐 지역은 물론이고 토번과 인접한 타림분지 서남쪽 오아시스 국가들에 파장을 미쳤다. 

11월 21일 서돌궐의 사결(思結) 사근(俟斤) 도만(都曼)은 토번과 연결해 소륵(疏勒 : 카슈가르) 등 3나라의 병력을 이끌고 우전(于闐·호탄)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도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이었다. 실크로드 진출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토번이 그것으로 물러날 것이라고 보는 현지인들은 많지 않았다. 

660년 1월 소정방이 서돌궐의 도만을 포로로 잡아 낙양의 건양전(乾陽展)에 바쳤다. 법을 담당하던 부처인 법사(法司)가 도만을 처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소정방은 도만의 사면을 요청했고, 황제가 그것을 허락했다. ‘책부원구’ 장수부는 소정방이 그 길로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수행해 병주(幷州 : 서성태원)로 향했고, 그곳에서 웅진도대총관을 제수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국익에 우선한 파벌의 이해 

태원은 무후와 당고종 선친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무후의 아버지는 병주 문수현 출신으로 수양제가 낙양에 건립하는 궁정에 목재를 팔면서 큰 부자가 되고 수말 병주 태원의 유수였던 고종의 조부 이연과 인연을 갖게 된다. 태종대 무후가 장안 궁정에 궁녀로 들어온 것도 이러한 지연(地緣) 때문이었다. 3월 5일 금의환향한 그녀는 황명을 받아 고향의 친지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곳에서 당고종은 서역지역 사령관을 지내 현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소정방과 백제 침공 결정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으로 보인다. 토번 주력이 청해성에 등장해 토욕혼을 노리고 있었고, 타림분지 오아시스 국가들의 반란을 선동하는 등 서역에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3월 10일 백제 침공 결정이 내려졌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3월) 10일에 좌무위 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新丘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좌교위 장군 유백영 등을 인솔하고 수군과 육군 10만으로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김춘추를 우이도(?夷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신라의 무리를 거느리고 그와 세력을 합치게 하였다.” 

당고종을 주무르고 있는 무후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소정방은 자신이 속한 정치파벌의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책부원구’ 국사부는 소정방을 무후의 심복인 허경종의 수하로 기록하고 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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