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한 마디에 온 나라가 태극기 달기 ‘대소동’
10억 들여 9만장 제작, 인쇄 물량 달려 품귀 현상 빚기도… 군복에 '오버로크', 공무원 자녀들엔 인증샷 권고까지
입력 : 2015-04-08  09:16:27   노출 : 2015.04.08  17:40:32  이재진 이하늬 장슬기 기자 | jinpress@mediatoday.co.kr    

전북 고창에 사는 마을이장 A씨는 지난 2월 설명절 이후 ‘군수님 서한문’을 이장단으로부터 전달받았다. 서한문에는 “우리나라가 잃어버린 주권을 찾고,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 국민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태극기가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고창군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달아 아파트마다, 골목마다, 태극기의 물결이 넘치는 고창군을 만드는데 우리 이장님들 가정부터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개최된 ‘긴급’ 이장회의에서 “마을 가두 방송을 통해 3·1절 기념 및 태극기 달기를 독려하라”는 내용을 통보받았다. 

박근혜 정부의 '전 국민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  추진계획에 따라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태극기 관련 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1960~80년대를 연상케할 정도로 지자체가 관변단체들을 동원하는 모습이다. 애국 함양을 위한 캠페인이라고 하지만 자자체 예산이 편성되면서 국민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014 핵심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영화 국제 시장의 한 장면을 예로 들며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고"라고 말했다. 애국심이 있어야 나라가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 1월 박 대통령은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했고 2월 행정자치부는 태극기 달기 운동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 3월 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에서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전국 시군구 10억원 들여 태극기 사업

행정자치부는 "2015년은 광복 70년의 해,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여 통일로 나아가는 시기이다.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통해 국민 통합과 국민들의 애국심을 함양"하겠다며 전국 시군구와 공공기관 등에 태극기 홍보 계획 및 자료를 배포하고 지자체 예산을 집행하라고 하달했다. 이에 전국 시군구는 일제히 태극기 달기 운동 관련 예산을 편성하고 태극기 홍보 사업을 벌였다. 국방부는 60억 원을 들여 전 장병의 군복에 태극기를 부착하는 계획까지 추진 중이다. 

미디어오늘이 행정자치부를 포함해 전국 시군구 257곳에 정보공개를 청구한 결과 수만원에서부터 수천만원에 이르기까지 태극기 달기 운동 관련 예산을 집행한 것으로 나왔다.  

정보공개청구 결과 전국 시군구 257곳 중 비공개 결정 및 처리 중이거나 예산 내역을 밝히지 않은 곳을 제외하고 179곳에서 10억3448만7790원이 태극기 관련 사업 예산으로 집행됐다. 2015년 들어 태극기 제작 수량은 8만9249장으로 집계됐다. 

시군구 건물에 내건 대형 태극기, 태극기 달기운동 홍보용 어깨띠, 배지, 현수막, 피켓, 차량용 태극기, 태극기 꽂이, 홍보 팸플릿 등을 제작한 경우를 포함하면 태극기 관련 제작 수량은 수십만개에 달한 것으로 나온다. 

전국 시군구 중 태극기 관련 예산을 가장 많이 집행한 곳은 경남 창원시로 7300여만원을 썼다. 창원시는 도로변 태극기 게양 및 철거·보관 관리하는데 5600여만원을 용역업체에 의뢰해 집행했고 나머지는 홍보비용에 썼다. 

경남 창원시에 이어 경기도 수원시 5100여만원, 경북 영천시 4300여만원, 행자부 3200여만원, 강남구 2900여만원, 송파구 2300여만원, 전남 완도군 2300여만원, 경남 창녕군 1990여만원, 영등포구 1980여만원, 전남 해남군 1800여만원으로 나타났다.

전남 완도군의 경우 태극기 구입 비용으로 1600여만원, 캠페인 전개 및 기타 물품 비용으로 700여만원을 썼다. 완도군은 예산 집행 계획에 "태극기 달기 운동 대대적 추진에 따른 추경예산 확보요(要)"라고 적어 하반기 광복 70주년 사업에서도 태극기 관련 예산을 추가로 집행할 것을 예고했다. 완도군은 또한 물품 제작 비용으로 행사장 무대 제작 480여만원, 공동주택 보급용 태극기 구입 배부에 500만원 등을 쓰겠다고 밝혔다. 경남 통영시는 광복 70주년 태극기 관련 예산 500만원을 추경 예산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경남 창녕군은 태극기 보급 총사업비 1억5000여만원을 연차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월 기준으로 179곳에서 약 10억원을 태극기 달기 운동 관련 예산으로 집행했지만 하반기 광복70주년 사업을 맞아 예산을 추가 편성할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다. 

전국 시도별 현황으로 따지면 경기도가 1억7000만원으로 가장 많은 예산을 편성했다. 뒤를 이어 경북은 1억4000여만원을 썼다. 무상급식 중단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경상남도는 산하 시군구 13곳에서 1억2000여만원을 태극기 관련 예산으로 집행했다. 그리고 전남 1억800여만원, 서울특별시 1억600여만원, 강원도 7900여만원 순으로 나왔다. 제주도는 가장 적은 101만원을 집행했다. 정보공개 청구 결과 78곳이 관련 정보를 처리 중이거나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추가 정보 공개가 이뤄지면 관련 예산이 늘면서 순위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지난해까지 태극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던 경기도 광주시는 태극기 배포를 위해 올해에만 1000개의 태극기를 구입했고, 지난해 태극기를 300개 보유하던 경기도 화성시는 올해 3000개의 태극기를 구입했다. 경기도 가평군은 태극기 보급 사업을 위해 추가경정예산에 1100만원을 계상하기도 했다. 지자체 예산을 들여 태극기 거리를 조성하거나 신문광고까지 집행하는 것을 보면 태극기 달기 운동에 중앙정부가 예산을 지원하지 않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장관 바뀌면서 아주 난리가 났다. 태극기에 대한 애정이 대단 하셔서. 통장회의 등을 통해 자꾸 이런 걸 교육시킨다. 각 가정마다 태극기를 달 수 있도록. 저소득층 등 태극기 구입할 비용이 없는 집에 배포를 해라. 우선적으로 먼저 배부를 해달라고 하더라. 8·15때는 태극기 물결이 가득 차도록 할 것이다.” 인천시 소속 한 구청 공무원의 솔직한 얘기다.  

태극기 달기 운동 관련 예산을 가장 적게 집행한 곳은 부산광역시 사하구로 나왔다. 현수막 제작과 담당자회의 비용으로 6만6000원을 집행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관악구(11만원), 제주도 제주시(13만원), 부천시 소사구·오정구(14만8500원), 대전 중구(24만원), 전주시(30만원), 인천시 강화군(33만원),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덕양구(36만3천원), 경남 거제시(40만원)가 태극기 관련 예산을 적게 집행한 것으로 나왔다. 관련 예산을 아예 편성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전남 보성군의 경우 관변 단체의 지원을 받아 캠페인을 벌였고 관련 예산을 편성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전국 시군구 태극기 예산 편성 순위. 그래프=이우림 기자

공무원 자녀 태극기 인증샷이 애국?

전국적으로 9만장에 이르는 태극기 등을 제작하면서 인쇄소에서 재료가 부족하거나 품귀 현상으로 태극기 확보가 어렵다고 호소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인천시 소속 구청 한 공무원은 "너무 갑작스럽게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하다 보니 공장에서 인쇄가 안 될 정도였다. 원래 시에서 300개 태극기를 지원받기로 했는데 공장에서 제작을 못해 100개 밖에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태극기를 구할 수 없어 3·1절 태극기 달기 운동은 이 정도만 하고 8·15 광복절에 대대적으로 운동을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경상북도 을릉군의 경우 3500개 태극기를 배부할 계획이었지만 "태극기 품귀현상으로 확보하지 못한 400세트는 차후 확보하여 읍면에 별도 배부"하기로 했다.

정부가 추진단을 구성하도록 하고 국기꽂이 전수조사 실시, 국기판매소 설치 등을 중앙행정기관과 지자체, 공공기관에 지도 사항으로 점검하면서 태극기 달기 운동 과열 경쟁도 나타나고 있다. 

전국적으로 아파트를 대상으로 태극기 게양 전수조사를 벌이고 모범단지를 선정해 육성하거나 주민의 태극기 구입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읍면동 민원에 태극기 판매소가 대거 설치됐다. 지난 2월 26일에는 태극기 가두 행진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면서 관변 단체들을 동원하거나 지원했다.    

대전 유성구의 경우 모든 공무원 자녀 및 초중학생이 휴대전화를 활용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에 태극기 게양 사진을 ‘인증샷’으로 올리도록 권고했다. 특히 471개소 어린이집 원장 앞으로 공문을 보내 "미래의 주역인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태극기의 상징성, 국기의 게양 등 국기에 대한 예절과 존엄성을 널리 알리고자 하오니 귀 어린이집의 보육계획에 '3.1절 가족과 함께 태극기 달기' 태극기 그리기 등 나라사랑 운동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육군9585부대는 예비군 훈련시 나라사랑 함양을 목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한다며 전북 완주군에 태극기 지원 협조를 의뢰했다.  
전북 고창군은 '범 군민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 추진 결의문을 낭독한 뒤 군수가 '우리 민족의 혼 태극기'라고 선창하면 행사 참가자들이 '게양하자, 게양하자, 게양하자"라고 제창했다. 

경북 안동시는 “우리지역은 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으로 독립운동의 성지입니다. 아직까지 태극기를 달지 않은 가정에서는 지금 바로 태극기를 달도록 합시다"라는 홍보문구를 내걸었다. 경북 영천시는 언론사에 3. 1절 태극기 달기 동참 운동을 홍보한다면서 경상매일신문 4면 하단에 110만원짜리 광고를 게재했다. 

강원도 고성군은 7번국도 야립간판에 400여만원을 들여 대형 현수막을 제작했다. 강원도 강릉시는 마라톤 대회 참가자 50명을 대상으로 양손에 태극기를 쥐고 달리도록 하는 3. 1절 행사 태극기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전남 무안군은 군수 등 주요 참석자가 줄을 당겨 대형 태극기를 군청 본관 벽면에 게양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정부 부처 공공기관-관변단체도 동원대상 

관변단체와 청년회 등을 동원해 태극기 달기 운동을 벌인 곳도 상당수에 달했다. 제주도 서귀포시의 경우 서귀포해병대전우회를 태극기 달기 운동 주체로 세우고 읍면 지역은 읍면연합청년회가 담당하도록 했다. 새마을운동협의회와 한국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협의회는 전국 대부분 태극기 달기 운동에 동원됐다. 

전국 시군구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도 태극기 달기 운동 홍보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교육부는 학교에 태극기 그리기, 글짓기 등 국기 선양 활동 방침으로 하달했고 미래창조과학부는 태극기 달기 홍보 내용을 케이블TV 자막에 넣기로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각급 관광호텔에 국기를 24시간 게양하도록 권고했고 태극기 등 국가상징 관련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 제작을 지원하도록 했다. 

공기업도 태극기 달기 운동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한국공항공사는 '태극기를 띄웁니다'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벌이면서 보안 검색대 앞에 수십개의 태극기를 꽂은 화분을 전시했다. 김포 공항을 이용한 이아무개씨는 "화분에 기괴스럽게 태극기를 꽂아놓은 것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해외 나가는 것도 아니고 국내선 안에서 태극기가 수십개 전시되는 것을 보고 징그럽다는 느낌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기법 적용 대상 공공기관이 2014년 기준 304개라고 밝혀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부처 산하 기관, 각종 연구원, 대학병원, 공단과 재단, 진흥원 등도 태극기 달기 운동에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지자체에 강하게 주문하는 형식으로 태극기 달기 운동이 진행되면서 법 위반 문제를 묻는 지자체도 생겼다. 전남 영암군은 국기의 게양 관리 및 선양에 관한 규정에 따라 지자체가 국기꽂이가 설치되지 않은 가구에 대해 설치를 권장하도록 돼 있는 것을 근거로 예산을 편성해 무상 또는 일부 지원하는 것이 공직선거법에 저촉됐는지를 물었다. 이에 영암군 선관위는 "무방하다"고 답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애국심을 강조하는 발언에서 시작해 중앙정부 계획에 따라 전국에서 태극기 달기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을 위시(爲始)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많은 지자체가 태극기 관련 예산을 집행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상징인 새마을기를 공동 구입했다. 

전라도 한 면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최아무개(35)씨는 "정부에서 추진하면 도에서 군단위, 면단위로 내려와 마을회의를 하게 된다. 관에서 지원받는 사업이다 보니 티를 내면 눈총을 받게 돼서 마을 어르신들이 동원이 안 될 수 없다"며 "하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60~70년대 박정희 시대 새마을운동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버지를 따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21세기 SNS 시대에 젊은 층들도 이해를 못한다. 이 시대에 먹힐만한 사업이 아니다. 거부감이 든다"고 말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