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2899735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2>제25대 평원왕(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0>제25대 평원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54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1>제25대 평원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547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2>제25대 평원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549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3>제25대 평원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562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4>제25대 평원왕(5)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1563 

[十九年, 王遣使入周朝貢. 周高祖拜王爲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19년(577)에 왕은 사신을 주(周)에 보내 조공하였다. 주 고조(高祖)가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대장군ㆍ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여기서 말하는 주는 곧 북주(北周)이다.

조공이든 책봉이든 이런 식으로 고려와 중국 사이에는 간간이 교류가 이어졌고,

인적으로 물적으로 고려와 중국 사이를 오가며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문물을 전했다.

이때 고려의 승려로서 북주에 건너갔던 정법사(定法師)라는 승려도 그 중 한 명인데,

북주 때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의 표법사(標法師)라는 승려와 함께 교유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자세한 삶의 궤적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지었다는 시 '영고석(詠孤石)' 한 수만이

《해동역사》와 《대동시선》에 실려 전하고 있을 뿐.

 

廻石直生空  둥근 돌이 반공에 곧게 치솟고
平湖四望通  너른 호수 사방이 훤히 트였네.

巖根恒灑浪  돌부리엔 언제나 물결이 치고
樹杪鎭搖風  나뭇가지는 늘 바람에 나부끼네.

偃流還漬影  물결 속에 그림자 잠겼는데
侵霞更上紅  노을 비쳐 붉은 빛이 어리누나.

獨拔群峯外  뭇 봉우리 밖에서 홀로 솟아서
孤秀白雲中  흰구름 속에 홀로 빼어나구나.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해 북제가 북주에게 멸망당하면서, 북주 무제의 폐불정책에 밀려 의연은 귀국했다.

귀국한 뒤 의연은 북제에서 배워온 정비된 이론을 바탕으로 불법을 설파하며,

부처의 지혜를 찬양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해동고승전》은 전한다.

의연이 가져온 지론종은 6세기 무렵에 유식사상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십지경론》을 중심으로 성립된 불교 종파로 화엄종의 모태가 되었다.

 

의연은 그 가르침을 명심하여 사람들에게 상세히 가르쳐 지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오한 이치를 두루 통하였다. 언변은 유창하고 이치는 얽힌 고리를 풀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전날의 오래된 의혹은 얼음처럼 환연히 풀렸다. 이제 그 묘한 이치는 안개 걷힌 듯 환하고, 서쪽에서 지혜의 해를 받아 동쪽에 법의 근원을 쏟아붓게 되었으니, 그의 가르침은 금을 매달아놓고 바라만 보는 것처럼 영원하고, 갖가지 구슬을 꿰어놓은 것처럼 무궁하였다. 이른바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나루터요, 법문의 대들보와 같다'라고 한 것은 오직 우리 스님을 일컬음이 아니겠는가. 의연은 본국에 돌아와 부처님의 큰 지혜를 찬양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을 이끌어 지도하니 그 이치는 고금을 꿰뚫었고 훌륭한 명성은 사방에 퍼졌다. 타고난 자질이 크게 뛰어나고 세상의 도리가 서로 돕지 않았다면 어찌 그같은 큰일을 이룰 수 있었으랴. 역사책에 그의 생을 마친 바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쓸 수가 없다.

《해동고승전》 권제1, 승려 의연[釋義淵]

 

<고려 승려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 의연의 전기도 실려있다.>

 

지론종에서 특히나 많이 논의된 것이 '불성(佛性)'에 대한 것인데, 이것을 두고 견해차가 있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전에 이미 모든 중생들 마음 속에 불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本有]인가?

아니면 어떤 공덕을 갖추고 있지 않다가 후천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나야만 비로소 생기는 것[始有]인가?

 

일단 의연은 이미 깨달음 이전에도 '중생들에게는 본질적으로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

법상의 남도계를 수용해 고려에 전했는데, 펴라의 신진귀척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성파 구귀척들에게 맞설 수 있는 사상적인 기반이 되어주었으니까.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내재되어 있고 성불할 수 있다면 나와 저쪽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차별할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이미 중앙정계에 진출한 구귀척도, 뒤늦게 정계에 진출한 신흥귀척도

다 같이 마음 속에 불성이 내재되어 있으니 차별받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신흥 귀척들의 자부심이요 자신감이 되었다.

 

일찌기 안원왕 시기에 신라로 망명한 승려 혜량이 '이 나라가 혼란스럽다'고 했던 것에 비한다면,

양성왕 때는 상당히 정국이 안정되고 정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왕권의 위상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안원왕 말년의 불교 교단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귀척 세력과 연계되어 있던 불교 교단의 분열을 다잡기 위해 의연이나 왕고덕은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끝에 고려 불교는 더욱 발전해나갔다.

아마 고려 역사를 통틀어서 이때보다 더 불교문화가 고려 안에서 융성하게 빛났던 시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중국과의 외교도 그럭저럭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주서》나 《책부원귀》에는 이때 주에서 고려에 보낸 칭호가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요동왕(遼東王)이라고 했는데,

이미 그 시대 중국에서 '요동=고려'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정립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평민으로서 대형의 벼슬을 받고 고려의 용장으로 거듭난 남자.

온달(溫達).

고려의 장수로서 이 무렵 북주의 침공을 받은 고려를 위기에서 구하고

대형(大兄)이라는 고려의 고위 관직까지 역임한,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태왕의 공주였다는 평강공주와의 로맨스 역시 유명한 이야기다.

야사가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깜'이기도 하지.

《삼국사》 온달열전에서는, 온달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이렇게 시작한다.

 

[溫達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의 사람이다. 비록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구걸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고 저자 거리를 오갔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했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흔히들 바보 온달이라 부르는 이 남자의 이야기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했다.

수도 평양에서 그의 이름을 모를 정도가 없을 정도로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던 그였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효성이 무척 지극해서, 가난한 집안 살림에 항상 낡은 옷에 낡은 신발로

저자를 돌아다니면서 밥을 구걸해다가 맹인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될 공주님께서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戲曰 “汝常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평강왕의 어린 딸이 자주 울곤 하니, 왕이 놀리기를

“넌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대장부의 아내는 못 되겠구나. 바보 온달한테나 시집보내 버려야지.”

하였다. 왕은 매양 그렇게 말하셨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바보 신랑에 울보 신부.

신분 관계는 조금 역전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제법 잘 어울리는 커플 아닌가?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평강공주(平岡公主)'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여자애.

그런데 얘가 무슨 일에도 툭하면 울고, 툭하면 울고, 소위 말하는 '울보'였단다.

참다 못한 태왕께서 요 녀석, 어린 공주를 달래면서 '계속 울면 저기 바보 온달한테 시집보내겠다'고 달랬다.

지금도 어린 애들이 울면 으레 "자꾸 울면 귀신 온다"고 달래듯이.

(난 울 때마다 어른들이 '곰쥐~' 이랬었는데)

그리고 울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니, 공주에게는 '바보 온달'이라는 이름이 귀에 박혔을 것이다.

문제는 공주가 성장한 뒤였다.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 하시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대왕께선 항상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십니까? 필부도 식언(食言)은 하지 않으려 하는데, 지존하신 분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죠. 그러니 '왕은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니, 소녀 감히 따를 수 없습니다.”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내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 있겠느냐? 너는 네 갈 데로 가버려라.”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이런 닝기리....!

순진한 건지, 아니면 같은 바보인건지(만약 그렇다면 환상을 떠나 완전 천생연분 커플이지).

이 공주님은 아버지가 어릴 때 자기를 달래려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자기는 그 '바보 온달'이 아니면 절대 시집 안 간다고.

부식이 영감이 《삼국사》 편찬 자료 뽑으면서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얼마나 황당하게 여겼을까.

(나도 그랬는걸. 이 여자 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지금 우리 시각으로 생각해도 이 여자는 참으로 당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없다.

내 생각에는 '철없는 여자'같다.

왕은 이 철없는 딸에게 화를 내며 마침내 왕궁에서 쫓아낸다.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차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늙은 할멈이 있는 것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가 대답하였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하신 분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 되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아보니 향기가 예사롭지 않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아 이는 반드시 천하의 귀인(貴人)일 것이요. 누구한테 속아 여기 오셨소? 내 자식은 배고픔을 못 이겨 산에 느릅나무 껍질 벗기러 간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다들 평강공주 평강공주 이러는데, 사실은 이 '평강'이 이름이 아니고,

사실 낙랑공주처럼 그녀에게도 이름이 없다. 없는게 아니라, 진짜 이름이 뭔지 모른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도 나오듯이, 그녀의 아버지 양성왕을 평강왕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평강왕의 공주라는 의미로 평강공주라고 부른 것이지, 이름이 평강이라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다.

그래 그 공주가 온달의 늙고 눈먼 어머니를 직접 만나서 온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는데....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공주가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건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냐.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지?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하고는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보통 사람 같으면, 공주 정도 되는 여자가 와서

(그래도 공주인데 성격은 몰라도 미모하고 몸매는 수준급일거 아냐)

자기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서 오십쇼"지만(다들 그렇지 않나?)....

온달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처지를 잘 알아서, 자기와 결혼하려는 여자가 없는 것도 잘 알았을 것이고,

당연히 온달에게 공주는 '정신나간 사람' 혹은 '귀신이나 여우'로 비쳤을 것이다.

그리고 온달은 공주에게 호통을 치며 도망쳐버렸다.

 

여기서 본다면 이 온달이라는 자가 정말 바보였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저 여자가 여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어쩌면 열전에서 그를 가리켜 바보라고 부른 것은 '지능'이 딸리는 것이 아니라

좀 사람이 융통성이 없고 꽉 막혔다는 의미나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밥 빌어먹는 거지 주제에 융통성도 없고 고지식한 것을 보고 바보라고 부르지 않았겠냐고.

공주는 이대로 돌아갔을까?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資用完具. 初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밑에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상세히 말했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내 자식은 너무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너무 가난해서 귀인께서 거처할 곳이 못 되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一斗粟尙可舂, 一尺布尙可縫]' 하였습니다. 실로 마음만 맞다면, 어찌 꼭 부귀한 뒤에야만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금팔찌를 팔아 논밭과 집, 노비, 소와 말, 가구와 그릇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 공주는 온달에게 말했다.
“아예 저자 사람들의 말은 사지 마시고, 꼭 나라에서 내다 파는 병들고 파리한 말을 사오셔야 됩니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내 생각에, 우리나라 여자들은 엄청, 억척스러운 데가 있는 것 같다.

젊은 여자든 늙은 여자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모두 생활력 강하고 의지 깊다.

공주도 그러했다. 자기가 왕궁에서 가출하다시피 나오면서 갖고 나온

금팔찌(《동사강목》에서는 보검寶劒이라고 했음)를 팔아 살림살이 갖추고

덕분에 가난하던 집이 부유해졌다. 역시, 사람은 어떻게든 먹고는 살게 마련이야.

 

온달에게 말[馬]을 사오게 하면서, 시장에서 팔고 있는 것은 사오지 말고,

나라에서 키우다가 병들고 야위어서 내다 팔려고 내놓은 것을 사오라는 팁(Tip)까지 준다.

말 파는 장사꾼들이 온달이 바보인줄 알고 일부러 형편없는 것을 속여서 팔까봐 그렇게 말했을까?

단재 선생님 말씀인데, 시대가 시대다보니 전쟁할 일이 많았고 고려는 원래가 말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였다잖아.

그러다 보니까 대궐에서도 말을 길러서 군사훈련(사냥) 때에 써먹고 그러는데,

기르는 말은 국마(國馬)라고 부르면서 잘 먹여 잘 기르고 화려한 굴레를 씌워서

왕이 말을 타다가 다쳐도 말한테 밥 주던 마부를 벌줬단다.(고려 법률에 다른 사람 우마를

다치게 한 사람에게 처벌한 규정이 있긴 하다) 그러다보니 이것들이 빡쳐갖고

혹시라도 벌받을까봐, 꼭 잘 달리고 힘 좋은 준마가 있으면 이걸 굶기던지,

아니면 어딜 때려갖고 병을 줘서 궁중에 내쫓고 그랬는데, 준마라고 하면 왕이 꼭 탈 것이고

혹시라도 그거 타다가 무슨 문제 생기면 책임은 자기가 다 져야 되니까.

(좀 떨어지는 놈이 그랬으면 자기들 책임도 덜하거든.) 그걸 공주가 알아갖고

나라에서 쓰다가 병들어서 내다파는 말로 사와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거지.

 

아무튼 그렇게 온달이 사온 말은.... 잘 먹고 잘 컸다.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고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그 달리는 것이 언제나 모두를 앞지르며 그 잡은 짐승 또한 많아 따를 이가 없었다. 왕이 불러다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가만 보자. 3월 3일이면 우리나라 향교에서 향사 지내고 향사례(鄕射禮) 하는 날인데....

그날 고구려 사람들이 낙랑 언덕에 모두 모여서 사냥하고,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낸다.

쥑이는 타이밍이다. 그래 거기에 태왕도 직접 나가서 사냥을 했는데,

태왕의 눈에 가장 사냥을 잘 하는 사람이 눈에 띄어서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사냥 잘 하는 용맹한 사람이, '바보' 소리 듣던 온달이라는 것을 알고 놀란다.

그야말로 미꾸라지가 용 된 것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肄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寵榮尤渥, 威權日盛.]

이때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산(肄山)의 들판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때에 온달을 제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로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삼국사》 권제45, 열전제5, 온달

 

중국 후주(後周)의 군대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그런데 이게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온달은 전쟁터에 나가서 공을 세우고, 마침내 태왕은 그를 정식으로 자신의 사위로 인정하고 벼슬까지 내린다.

딸에 대한 화가 풀린 것은 물론이다.

 

대형(大兄)이라는 건 고려의 관등 가운데서 7위에 드는 자,

장군직인 대모달 직속의 단위부대장격인 말객(末客)이 될 자격을 갖춘 벼슬이다.

지금이야 온달이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진짜 귀척과는 아무 상관없는 평민은 아니고

평양성에서 성장한 신흥귀척의 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만약 온달이 정말 평민으로서 대형 벼슬까지 올랐다면, 그것은 인간승리이자 바보의 입지전이다.

이렇듯 천하의 바보를 이렇게나 용맹한 장수로 만든 것도, 따져보면 모두 그 부인, 공주의 힘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 야사가 된 이유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이 남자 앞에서 힘 주면서 가끔 이 이야기 꺼내고 그러잖아.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알지? 당신은 내가 옆에서 내조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그러고보니 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의 어떤 대통령(클린턴이었나?)이

자기 부인과 차를 타고 주유소에 기름 넣으러 갔는데, 때마침 주유소에서 기름 넣던 사람이

대통령 영부인의 대학 다닐 때 애인이었다. 대통령은 그걸 알고서 영부인에게

"당신이 저 사람과 결혼했으면 지금쯤 저 사람과 함께 기름이나 넣고 있겠지"

했었는데, 그런데 대통령의 말을 듣고 난 영부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천만에, 저 사람이 지금 대통령이 되고, 기름은 당신이 넣고 있을걸?"

 

말 그대로다. 여자가 남자 없으면 될 일도 안 되듯,

남자도 여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한다는 천고불변의 진리.

남자가 감히 여자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안정복 영감이 《동사강목》 지으면서는.....

 

고구려 왕의 말이 일시적인 희롱에서 나온 일이요, 처음에 온달과 약혼한 일은 없었으니, 공주가 비록 신의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그것은 이른바 '껍질이 없으면 털날 곳도 없다'는 말과 같은 것. 하물며 스스로 온달에게로 갔으니, 이는 외도[淫奔]의 일이다. 혼례를 갖추지 않으면 정숙한 여인으로서는 행하지 못할 일인데, 존귀한 공주로서 ‘밤중에 이슬을 맞아가며 찾는 것’을 꺼리지 않고 홀로 산과 들을 헤매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시집갔으니, 어찌 정숙하다 하겠는가? 고구려왕이 딸 하나도 제대로 못 가르쳐 방종케 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하고, 풍기를 문란시키고, 윤리를 어지럽혔으며 도의를 그르친 것이 컸다. 괴벽하고 비루한 오랑캐 풍속의 소치이니 말할 가치도 없다.

《동사강목》 제3상(上), 정유

(신라 진지왕 2년, 고구려 평원왕 19년, 백제 위덕왕 24년: 577)

 

에이, 안정복 영감도 깝깝하시기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우.

조선조 양반이 그렇게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서도,

오늘날에는 그거, 여자들이 남자들 앞에서 기펼수 있게 해주는 일등공신입니다 예. 좋게좋게 생각하시죠.

(라고 말해도 이미 3백년 전의 사람이라 죽어 무덤에 들어가버렸겠지만.)

귀신이라도 내가 말하는 걸 듣겠지. 어쩌면 보고 계시려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자기가 그토록 비판했던 '괴벽하고 비루한 오랑캐 풍속'으로 변해가는걸?

어차피 우리는 오랑캔데 뭐. 자기가 자기 마음 솔직하게 내놓는게 뭐 그리 잘못이라구.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