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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1>제25대 평원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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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왕 4년, 남조의 진에서 온 사신이 안학궁에 이르러 진 문제의 조서를 전했다.

 

[四年, 春二月, 陳文帝詔授王寧東將軍.]

4년(562) 봄 2월에 진 문제(文帝)가 조서를 내려 왕께 영동장군(寧東將軍)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양성왕이 진으로부터 받은 '영동장군'의 작호는 예전 양원왕이 양으로부터 받았던 작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인데,

이 무렵 백제의 창왕이 성명왕을 대신해 받은 '무동대장군(撫東大將軍)'이라는 작호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관품이었다.

백제왕에게 진이 보낸 '무동대장군'이라는 칭호는 기존의 '수동장군(綏東將軍)'이라는 봉호에서 격상된 것으로,

남조 쪽에서 보면 23반(제3품)에서 20반(제2품)으로 승진한 셈이다.

 

하지만 영동장군은 22반(제3품)으로 평동장군보다는 상위에 해당하지만 백제에 비하면 품수가 하나 낮다.

고려가 진과 수교한 것은 561년이었으니 백제보다 앞서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백제와 가까웠던

남조의 한족 왕조에게는 고려보다 백제가 더 살갑게 느껴졌던 것이다.

더구나 고려는 남조와는 거의 웬수지간으로 지내는 북조 왕조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북제에서 고려에 '표기대장군'이란, 저들 나라에서는 제1품 관직과 맞먹는 호칭을 보낸 것에 비하면

남조의 고려에 대한 입장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했다.

 

[五年, 夏, 大旱, 王減常膳, 祈禱山川.]

5년(563) 여름에 크게 가물어 왕께서 평상시의 반찬을 줄이시고, 산천에 기도드리셨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가뭄이 들었을 때 왕이 평상시 먹는 수랏상 반찬을 줄이는 건, 조선조에도 흔한 일이었다.

이 무렵에는 고려 왕실에 제법, 유교 윤리가 보편적으로 보급되었던 모양이지.

 

[六年, 遣使入北齊朝貢.]

6년(564)에 사신을 북제(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正月, 立王子元爲太子. 遣使入北齊朝貢.]

7년(565) 봄 정월에 왕자 원(元)을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양성왕 7년 정월에 태자가 된 이 원(元)이, 바로 4차례에 걸친 수(隋)의 침공을 격퇴한 주역이신 영양왕.

태자 책봉 이후 북제에 보냈다는 그 사신은, 아마도 태자의 책봉을 대외에 선포해서

그 정통성을 국내에까지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廿六年夏五月, 高麗人頭霧■耶陛等投化於筑紫. 置山背國. 今畝原, 奈羅, 山村高麗人之先祖也.]

26년(565) 여름 5월에 고려인 두무리야폐(頭霧■耶陛)등이 축자(筑紫, 치쿠시)로 투화하였다. 산배국(山背國, 야마시로노쿠니)에 두었다. 지금의 무원(畝原, 우네하라)ㆍ내라(奈羅, 나라)ㆍ산촌(山村, 야마무라)의 고려인의 선조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19, 흠명기(欽明紀, 긴메이키) 26년(565)

 

저들은 백성이었을까, 아니면 양성왕에게 뭔가 감정이 있어 도망친 귀척이었을까.

 

[八年, 冬十二月, 遣使入陳朝貢.]

8년(566) 겨울 12월에 사신을 진(陳)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서기 568년은 고려 양성왕 10년이자, 신라 진흥왕 대창 10년이기도 하다. 이 해 진흥왕은 북쪽의 국경을 돌아보고 있었다.

 


지금 황초령과 마운령에 진흥왕이 이곳에 왔던 흔적이 남아있다. 『진흥왕순수비』가 그것이다. 조선조 고증학자이자 최고의 금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일찌기 북한산과 황초령에 올라서 그 비석들을 직접 탁본을 떠서 연구하고 진흥왕의 비석임을 입증해 주었지만 그 전까지는 온갖 '설'들이 난무했다. 진흥왕의 비석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학대사의 비석이라고도 하고 윤관의 비석이라고도 하고, 고려 예종이 세운 비석이라는 설까지 있었다. 이 비석을 직접 답사하고 확인한 것은 추사가 최초였다. 안정복이나 정약용 같은 국학자들은 이 진흥왕의 비석을 고려 윤관이 개척했다는 '동북 9성'의 위치를 가르쳐주는 『선춘령고려비』라고 생각해, 동북9성의 위치가 지금의 함경남도에 있었다는 '길주이남설'을 제시했지만 1920년대 최남선 등에 의해서야 이 비석은 진흥왕의 비석이고 윤관의 비석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 답사를 직접 해보지도 않고 이건 누구 비석이다, 이건 어느 시대 것이다 하고 제멋대로 설을 펼쳐 얘기를 하다보니 결국 엉뚱한 곳까지 불똥이 튀고 말았다. 책상다리 지식은 이래서 무섭다고 하나.

 

앞서 말했지만 신라의 진흥왕은 고려와 밀약을 맺으면서 자신들이 차지한 북쪽 영토ㅡ고려의 남동쪽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함경남도 지방에 대한 지배를 묵인받았다. 말하자면 고려가 신라에게 '할양'해준 셈이 되겠지만 그 전에 신라가 차지한 땅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척 넘겨버린 것이기도 하다. 그 반대급부로 신라는 100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던 백제와의 동맹을 깨버렸다. 이 비석은 신라 진흥왕 대창 원년(568년) 8월에 황초령의 것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 추사는 이 비석이 고려와 신라 양국의 국경을 획정하기 위해 신라쪽에서 세운 비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신라는 원래의 주인인 고려로부터 지금의 함경도 남부 지역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할양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만주원류고》같은 책에서는 이때 신라가 두만강 너머 길림까지 차지했었다고 적고

지금의 '길림(吉林)'이라는 이름도 신라의 고대 국호인 '계림(鷄林)'의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했는데

뭔 되지도 않는 얘기를 실어놨나 싶어서 코웃음치고 넘겨버리면 그만이지만 국토와 관련된 문제라면 신중할 수밖에.

 

사신을 진에만 보낸 것이 아니라, 저기 바다 건너 왜국에도 보냈는데, 고초가 막심했다.

 

[越人江渟臣裙代詣京奏曰, "高麗使人辛苦風浪, 迷失浦津. 任水漂流, 忽到着岸. 郡司隱匿, 故臣顯奏."]

월(越, 고시) 사람인 강정신(江渟臣에누노오미) 군대(裙代모시로)가 수도에 와서 아뢰었다.

"고려의 사신이 풍랑에 시달리고 표류하여 항구를 모르고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군사(郡司, 고오리노츠카사)가 숨겨놓고 있기로 신이 알립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19, 흠명기(欽明紀, 긴메이키) 31년(570) 여름 4월 갑신 초하루 기유(2일)

 

여기서 말하는 군사(고오리노츠카사)란 군(고오리)의 책임자, 즉 호족이다.

고려의 사신을 몰래 숨겨놓고 자신이 왜왕인체 하면서, 고려의 사신이 예물로 가져온 것을 빼앗던지,

아니면 왜 조정을 배제하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행사하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五月, 遣膳臣傾子於月, 饗高麗使<傾子此云舸拕部古>. 大使審知膳臣是皇華使. 乃謂道君曰, "汝非天皇, 果如我疑. 汝旣伏拜膳臣. ○復足知百姓. 而前詐余. 取調入己. 宜速還之. 莫煩飾語." 膳臣聞之, 使人探索其調, 具爲與之. 還京復命.]

5월에 선신(膳臣카시하데노오미) 경자(傾子카타후코)를 월에 보내어 고려의 사신에게 향용을 베풀게 했다.<경자(傾子)는 일러 카타후코(舸拕部古)라 한다> 대사(大使)는 선신(카시하데노오미)이 천황(天皇미카도)의 사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도군(道君, 미치노기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천황(미카도)이 아니리란 것은 과연 내가 의심한 바와 같다. 그대는 선신(카시하데노오미)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그래서 더욱 평민임을 알았다. 그런데 전에 나를 속여서 공물을 가져가서 자기 것으로 삼았다. 속히 반환하라. 번거롭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

선신(카시하데노오미)이 듣고서 그 공물을 찾아 돌려주고, 수도로 복명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19, 흠명기(欽明紀, 긴메이키) 31년(570)

 

그 도군(미치노기미)이라는 호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려 사신단의 수장 즉 대사(大使)께서는, 이 자의 행동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의심하고 있다가 마침내 진짜 왜왕이 보낸 선신(카시하데노오미)가 와서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의심이 맞았음을 확신하면서, 하마터면 도중에 가로채일뻔 했던 것을 도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을 7월 임자 초하루에 근강(近江, 오우미)에 도착한 고려 사신은 왜국에서 꽤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十二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12년(570) 겨울 11월에 사신을 진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陳朝貢. 秋七月, 王畋於浿河之原, 五旬而返. 八月, 重修宮室, 蝗旱, 罷役.]

13년(571) 봄 2월에 사신을 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왕께선 패하(浿河) 벌판으로 사냥 나가셨다가 50일만에 돌아오셨다. 8월에 궁실을 중수하다가 누리와 가뭄의 재해가 있자 공사를 그만두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조공 보낸 것만은 좀 뺄수 없을까만....

패하로 사냥 나가서 50일 동안, 태왕은 사냥을 위시한 '군사훈련'을 벌였던지도 모른다.

정조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군사적 기반으로 장용영을 육성한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력 양성.

예전에도 잠시 소개한 바가 있지만, 그 시대의 사냥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모종의 군사훈련도 겸하는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호라즘이나 서하 여러 나라들과 전투를 벌일 때에 사용했던 전술도,

사냥을 통해 익힌 것이라 하지 않던가.

 

군사훈련 하니까 생각난 건데, 이 패하는 정월마다 돌팔매 싸움이 벌어지던 곳이기도 했다.

편싸움 즉 석전(石戰)이 여기서 이루어졌는데, 정월 의례로 왕이 신하들을 좌우 두 편으로 나누어서

서로 물 끼얹고 돌 던지고 소리 지르고 도망가고 뒤쫓고 하는 걸 두 세번씩 하고 그쳤다고,

《수서》 고려열전은 전한다. 석전의 전통은 신라와 고려, 조선조까지 이어졌는데,

돌멩이를 막 던지고 그러는게 참... 우리 조상님들 의외로 과격한 면 있어. 

 


<평원왕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삼존불상. 우리나라 국보 85호.>

 

이것은 일제시대인 1930년에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연산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우리나라 국보 85호로 현재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높이 18cm의 배처럼 생긴 광배 한가운데 놓인 본존불 좌우로 협시보살을 모신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인데,

밑에 깔고 서있어야 할 연꽃 모양의 대좌는 없어죴다.

 

본존은 명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로서,

양 어깨를 모두 감싸고 있는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고 평안을 준다는 뜻의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다. 그리고 높이는 11.5cm인데,

현존하는 금동 일광삼존불의 본존 중에서 가장 크다.

 

광배는 본존을 중심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그 안에 연꽃과 당초무늬를 양각하고,

그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를 양각으로 새겨 그 사이에 화불(化佛) 세 구를 뒀다.

명문은 광배의 뒷면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7행까지는 종서(縱書)로 되어 있으나,

마지막 8행은 맨 밑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자를 새겨두었는데, 글자는 역시 세로로 읽게 되어 있다.

내용은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가 내세에도 불교에 귀의할 것과 불상 제작을 발원한 자신들도

미래에 미륵불을 만나 깨달음을 얻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五月壬寅朔, 天皇問皇子與大臣曰 "高麗使人今何在?" 大臣奉對曰 "在於相樂." 天皇聞之, 傷惻極甚. 愀然而歎曰 "悲哉. 此使人等, 名旣奏聞於先考天皇矣." 乃遣郡臣於相樂, 檢錄所獻調物, 令送京師. 丙辰, 天皇執高麗表疏授於大臣. 召聚諸史令讀解之. 是時諸史於三日內皆不能讀. 爰有船史祖王辰爾, 能奉讀釋, 由是天皇與大臣俱爲讚美曰 "勤乎辰爾. 懿哉辰爾. 汝若不愛於學, 誰能讀解. 宜從今始近侍殿中." 旣而詔東西諸史曰 "汝等所習之業何故不就. 汝等雖衆不及辰爾." 又高麗上表疏書于烏羽. 字隨羽黑旣無識者. 辰爾乃蒸羽於飯氣, 以帛印羽, 悉寫其字. 朝庭悉之異.]

5월 임인 초하루에 천황(미카도)은 황자와 대신에게 물었다.

"고려의 사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신이 대답하였다.

"상락(相樂)의 관에 있습니다."

천황(미카도)가 듣고 매우 슬퍼하셨다. 추연히 한탄하였다.

"슬프구나. 그 사신 등이 이르렀다고 이미 선고(先考) 천황(미카도)께 고했거늘."

여러 신하들을 상락관에 보내어, 헌상하는(?) 공물을 조사하여 기록하고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셨다. 병진(15일)에 천황(미카도)이 고려의 국서를 받아 대신에게 주었다. 여러 사관을 불러 모아 해독시켰다. 이때에 여러 사관이 사흘이 지나도 누구 하나 읽을 수가 없었다. 이때에 선사(船史, 후네노후비토)의 선조 왕진이(王辰爾)가 능히 읽고 해석하니, 천황(미카도)이 대신과 함께 칭찬하였다.

"잘했다 진이여, 훌륭하도다 진이여. 네가 만일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누가 읽어서 풀이할 수가 있겠느냐. 이제부터 전내(殿內)에서 근무하라."

그리고 동서의 여러 사관에게 조하였다.

"너희들이 익힌 업이 어째 진보하지를 않느냐. 너희가 수는 많지마는 진이 한 명만 못하구나."

그런데 고려가 올린 문서는 까마귀 깃털에 쓰여 있었다. 문자가 깃털의 검은색에 헷갈려서, 아무도 알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진이가 밥 김으로 쪄서 부드러운 비단에 올려 글자를 모조리 옮겼다. 조정 사람들이 모두 다 기이하게 여겼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0, 민달기(敏達紀, 비다츠키) 원년(572)

 

특이하게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양성왕은 왜국에 보내는 국서를 까마귀 깃털에 써서 보냈다는데,

그때 기술로 어떻게 까마귀 깃털에다가 글씨를 쓸 수 있었던 걸까?

 

[六月, 高麗大使謂副使等曰, "磯城嶋天皇時, 汝等違吾所議, 被欺於他. 妄分國調, 취與자者. 豈非汝等過, 其若我國王聞, 必誅汝等." 副使等自相謂之曰, "若吾等至國時, 大使顯○吾過, 是不祥事也. 思欲偸殺而斷其口." 是夕, 謨泄. 大使知之, 裝束衣帶, 獨自潛行. 入館中庭, 不知所허. 是有賊一人, 以杖出來, 打大使頭而退. 次有賊一人, 直向大使, 打頭與手而退. 大使尙○然立地, 而拭面血. 更有賊一人, 執刀急來, 刺大使腹而退. 是時, 大使恐伏地拜. 後有賊一人, 旣殺而去. 明旦, 領客東漢坂上直子麻呂等, 推問其由. 副使等乃作矯詐曰, "天皇賜妻於大使, 大使違勅不受. 無禮玆甚. 是以, 臣等爲天皇殺焉." 有司以禮收葬. 秋七月, 高麗使人罷歸.]

6월에 고려의 대사가 부사에게 일러 말하였다.

"기성도천황(磯城嶋天皇시키시마노 스메라미코토) 때에 그대들은 내 생각과는 달리 타인에게 속아넘어갔다. 망령되게도 나라의 공물을 나눠 쉽게 미천한 자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대들 잘못이 아니냐. 우리 국왕께서 들으시면, 반드시 그대들을 벌할 것이다."

부사 등은 동료들과 상의하였다.

"우리들이 나라에 돌아갔을 때, 대사가 우리 잘못을 밝히면 이는 좋지 못한 일이다. 몰래 죽여서 그 입을 막아야 되겠다."

이날 저녁에 음모가 누설되었다. 대사가 알고, 옷과 허리띠를 단속하고서 혼자 도망쳤다. 관사 가운데 뜰에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때에 적의 한 명이 지팡이를 들고 나와 대사의 머리를 때리고 물러갔다. 다음에 적 한 명이 곧바로 대사를 향하여 머리와 손을 때리고 물러갔다. 대사는 그태껏 잠자코 땅에 서서 얼굴의 피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또 적 한 명이 칼을 들고 달려와서 대사의 배를 찌르고 물러갔다. 대사는 두려워서 땅에 엎어져 절하였다. 뒤에 적 한 명이 대사를 죽이고 갔다. 아침에 접대사 동한판상직(東漢坂上直, 야마도노아야노 사카노우에노아타이) 자마려(子麻呂, 마시마로) 등이 그 까닭을 추문하였다. 부사 등은 거짓으로 말했다.

"천황(미카도)께서 대사에게 처(妻)를 하사하였습니다. 대사는 칙언을 거절하여 받지 않았습니다. 무례함이 자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 등은 천황(미카도)을 위해 죽였습니다."

유사가 예로서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지냈다. 가을 7월에 고려의 사신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0, 민달기(敏達紀, 비다츠키) 원년(572)

 

뭐 그리 대단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 사건은 아니고, 그냥 고려 사신단 안에서 있었던 내분에 관한 것이다.

대사를 빼고, 부사며 대부분의 사신단이, 가짜 왜왕에게 속았던 것을 양성왕이 알게 되면 가만 두지 않을 터.

다행히 예물이 다 뺏기지는 않았다만 그래도 그토록 어리석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부사와 다른 사신단은 결국, 고심끝에 자기네 사신단 최고 책임자인 대사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추궁하는 왜국의 관리에게는 왜왕에게 죄를 지어 죽였다고 둘러대버렸고.

 

[十五年, 遣使入北齊朝貢.]

15년(573)에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북제와의 외교관계가 재개될 즈음, 고려에서는 의연(義淵)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서쪽으로 구법행을 떠났다.

그는 양성왕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고려의 신진 귀척들의 후원에 힘입어 북제로의 구법을 떠났던 인물이기도 하다.

 

[釋義淵, 高句麗人也. 世系綠致, 咸莫聞也. 自隸剃染, 善守律儀. 慧解淵深, 見聞泓博, 兼得儒玄, 爲一時道俗所歸. 性愛傳法, 意在宣通, 以無上法寶, 光顯實難, 未辨所因.]

승려 의연은 고구려 사람이다. 혈통이나 출생의 인연을 전혀 알 수 없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계율을 잘 지켰다. 지혜가 넓고 견문이 깊은 데다 유교와 도교를 아울러 통달하였으므로 당시 도속들이 귀의하였다. 성품은 법을 전하기를 좋아하여 뜻을 포교하는 일에 두었으나, 위없는 법보는 그 빛을 나타내기가 실로 어려웠으며 또한 연유한 바도 알 수 없었다.

《해동고승전》 권제1, 승려 의연[釋義淵]

 

《해동고승전》에는 스스로 승려로서 출가한 의연에게 석가가 열반에 든 시기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해졌을 때의 황제의 연호는 무엇이었는지, 북제와 진 둘 중 어느 쪽에 먼저 전래되었는지,

불교 경론 등의 저자와 그런 경론을 찬술하게 된 유래나 상서로운 징조들을 기록한 서적은 어떤 것이 있는지

(어찌보면 참으로 자질구레한) 하는 정보를 알아오게 한 것이 고려의 대승상(大丞相)이었던 왕고덕(王高德)이라고 했다.

 

[是時, 高句麗大丞相王高德, 乃深懷正信, 崇重大乘, 欲以釋風, 被之海曲. 然莫測其始末綠由, 自西徂東, 年世帝代. 故仵錄事條, 遣淵乘帆向○, 啓發未聞. 其略曰: 釋迦文佛, 入涅槃來, 至今其年. 又在天竺, 經歷幾年, 方到漢地, 初到何帝, 年號是何. 又濟陳佛法, 誰先從爾, 至今歷幾年帝, 請乞具注. 其十地, 智度, 地持, 金剛般若等諸論, 本誰述作, 著論綠起, 靈瑞所由, 有傳記不, 謹錄諮審, 請垂釋疑.]

그때 고구려의 대승상 왕고덕은 깊이 바른 믿음을 품고 대승을 존중하여 불교의 영향을 저 변두리까지 입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내력이나 연유,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연대나 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 사실의 조항을 기록하여 의연을 배에 태워 업으로 보내어 아직 몰랐더 것을 알아내게 하였다. 그 대략을 말하면 이러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이래 지금까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또 천축에서 몇 해를 지난 뒤에 드디어 중국에 전해지게 되었습니까? 처음 전해졌을 때의 황제는 누구였으며, 연호는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제와 진의 불법은 어느 쪽이 먼저였으며,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몇 년, 몇 왕을 지났습니까?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십지(十地), 지도(智度), 지지(地持), 금강반야(金剛般若) 등과 같은 논들은 누가 지었으며, 저론의 연기와 영서의 유래에 관한 전기가 있는지 어떤지 삼가 적어 자문하니 의심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해동고승전》 권제1, 승려 의연[釋義淵]

 

국내성 중심의 구귀척들과 펴라성 중심의 신진 귀척 세력이 정계를 양분한 고려에서,

왕고덕은 신진 귀척의 한 사람으로서 의연의 불교 구법을 적극 지원했다.

어쩌면 구 귀척들을 사상적으로 견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연 자신이 불교를 전파하면서 불교에 관한 보다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그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출가하기 이전부터 유교와 도교에 남다른 학식을 갖고 있던 이 의연이라는 승려는

출가한 뒤에는 활발한 불교활동으로 고려 사회에서 꽤나 존경을 받고 있었고,

그것이 대승상 왕고덕의 눈에 들어서 북제로 가기 위한 구법승으로 발탁되었다.

 

[十六年, 春正月, 遣使入陳朝貢.]

16년(574) 봄 정월에 사신을 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평원왕

 

진과 대치하고 있던 북제에서는 무제에 의해 한참 폐불정책이 진행되던 중이었다.

불상과 불탑은 파괴되고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당했으며, 많은 사원들이

황실의 종친과 귀척들의 사유물로 전락했다.(반면 문선제 이후로는

지나친 숭불정책을 펼친 탓에 불교계의 타락이 만연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고려의 승려가 북제에 발을 디뎠다.

비슷한 시기 다른 고려 구법승들이 대부분 남조의 진으로 향한 것과 비교하면

의연의 행적은 몹시 특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연은 이곳에서 북제의 고승으로 손꼽히던 법상(法上, 495∼580)을 만났고,

그로부터 불교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왕권이 종교보다 우선하는 북조의 승관제도를 배웠다.

당시 법상은 《사분율(四分律)》 연구의 대가로 알려져 있었는데, 사분율이란

석가모니 입멸 후 100년경에 담무덕(曇無德)이 상좌부(上座部)의 근본율 중에서

자기가 옳다 싶은 것만 네 번에 걸쳐 뽑아 엮은 책이다. 한 마디로 승려의 계율인데,

북제의 승통을 지내며 부패와 타락의 조짐을 보이던 불교계를 《사분율》 중심의

율학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숙정해나갔다.

 

중국의 승관제는 남조와 북조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북조의 경우는 불교계가 남조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이러한 북조의 승관제도는 후대 수나 당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고려에서는 아마 이러한 제도를 배워다가 자신들도 적용했을 것이다.

 

[二年夏五月丙寅朔戊辰, 高麗使人泊于越海之岸. 破船溺死者衆. 朝庭猜頻迷路, 不饗放還. 仍勅吉備海部直難波送高麗使. 秋七月乙丑朔, 於越海岸, 難波與高麗使等相議, 以送使難波船人大嶋首磐日, 狹丘首間狹, 令乘高麗使船, 以高麗二人令乘送使船. 如此互乘以備奸志. 俱時發船至數里許. 逆使難波乃恐畏波浪, 執高麗二人擲入於海. 八月甲午朔丁未, 送使難波還來, 復命曰 "海裏鯨魚大有遮囓船與楫櫂. 難波等恐魚呑船不得入海." 天皇聞之, 識其謾語駈使於官不放還國.]

2년(573) 여름 5월 병진 초하루 무진(3일)에 고려의 사신이 월(越, 고시) 해안에 정박했다. 배가 부서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조정에서는 자주 길을 잃음을 의심해 향응하지 않고 반송했다. 길비해부직(吉備海部直, 기비노 카이후노 아타이) 난파(難波, 나니와)에게 명하여 고려의 사신을 전송히게 했다. 가을 7월 을축 초하루, 월(고시) 해안에서 난파(나니와)와 고려의 사신들은 같이 의논하여, 송사(送使) 난파(나니와)의 선인 대도수(大島首, 오오시마노 오비토) 반일(磐日, 이와이)과 협구수(狹丘首사쿄노후비토) 간협(間狹마사데)를 고려 사신의 배에 태우고, 고려의 두 사람은 송사의 배에 태웠다. 이렇게 서로 바꾸어 태워서 사고 발생에 대비했다. 함께 출발하여 몇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송사 난파(나니와)는 풍랑을 겁내어, 고려의 두 사람을 잡아 바다에 집어 던졌다. 8월 갑오 초하루 정미(14일)에 송사 난파(나니와)가 돌아와서 복명하였다.

"바닷속에서 큰 고래가 나타나 배와 노를 삼켰습니다. 난파(나니와) 등은 고래가 배를 삼킬까 두려워서 바다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천황(미카도)은 그 말을 듣고,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관의 잡역에 사역시키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0, 민달기(敏達紀, 비다츠키) 2년(573)

 

이게 뭐야. 고려 사신을 바다에다 던져버렸다고? 이런 미친 왜놈 새끼를 봤나...

그래 뭐, 다행히 처벌은 받았다.

양성왕이 이걸 알고도 그냥 넘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알았다면 분명 가만 두지는 않았을터.

수군이든 뭐든 동원해갖고 왜국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겠지.

 

[三年夏五月庚申朔甲子, 高麗使人泊于越海之岸. 秋七月己未朔戊寅, 高麗使人入京奏曰, "臣等去年相逐送使, 罷歸於國. 臣等先至臣藩. 臣藩  使人之禮, 禮饗大嶋首磐日等. 高麗國王別以饗禮禮之. 旣而, 送使之船至今未到. 故更謹遣使人幷磐日等, 請問臣使不來之意." 天皇聞, 數難波罪曰, "欺誑朝庭, 一也, 溺殺隣使, 二也. 以玆大罪, 不合方還." 以斷其罪.]

3년(574) 여름 5월 경신 초하루 갑자(5일)에 고려의 사신이 월(고시) 해안에 정박하였다. 가을 7월 기미 초하루 무인(20일)에 고려의 사신이 수도에 와서 아뢰었다.

"신 등은 지난해 송사를 따라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신 등이 먼저 신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신의 나라에서는 사신의 예로 대하였고 대도수반일(오오시마노오비토 이와히) 등을 예로서 대하고 향응을 베풀어 주어, 고려왕이 따로 후한 예로서 대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송사의 배는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로 사신과 아울러 이와히 등을 보내 신들의 사신이 오지 않는 까닭을 물으셨습니다."

천황(미카도)은 이를 듣고 난파(나니와)의 죄를 꾸짖었다.

"조정을 기만한 죄가 첫째, 이웃 나라의 사신을 익사시킨 죄가 둘째다. 이러한 큰 죄를 짓고도 사면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이로서 단죄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 권제20, 민달기(敏達紀, 비다츠키) 3년(574)

 

왜에게 다행인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지만, 고려에서는 전통적으로 왜와의 관계를 그닥 중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삼국사》만 하더라도, 백제와의 숱한 전쟁기사는 실어놓되 왜에 관련된 언급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광개토태왕릉비』에 그렇게나 왜와 전쟁을 벌인 기사를 실어놓아 마치 왜가 당시 고구려에 맞설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었다고 오해하게 만들어놓고서 정작 자신들의 기록에는 어째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는지.

더구나 고려에서 왜에 보냈다는 사신들도 《일본서기》에는 이름은커녕 지위조차도 기록이 없다.

가장 친했던 백제나 가장 사이가 나빴던 신라도 그 사신들은 웬만하면 관직이나 이름을 다 적어주는데

고려만 그렇지 않은 것은 이 무렵 고려와 왜의 사이가 그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관계,

내지는 사신으로 온 사람들이나 사신을 맞는 사람들이나 태도가 꽤 '건성건성'이었음을 보여준다.

백제가 왜와 다시 동맹을 맺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성왕 시대인 6세기 이후부터는

조금씩 왜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되지만, 고려와 왜의 관계를 짚어가다보면

두 나라가 서로에 대해 비중을 두지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을 미루어 알게 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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