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9>제24대 양원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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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는 되도록 말하지 않는 주의지만, 선비족 왕조인 북위는 고려의 역사와도 연관이 깊고
또 고려와 가까이 지냈던 우호국인지라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자면 선비족의 고유한 풍속을 잃어버린 채
한족의 풍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불사(佛事)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사방에서는 도적이 일어나며
무장들의 힘이 커졌다. 황위계승을 둘러싼 내부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북위는
동서로 분열되었는데, 동위는 550년 고양(高洋)에게 찬탈당해 북제(北齊)가 되고,
서위는 556년 승상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또 찬탈을 당해서 북주(北周)가 되었다.
《해동역사》가 인용한 《통지씨족략》에서 말한 위주(魏周)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네이버 백과사전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북위가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로 갈라졌다면 아마 위주라는 건 북위에서 갈라져 나온 북주를 가리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통지씨족략》에는 고려인으로서 '위주' 즉 북주에 귀화해 정착한 고획(高獲)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북주로부터 독고(獨孤)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얘기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선덕여왕에서 미실 남편으로 나왔던 그분하고 독고탁이 그럼 고려계 후손이야? 싶어서.)
다시 네이버 백과사전을 빌렸다.
우리나라에 독고씨라고 하면 남원(南原)ㆍ광릉ㆍ나주ㆍ의주ㆍ황주 다섯 본관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숫자가 많은 것이 남원 즉 지금 중국 허난(河南) 성 독고씨밖에 없다보니
다른 본관은 찾아볼 길이 없고 남원 단본(端本)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
《남원독고씨세보》에 그 시조를 당(唐)의 8학사(學士)의 한 명으로서 신라에 귀화한 독고공순(獨孤公舜)으로
적고 그의 후손인 독고신(獨孤信)이 중시조로 모셔지고 있는데, 정묘호란 때에 의주 남성(南城)을 지키다
전사한 독고립 그리고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정묘호란 때 분전하다 죽은 독고성, 두 형제가
남원 독고씨의 대표적 인물이란다. 하지만 그 전에도 《고려사절요》에 명종조 내시장작소감이었던
독고효(獨孤孝)와 합문지후였던 독고충(獨孤忠), 고종조 북계병마사 독고정(獨孤靖)이 나오고 있고,
충선왕 때에 독고향(獨孤享)이 몽골 공주를 수행한 공로로 남원군에 봉해졌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나오지는 않는다.
위키피디아 검색에서는 서위(북주)의 무장으로서 활약했던 독고신(獨孤信, 502~557)이
독고라는 성씨를 쓰는 가장 오래 된 사람인데 북주가 세워진 것이 556년이고 그가 태어난 것은 502년이니
살짝 나이가 맞지 않는 면이 있기는 하다. 독고신과 고획이 서로 혈연관계가 있다면
고획을 위주(魏周) 때에 귀순했다고 쓴 것은 무슨 이유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혈연관계가 있는지
이제와서 밝히기는 솔직히 힘들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선 정작 독고신에 대해서 흉노계 무장이라고
적었는데, 할아버지의 이름은 독고사니(獨孤俟尼), 아버지의 이름은 고(庫)였고
처음 태어날 때부터 선비족의 고위층 사람이었던 것처럼 적어놨지 고획이라는 인물은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독고씨가 고려계의 사람이라는 것은 아직 보류에 그치는 설일 뿐이다.
[十一年, 冬十月, 虎入王都, 擒之.]
11년(555) 겨울 10월에 서울[王都]에 들어온 범을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범이 사람들 가까이 사는 것은 그닥 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백년 전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 보면,
조선의 수도 서울에선 성안에서도 범과 표범을 사냥할수 있을 정도였다고.
고려조부터 이미 한양 즉 서울은 범이 많아서 나라안에서도 골치를 삭히고 있었는데,
강감찬 장군께서 한양판관으로 계실 적에 신통력으로 범을 내쫓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조선조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나오고, 조선조에는 수도에 출몰하는 범을 잡기 위한
소위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특수부대까지 두고 있었다.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 復一年租調, 曲赦, 除二罪, 皆原之.]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넓혀 정하였다. 11월에 왕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교하여 거쳐 지나온 주(州)와 군(郡)의 1년간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고, 그 지역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죄[二死]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삼국사》 권제4, 신라본기4, 진흥왕 16년, 개국 5년(555)
북한산과 창녕, 황초령과 마운령, 이 네 곳에 진흥왕은 자신의 업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중 북한산비와 황초령비를 직접 조사하고 조사논문을 쓴 추사 김정희는 북한산과 황초령비에 대해서
신라와 고려의 밀약으로 신라가 백제에게서 한강 유역과 그밖에 다른 땅을 획득했고,
고려가 그 땅을 신라령으로 인정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세워진 일종의 정계비가 바로 이 진흥왕순수비였다고 주장했다.
[十一月, 太白晝見. 遣使入北齊朝貢.]
11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사신을 북제(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11년(555)
고려가 신라와 맺은 밀약이 어느 정도까지 지속되었는가 하는 것은 알기 어렵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고, 밀약이 한번 맺어졌다고는 해도 스토리 전개와 결말을 보면
두 나라 사이의 밀약이 그리 오래 지속된 것 같지는 않다.
[十七年, 秋七月, 置比列忽州, 以沙湌成宗爲軍主.]
17년(556) 가을 7월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成宗)을 군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4, 신라본기4, 진흥왕 개국 6년(556)
비열홀주는 신라 최북변 경계였다. 《동사강목》에서 말한 바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원래 고려령이었던 이곳을 신라가 밀약의 대가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고려에게서 신라가 다시 빼앗은 것인지. 나중에 신라가 적국 당을 끌어들여서 고려를 멸할 것이라는 역사를 미리 알았더라면, 고려가 이런 식으로 신라를 밀어주면서 백제를 견제한다는 정책을 채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평성왕이나 고려 조정은 신라라는 나라를 아직 자기들이나 백제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후진국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다들 알고 있다. 그때 고려나 백제의 판단ㅡ신라를 얕본 것은 너무도 안일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오판이었음을. 신라는 고려가 어떻게 잘 구슬리고 얼러준다고 말을 들을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고, 백제로부터 아무 지분도 얻지 못하는데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얼뜨기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범의 새끼를 괭이 새끼로 알고 집안에 들여서 도둑을 막게 하려고 한 격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고려가 신라를 도와 그들이 백제를 누르고 이곳까지 진출하는 것을 방치한 순간부터 소위 말하는 '삼국쟁패전', 세 나라가 서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치고 받고 싸우는 서바이벌 게임이 시작된 것 아니었을까.
[十三年, 夏四月, 立王子陽成爲太子, 遂宴群臣於內殿. 冬十月, 丸都城干朱理叛, 伏誅.]
13년(557) 여름 4월에 왕자 양성(陽成)을 태자로 삼고, 마침내 내전(內殿)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겨울 10월에 환도성간(丸都城干) 주리(朱理)가 반역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태자를 책봉한지 6개월도 안 되어 일어난 반란. 그것은 아마도 태자를 음해하고자 하는 세력이 일으킨 것이었으리라. 새로운 태자의 지위를 확실히 하고자 내전에서 군신들을 모아 잔치까지 열어보이며, 태자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려 애썼는데, 그러고도 못내 태자에게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단 것인가. 고려와 신라의 밀약이라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될 것 같다.
고려와 신라의 밀약을 통해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동북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신라가 진출했던 지역은 동옥저ㅡ지금의 함경도 남부 일대다. 고려에서 보기에 이곳은 구도 환도성과도 가까운 곳이었다. 환도 세력으로서는 자기들 바로 코앞에서 신라군들이 왔다갔다 하니까 불안해서 미치겠는 거지. 밀약을 주도한 것이 평양을 위시한 신흥귀척 놈들이었으니까, 신흥귀척 놈들이 자기네들 좋을 대로 다해먹으면서 이젠 구도 세력을 저딴 식으로 압박을 하려고 드니까. 참다 못해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환도성간주리(丸都城干朱理)'를 어떻게 떼어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환도성간(丸都城干) 주리'이냐, 아니면 '환도성의 간주리(干朱理)'이냐, 만약 전자를 따른다면 환도성을 다스리는 책임자의 벼슬이 '간(干)'으로서 신라의 그것과 비슷했던 말로 볼수 있겠고, 그냥 후자를 따라서 '간주리'라는 세 글자가 모두 이름이라고 읽어야 하는 걸까? 디지털한국학 삼국사기 홈페이지에서는 '환도성(丸都城) 간(干) 주리'라고 해서 전자를 따랐고,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라는 책에서는 후자를 따라서 '환도성의 간주리(干朱理)'라고 했는데, 둘중에 어떤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혹시라도 리플이나 안부게시판으로 설명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18년(557)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起宗)을 군주로 삼았으며,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 권제4, 신라본기4, 진흥왕 18년, 개국 7년(557)
훗날 신라 9주의 하나인 한산주(漢山州)의 중심도시로 활약했던 충주는 신라가 장악하기 전에는 국원(國原)이라고 불린 고려의 성이었다. 여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아마, 돌망치 들고 매머드 쫓아다니던 구석기 시대부터일텐데, 넓은 의미의 국원성의 범위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 동쪽으로 청풍까지 30리, 서쪽으로는 죽산까지 90리, 남쪽으로는 음성까지 50리, 북쪽으로는 원주까지 40리. 옛 중원군까지 포함한 지금의 충주시를 거의 모두 포괄한 지역이, 옛 고려의 국원성이라 할 수 있다.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이었다.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문무왕 때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였다. 경덕왕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충주(忠州)이다.
소백산맥 남북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도로와 함쳐지는 곳에 있고, 내륙의 중요한 길들을 다시 남한강이라는 탁 트인 수로로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훗날 고려나 조선조에도 여기에 덕흥창과 가흥창을 설치해 전국의 조세를 한양으로 운반했다) 농사짓기 딱 좋은 넓은 평야와 풍부한 구리-철 광산을 보유한 이곳은 금새 한반도 내륙의 경제도시로 성장했고, 고려는 그런 충주를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백제령이었던 이곳을 광개토태왕이 빼앗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충주 장미산성. 고려가 충주에 설치한 국원성의 중심치소였다. 우리나라 사적 제400호.>
고려에 의해 이 충주 땅에 부여된 국원(國原)이라는 이름은, 당시 고려 안에서는 '수도'와도 맞먹는 호칭이었다 할 수 있다. '국원성(國原城)'의 '국(國)'은 곧 '나라[國]'이자 '수도[都]'이며, '원(原)'은 고려에서는 '내(內)', '노(奴)', '나(那)', '양(壤)', '락(洛)', '뇌(惱)'와 함께 치환되어 쓰이면서 '땅[地]'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국원(國原)'이라는 표기 자체가 '국내(國內)' 혹은 '도내(都內)'로, 적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변용되어 쓰일 수 있었다는 의미다.
신라가 이곳에 소경을 설치하기 150년쯤 전인 서기 400년ㅡ그러니까 영락 8년에, 광개토태왕이 백제와 금관가야, 왜의 남방해양동맹에 고립된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보병 기병 다 합쳐 5만이나 되는 원군을 파병했을 때, 왜병을 격퇴하고 나서도 신라를 계속해 고려의 부용국으로서 간접지배영향권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언제든지 감시하기 쉽게 신라의 머리 위에다 고려군이 있어야 된다고 태왕은 생각했던 것일까.(『중원고구려비』에서 말한 신라수사新羅守事 즉 고려에서 파견한 신라 관련 업무 책임자도
이 국원성에서 근무했을지도 모르겠다만)
<충주 노은면에서 출토된 건흥5년명 금동광배. 여기서 고려의 숨겨진 연호인 '건흥'을 확인할 수 있다.>
[建興五年歲在丙辰, 佛弟子淸信女上部, 兒奄造釋迦文像▨, 願生生世世値佛聞, 法一切衆生同此願.]
건흥(建興) 5년 세재(歲在) 병진(416), 불제자 청신(淸信)의 딸[女] 상부(上部) 아엄(兒奄)이 석가문상(釋迦文像)을 만들어..... 원하건대 태어나는 곳 어디에서든[生生世世] 부처 곁에서 법문을 듣기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 이를 바라노라.
고려는 국원성ㅡ이 충주의 도읍를 수도 평양성과 부수도 국내성-한성과 같은 5부 체제로 조성했고, 국원성을 발판삼아 남쪽으로의 진출사업에 더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조성된 남방의 또다른 고려 국원성은 고려의 소백산맥 이남 신라령을 관할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고려는 평양을 중심으로 해서 곡산→원산→강릉→울진→청하→경주에 이르는 길과 수안→신계→안협→평강→춘천→원주→제천→충주→단양→영주→임하→청송→영일만→경주의 길을 개척하고, 군사력과 물자를 집중시킬 수 있는 통로를 장악함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더욱 굳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뭐든지, 멀리 있는 곳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우선 도로망부터 잘 정비되고 봐야 할 일이다. 로마 제국이 괜히 도로 정비에 공을 들인 게 아니라니까.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 奈麻身得作砲弩上之, 置之城上.]
19년(558) 봄 2월에 귀척의 자제와 6부의 호민(豪民)을 국원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나마 신득(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삼국사> 권제4, 신라본기4, 진흥왕 18년, 개국 7년(557)
그렇게 고려가 정비해놓은 도로망이며 물자유통망은, 국원성이 신라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고스란히 신라에게 이관되었다. 신라는 이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옛날 고려가 닦아놓은 도로망을 이용했을 것이고, 나아가 한반도 북방 개척을 위한 전진기지로 고려의 국원성을 '소경(小京)' 즉 부수도로 승격시켰다.(요즘말로 하면 광역시가 된 거죠. 특별시 바로 밑에 있는 광역시. 대구도 광역시라우ㅋㅋ)
<중원봉황리마애불. 충주 지역에까지 진출한 고려 불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우리나라 보물 제1401호.>
신라는 당시 상당히 우수한 문화였던 고려의 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흡수시켰다. 《만주원류고》 같은 책에서야 신라가 두만강 너머 7백리, 지금의 간도 땅 길림 지역까지 진출했고 신라의 국호인 '계림'이 '길림'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지마는 사실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내 알 바 아니고, 그저 예전 고려가 한반도 중부의 남한강 물류지대를 장악하기 위해 공들여 닦아놓은 길과 그 길을 따라 전파된 문화의 흐름을 신라가 모두 흡수했으며, 그것은 신라가 한반도의 패자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그 정도만 알아두면 될 것이다.
[十五年, 春三月, 王薨. 號爲陽原王.]
15년(559)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양원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양원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고려는 새로운 전기에 들어간다. 양원왕의 뒤를 이어 고려의 태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평원왕과 영양왕의 시대를 전후해, 중국 대륙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에서, 고려를 향해 새로운 도전을 펼쳐왔던 것이다. 새로운 국제질서의 확립이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9>제24대 양원왕(5)|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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