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7>제24대 양원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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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성왕 6년(태세 경오: 550).
명농왕은 기어이 고려의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六年, 春正月, 百濟來侵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取二城.]
6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침범해 와서 도살성(道薩城)을 함락시켰다. 3월에 백제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그걸 틈타 두 성을 빼앗아 갔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도살성이 정확하게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금현성도 마찬가지다.
《삼국사》에서 이름은 나오지만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지명만을 모아놓은
'삼국유명미상지명'조에 도살성과 금현성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는데, 설은 많다.
혹자는 천안의 옛 지명인 '도솔(兜率)'이 '도살'과 비슷하다는 것을 들어
천안이 도살성이라 주장하는 것보다는 《삼국사》신라 한주지리지 흑양군조
'도서현(都西縣)'ㅡ지금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는 한다.
금현성에 대해서는 지금 충청도 연기의 금성산 꼭대기를 둘러쳐서 쌓은
금이성이 주목받고 있다.
<연기금이성. 백제의 금현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역사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성 위치가 어딘지는 어렴풋이나마 파악이 돼야
무슨 얘기를 해도 할텐데, 이건 뭐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잖아.
뭐든지 이거 아님 저거다 확실하지 않은 건 결국 나중에 가서 낭패를 보게 마련이라고.
(적어도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는 꼭 필요하다.) 짜증나긴 하지만
금현성과 도살성 두 성을 두고 백제와 고려가 하나씩 집어먹어 가면서 공방을 벌였는데,
신라가 그 틈을 노려서 두 성을 빼앗아갔다는 거 아냐.
[眞興王在位十一年, 大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戍之. 時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진흥왕 재위 11년, 대보(大寶) 원년(550)에 백제가 고려의 도살성을 함락시키고, 고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였다. 두 성을 취하여 증축하고 갑사(甲士)를 머물게 하여 지켰다. 이때 고려에서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니 이사부가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
《삼국사》 권제44, 열전제4, 이사부
어쩌면 이건 백제와 신라 두 나라 사이의 모종의 거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신라가 아직 백제를 우호로 잃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벌인 연극일 수도 있다.
금현-도살의 두 성 함락 직후 바로 고려군과 전쟁을 벌이고 퇴각하는 고려군을
추격해 이긴 것이 말이다. 도살성은 고려령이고 금현성은 백제령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집어치우고 뭐든지 먼저 먹는 놈 차지.
두 친구 사이에서 과자 뺏어먹기 싸움이 벌어졌다.
몹시 배가 고팠던 나는 둘 중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녀석을 도와
다른 한 녀석의 과자를 빼앗기로 하고, 그 대가로 친한 쪽 친구놈과 함께
빼앗은 과자를 나눠 먹었다. 물론 그 녀석의 과자도 조금 받고.
전쟁이 과자 뺏어먹기 싸움은 아니지만, 신라는 금현성에서 고려를 몰아내는 조건으로
백제로부터 도살성을 할양받았던 게 아닐까. 아니면 '공동방비'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금현과 도살 두 성에 신라군을 주둔시키거나.
단순히 그 땅에 주둔만 시키는데 그게 무슨 이득일까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신라로서는 금현과 도살 두 성을 두고 충청도 일대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얻었고, 나아가 백제와 고려 두 나라의 전쟁을 관전하며
그 속에서 나름의 전략적인 교훈을 획득할 수 있으니.
시야가 그만큼 더 넓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夏四月庚辰朔, 在百濟日本王人方欲還之.<百濟本記云, "四月一日庚辰, 日本阿比多還也.">百濟王聖明謂王人曰 "任那之事奉勅堅守. 延那斯, 麻都之事, 問與不問, 唯從勅之." 因獻高麗奴六口, 別贈王人奴一口.<皆攻爾林所禽奴也.> 乙未, 百濟遣中部奈率皮久斤, 下部施德灼干那等, 獻貊奴十口.]
여름 4월 병진 초하루에 백제에 있는 일본의 왕인(王人)이 돌아오려 했다.<백제본기에는 『4월 1일 경진에 일본의 아비다(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하였다.> 백제의 성명왕이 왕인에게 말하였다.
"임나의 일은 칙언(?)을 듣고 굳게 지키겠다. 연나사(延那斯)와 마도(麻都)의 일은 물어볼 것도 없이, 오직 칙언(?)대로 하겠다."
그리고 고려의 노비 여섯 구를 헌상하였다. 따로 왕인에게 노비 한 구를 주었다.<모두 이림(爾林)을 칠 때 얻은 노비다.> 을미(16일)에 백제는 중부나솔(中部奈率) 피구근(皮久斤), 하부시덕(下部施德) 작간나(灼干那) 등을 보내어 고려[貊]의 포로 열 구를 헌상하였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11년(550)
전쟁에서 패하고 차라리 죽었으면 명예로운 이름이라도 남길 것을,
포로로 잡혀 먼 이국까지 노비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심정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고려인들이 백제를 가리켜 '백제 떨거지[百殘]'라고 불렀듯,
백제인들도 고려 사람을 가리켜서 '맥(貊)'이라는 말로 불렀다.
맥국이니 맥왕이니 하면서. 야만스러운 북방의 오랑캐라는 뜻이다.
[夏六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北齊封王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 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여름 6월에 사신을 북제(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북제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려왕으로 봉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6년(550)
《북제서》를 참조로 한다면 이는 북제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원년(550) 9월 계축.
《동사강목》은 이 해에 이르러 동위에서 정변이 일어나 황제가 쫓겨나고 동위가 멸망,
북제라는 새로운 나라가 개국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려는 전통적으로 중국 북조와의 외교관계를 중시하는 편으로
북제에서도 고려의 손을 떨쳐버릴 이유가 없었던 터,
태왕의 사신을 받고 동위의 관직 대신 새로운 관직을 쓰라며 내려준다
(왕조가 바뀌어도 거만한 것은 여전하지). 그래 태왕에게 내려진 새 관작의 이름은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高麗王)의 칭호는 예전과 같고
동위의 것에 비하면 훨씬 격상되었다.
기분나쁘긴 하지만 요동과 동이를 대표하는 나라로 고려를 인식해준 증거니까.
[七年, 夏五月, 遣使入北齊朝貢.]
7년(551) 여름 5월에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북제에 사신을 보낸 그 해, 고려 남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고려에게 밀려 거의 다 죽다시피 한 줄 알았던 백제가
이번에는 신라와 대가라까지 끌어들여 고려의 남쪽을 쳐들어온 것이다.
[新羅來攻取十城.]
신라가 공격해 와서 10성을 빼앗아 갔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7년(551) 8월
《삼국사》에는 신라라고 되어있지만 그건 김부식 영감의 헛소리고,
이 공격의 배후에는 백제가 있었다. 정작 551년에 있었던 전역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히 몇 월에 있었는지 헷갈렸다. 위의 이 구절만 해도
가을 9월의 돌궐전 기사 바로 뒤에 적혀 있어서
돌궐과 고려가 전쟁하는 사이에 전쟁을 벌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니혼쇼키》를 읽다가 이런 기록을 보게 됐다.
[八月, 天皇遣大將軍大伴連狹手彦, 領兵數萬伐于高麗. 狹手彦乃用百濟計, 打破高麗. 其王踰墻而逃. 狹手彦遂乘勝以入宮, 盡得珍寶■賂, 七織帳, 鐵屋還來.<舊本云 "鐵屋在高麗西高樓上, 織帳張於高麗王內寢."> 以七織帳奉獻於天皇. 以甲二領, 金■刀二口, 銅鏤鍾三口, 五色幡二竿, 美女媛<媛名也.>幷其從女吾田子, 送於蘇我稻目宿禰大臣. 於是, 大臣遂納二女以爲妻居輕曲殿.<鐵屋在長安寺, 是寺不知在何國. 一本云 "十一年, 大伴狹手彦連, 共百濟國, 駈却高麗王陽香, 於比津留都.">]
8월에 스메라미코토는 대장군 오오토모노무라지(大伴連) 사데히코(狹手彦)를 보내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려를 쳤다. 사데히코는 백제의 계략을 써서 고려를 깨뜨렸다. 그 왕은 담을 넘어 도망쳤다. 사데히코는 이긴 틈을 타서 궁으로 들어가 진기한 보물과 칠직장(七織帳), 철옥(鐵屋)을 모두 얻어서 돌아왔다.<구본(舊本)에는 『철옥은 고려의 서고루(西鼓樓) 위에 있었고 직장은 고려왕의 내침(內寢)에 쳐놓았었다.』고 했다.> 칠직장을 스메라미코토에게 바쳤다. 갑옷 두 벌과 금식도(金飾刀) 두 자루, 동루종(銅鏤鍾) 세 습, 오색기 두 개[竿], 미녀 원(媛)<원은 이름이다>, 아울러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소가노 이나메노 스쿠네(蘇我稻目宿녜) 오미(臣)에게 보냈다. 이에 오오오미(大臣)는 두 여자를 불러들여 처로 삼아 경곡전(經曲殿)에 살게 했다.<철옥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는데 이 절은 어느 쿠니에 있는지 모른다. 다른 책[一本]에는 『11년(551)에 오오토모노 사데히코노 무라지(大伴狹手彦連)가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내쫓아 물리쳤다.』고 하였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23년(562)
562년의 일이라 써놓아서 《니혼쇼키》가 또 사기쳤구나 하고 넘기려 했는데,
《니혼쇼키》가 인용한 여러 책들 가운데 이 일을 562년이 아닌 551년의 일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550년. 그것은 틀림없이 백제와 신라, 대가라의
삼국 연합군이 고려를 공격하던 551년과 1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잖은가.
《니혼쇼키》속에 인용된 '또 하나의 책[一本]'의 연대로 치환시키면
(1년 정도 앞당기거나 틀리거나 하는 《니혼쇼키》의 연대오류를 감안할 때)
562년이 아닌 551년에 있었던 백제-신라-대가야 삼국 연합군의
대(對)고려 전쟁이었음이 분명하다.
(왜장 오오토모노 사데히코는 대가라군을 따라 저 전역에 참가했을 것이고.)
왜왕이 직접 정벌을 주도한 것으로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는 《니혼쇼키》특유의 윤색,
왜국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왜왕이 다 주도한 것처럼 해석하고
적어놓는 광필(狂筆)로 해석해야 한다.
철옥이라는 것은 뭐냐면 지붕 위에 얹는 철제 장식물,
그러니까 망새(치미)나 귀면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입식생활을 하던 고려에서는 상류층의 공간을 구별하기 위해서 비단으로 만든 장막을 쳤다.
고려의 쌍영총 벽화를 보면 널방 북벽에 그려진 그림에서 양쪽에 기둥을 놓고
그 사이에 휘장을 쳐서 위로 둘둘 말아올린 듯한 그림이 나오는데,
이것이 곧 장방(帳房)으로 무덤 주인 즉 고려의 귀척 부부가 거하던 공간이다.
오늘날 '온돌'의 원조가 된 고려의 쪽구들과 좌상, 평상 문화에 기인한 것이다.
실내에서 고려 귀척들은 쪽구들에 앉거나 아니면 좌상, 평상을 방 안에다 갖춰두고
그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생활했던 것.
온돌 가까이 설치해서 뜨끈뜨끈하게 덥혀서 추위를 이겼는지도 모르겠다.
(이상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중에서 발췌.)
이게 뭐냐면 '영강7년명금동광배'라고 하는, 6세기 고려 때에 제작된 유물이다.
우리나라 해방되고 얼마 안 되어 온통 혼란스럽던 1946년에
평양 평천리의 어느 버려진 절터에서 대좌, 불구(佛具) 등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지금은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단다.
지금 높이는 21cm, 너비 15cm, 폭 0.3cm, 밑부분은 불에 녹아서 손상됐고,
광배 밑부분에 네모난 구멍(불상과 광배를 서로 조립해 붙이는 곳)이
하나만 있는 걸 봐서는 처음부터 불상은 셋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 확실한데,
광배만 있고 불상이 없으니 이게 또 꼴이 말이 아니거든.
뾰족한 꼭대기에 폭이 넓은 것이 보주형(寶珠形)에 가까운 모양인데,
두광(頭光)은 가운데 직경 3.5cm의 연꽃무늬, 그 주변에다 인동무늬를 새기는데
좌우 두 줄로 갈라져 원래는 불상이 붙어있었을 자리 양 옆을 평행으로 내려간다.
인동무늬를 새긴 줄 바깥으로는 전부 불꽃 무늬다.
저 광배가 발견되었을 때에, 학자들은 광배 뒤에 명문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永康七年歲次▨▨……,爲亡母造彌勒尊像祈福, 願令亡者神昇覺, 岸▨慈氏三會之○, 悟无生念究竟, 必杲菩提. 若有罪右願, 一時消滅, 隨喜者等, 同此願]
영강(永康) 7년 ▨▨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복을 비오니, 바라옵건대 돌아가신 분의 신령으로 하여금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 미륵님의 삼회(三會) 설법을 만나서, 첫 설법 때 무생(無生)의 법리(法理)를 깨닫고 구경(究竟)을 염(念)하여 보리(菩提)를 이루게 해 주소서. 만일 죄업이 있으며 이 발원으로 일시에 (모든 죄업이) 소멸되게 하옵고, 수희(隨喜)하는 모든 이들도 이 소원을 같이 하게 하옵소서.
이 불상의 제작 시기, '영강(永康) 7년'. 이것은 중국의 연호일까, 아니면 고려의 연호일까.
일본의 우메하라 스에이지(梅原末治) 같은 사람은 영강 연호는 동진(東晉) 시대의 것이고
영강 7년은 396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지만, 중국에서 '영강'이라는 연호는
후한 환제(桓帝: 167)·서진(西晉) 혜제(惠帝: 300~301)·후연(後燕) 모용보(慕用寶: 396~398)·
서진(西秦) 걸걸치반(乞乞熾磐: 412~419) 때에만 쓰였던 것이 기록으로 확인될 뿐,
동진 시대에 '영강'이란 연호가 쓰였다는 증거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김양선이나 김원룡 같은 학자는 영강 원호는 걸걸치반이 세운 서진(西秦)의 것이고
우리 나라 장수왕 6년(419)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久野建 같은 일본 학자는 장수왕 때는 이미 '연수(延壽)'라는 독자 연호가 쓰이고 있었고,
서진의 연호를 써줄 만큼 고려가 서진과 그리 긴밀한 사이였던 것 같지도 않으며,
황하 상류 병령사(炳靈寺) 169호 동굴에서 발견된 실제 서진의 불상과 광배는
이 불상보다 더 오래된 양식이므로 문제가 있다고 했다.
(왕 한 명이 연호를 무슨 껌 바꿔 씹듯이 세 개나 바꿔쓰기도 하던 시대에,
장수왕의 연호가 굳이 '연수' 하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게다가 저 불상은 '미륵존상'이잖아. 미륵이라면 중국에서도 5세기 말쯤에 이르러서야
용문석굴이 만들어지면서 거기서 석가상보다 미륵상을 더 많이 만들게 되었다는데,
광배가 제작된 시기를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보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영강은 중국의 연호가 아닌, 고려의 독자 연호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도유호라는 학자에 의해서 '영강고려연호설'이 일찍부터 제시되었고,
구체적으로는 양원왕 때의 것이며 그 7년은 평성왕 7년 신미, 서기 551년에 해당한다고 하며,
북한의 손영종 같은 학자는 간지의 첫 글자를‘신(辛)’으로 판독해서
평성왕 '7년'과 영강 '7년'이 통하며 양원왕 7년도 마찬가지로 '신미년'이니,
간지 첫 글자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남한 국보 118호인 금동미륵반가상. 평양의 광배는 저 불상의 것이었을까?>
물론 간지의 첫 글자가 과연 ‘신’인지는 내가 안 읽어봐서 모르지만,
북한이 주장하는 것은 이 금동광배의 제작양식을 통해 유추한 연대와도 통하는 곳이 있다.
즉 이 광배는 추정 571년작 경사년신묘명불상(景四年辛卯銘佛像) 광배보다는 낡은 양식,
추정 563년작 계미명불상(癸未銘佛像)보다는 좀더 신선한 양식으로 제작되었고,
그렇다면 6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저 광배하고 똑같은 곳에서 1940년에 출토된 것이 남한에 있다.
국보 118호 금동미륵반가상. 오늘날 저 광배와 불상을 두고
북한에서 발견된 금동광배는 남한의 국보 금동미륵반가상의 광배이다, 아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 하는 설이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금동미륵반가상이 만들어진 것은 6세기 후반,
만약 영강7년명광배가 정말 금동미륵반가상의 것이라면,
둘이 서로 한 몸이었다는 가정을 생각할 때에 광배가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는 주장과 일치한다.
'영강'이 평성왕 때의 연호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누군지, 돌아가신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위해서 저 불상을 발원한 사람은
틀림없이 효자일 거다. 안원왕 때와 마찬가지로 이 무렵 지방에서 속속들이 결성되고 있던
불교 신앙결사에서 주도해서, 식구 수대로 식구 단위로 불상을 만들었을 거란 얘기지.
이미 5세기 이후 고려의 불교가 점차 평양 이외의 다른 지방까지
점차 교세를 넓히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유물인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게 왜 불상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는 신라와 백제, 대가야의 삼국 연합군이 고려 남부를 공략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이때 고려의 승려 한 명이 신라로 망명했거든. 혜량이라는 승려인데
그가 신라군을 따라 고려를 떠나서 신라로 가버린 것은,
일찌기 신라의 젊은 무인과 맺은 인연 때문이었다.
시간은 아직 신라와 백제, 대가야 삼국 연합군이 고려 남쪽을 경략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居柒夫少, 跅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覘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惠亮問曰 “沙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鷰頷鷹視, 將來必爲將帥.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好者, 有如皦日.”]
거칠부는 젊었을 때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고 원대한 뜻을 품었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다. 문득 고려를 정찰하려고 그 땅에 들어갔다가 법사(法師) 혜량(惠亮)이 절을 개창하여 불경을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그 곳에 나아가 강경(講經)을 들었다. 어느 날 혜량이 묻기를
“사미(沙彌)는 어디서 왔나?”
하므로 대답하였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그 날 저녁에 법사가 그를 불러 만나니 손을 잡으며 가만히 말하였다.
“내 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자네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필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게지?”
“전 변방에서 태어나 여태껏 불도의 원리를 듣지 못했나이다. 법사님의 덕망과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온 것입니다. 법사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
“불민한 이 노승도 쉬이 자네를 알아보는데, 이 나라가 비록 작긴 해도 사람 알아보는 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나. 자네가 잡힐까봐 걱정돼서 은밀히 충고해주는 게야. 속히 돌아가는 게 좋을 걸세.”
거칠부가 돌아가려 할 때 법사가 또 말하였다.
“자네 상을 보아하니 제비 턱에 매의 눈이라, 장래 반드시 장수가 되겠구먼. 만약에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를 해치지 말아주게.”
“만일 법사님의 말씀처럼 법사님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못한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삼국사》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
혜량이 만난 신라의 거칠부는 신라의 왕족이자 귀척이었다.
그의 아버지 물력 이찬은 법흥왕 때에는 대등(大等)의 지위에 있었던 고위 관료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열세에 있었던 듯. 소지왕 때만 하더라도
꽤나 중요한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던 그의 집안이 지증왕의 치세를 거치면서
국왕 계승 후보는커녕 갈문왕 서열에서도 밀려나면서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에선 지배층의 경우에는 대개 자기 마음대로 출가하고 자기 마음대로 환속하고 그랬다.
이 더러운 놈의 세상 차라리 절에나 들어가자 하고 머리 깎고
중이 된 젊은 신라인을 알아보고 반겨준 고려의 고승 혜량 역시,
거칠부와 마찬가지 입장에서 동병상련의 처지를 느끼지 않았을까.
그것은 혜량 본인이 고려 내부의 정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람의
한 명이었던 까닭이기도 했다.(정말?)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 · 比台角湌 · 耽知迊湌 · 非西迊湌 · 奴夫波珍湌 · 西力夫波珍湌 · 比次夫大阿湌 · 未珍夫阿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惠亮法師, 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12년 신미(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湌)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에서 고현(高峴) 안쪽까지의 10개 군을 차지하였다. 이때 혜량법사가 자기의 무리를 이끌고 길거리로 나오니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 인사를 올리고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전날 유학할 때 법사님 덕택으로 목숨을 부지했는데, 지금 뜻밖에 서로 만나니 어떻게 보은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 하니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 정치가 어지러워서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으이. 나 좀 자네 나라로 데려가주게.”
이에 거칠부가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서 왕을 뵙게 하였다. 왕이 법사를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이때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이 시작되었다.
《삼국사》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고려에서는 불교가 종실과 귀척들의 후원을 받으며 발전했다.
그런데 그런 불교 교단을 후원하던 종실과 귀척들 사이에서
내부분열이다 대립이다 하고 쫙쫙 갈라지면서, 불교 교단 안에서도
서로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분열되고 대립되고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종교가 국가권력에 이용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못 볼 꼴이다.
중이면 중답게 염불이나 하고 부처만 모시면 그만이지
뭐하러 정치하는 양반들 도움은 받는다고 받는대.
하여튼 정치와 종교가 엮이면 종교는 저들 본연의 모습을 잊고
저런 더러운 추태를 보이기도 한다.
혜량이 거칠부에게 망명을 요청하는 대목에서 혜량은 고려의 정치가 어지럽다고 말했다.
그것은 안원왕 말년에 평양 궁성에서 일어났던 추군과 세군의 충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줄로든 둘 중 한쪽에 끈이 닿아있었다면, 그리고 그 닿아있던 끈이
승자인 추군이 아니라 패자인 세군 쪽이었다면, 혜량으로서는 상당한 피해가 아닐 수 없었을 터.
한강 상류의 국원성(충주)에 진주한 거칠부의 신라군을 따라
고려를 떠나 신라로 망명한 그는 이후 신라 불교 교단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신라의 모든 승려를 통괄하는 '승통'이라는 승직은 진흥왕 때에 최초로 창설되었는데,
그 승통을 맡은 것이 고려의 승려 혜량이었다.
그리고 혜량이 실시한 백좌강회와 팔관회는 이 무렵 진흥왕이 추진하던
'전륜성왕' 프로젝트에 사상적인 뒷배경을 제공해 주었다.
신라 이전에 이미 고려에서 시행되고 있었을 백좌강회라는 것이
《인왕경》이라는 불교 경전을 통독하는 법회였고,
이를 통해서 사방을 망라하는 전륜성왕의 위엄으로
자신의 정복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를 기원하며
진흥왕은 새로 정복한 인민들에게 전륜성왕인 자신에게 충성하라는 메세지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정작 《인왕경》 자체는 5세기 후반에 북위에서 저작된 위경이라서
고려에서 551년 이전에 백좌강회가 실시되었을지 여부를 의문스럽게 여기기도 하지만,
중국측 자료라고 항상 맞아떨어지란 법은 없으니까.
(게다가 왜 항상 우리가 중국보다 뒤처져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거지?)
혜량 이후로 백좌강회와 팔관회가 상시 개최되던 황룡사는 신라 최고의 대가람으로서
혜량 망명 이후 2년 뒤에 처음 짓기 시작해서 13년만인 566년에 완공되었는데,
절의 주지가 국통(승통)을 겸했다는 《삼국사》 잡지 기록에서 미뤄보건대
혜량은 말년에 이 절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 황룡사에 고려적 색채가 진하게 배어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황룡사의 가람배치만 보더라도 탑을 가운데 두고 세 개의 금당을 두는 1탑 3금당 방식.
탑을 둘러쌌느냐 안 쌌느냐의 여부만 다를 뿐이지 고려의 정릉사와 같은 구조다.
황룡사 건축에 사용된 축척 역시 고려척이다.
그렇게 보면 한 나라의 문화가 남기는 영향은 군사적인 영향보다도
더 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주 벌판을 주름잡던 고려도,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몽골제국도 결국 한때의 역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들이 전한 문화는 면면히 오늘날까지도 그 후손들에게,
그리고 그들과 교류했던 주변 이웃 국가들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불교의 이치에 따른다면 결국 모두 사라져 없어지고 말겠지만,
온유함이 때로는 딱딱함보다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은
군사적인 힘보다도 문화적인 힘이 더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후대까지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 任那也.>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이 해(552)에 백제의 성명왕이 친히 자국과 두 나라<두 나라란 신라와 임라를 말한다.>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쳐서 한성(漢城)을 되찾았다. 또한 진군하여 평양을 쳤다. 모두 여섯 군의 땅을 회복하였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12년(552)
하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러한 '군사문화의 폐기'라는 꿈같은 소리를 바라기에는 너무도 시기상조겠지.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가을 9월에 돌궐(突厥)이 신성(新城)으로 와서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백암성(白巖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왕은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돌궐은 곧 투르크, 저 머나먼 서쪽의 땅에서 온 자들.
《주서》에서는 흉노의 별종이라고 소개된 이들은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한 철륵의 하위 부족으로서,
원래는 흉노의 지파인 유연(柔然)에 복속되어있던 것이
차차 세력을 쌓으면서 역사에 그 이름을 드러냈으며,
마침내는 유연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와 만주 변경에 걸치는 제국을 이루며
수나 당과도 대치하게 되었다.
중국측의 기록에 보면, 돌궐족의 선조는 사람과 늑대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이라 했다.
아사나(阿史那)라는 성을 가진 열 살 짜리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녀석은 암놈 이리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이리의 모습을 가장한 여자아이는 아니었을지)
이리가 크게 자라면 새끼를 치게 했는데,
이웃의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 이리들을 죽이려 했다.
아사나는 이리들을 이끌고 지금의 타르파스가한 지역인 고창국(高昌國) 북쪽,
오늘날 알타이 산이라 부르는 금산(金山)ㅡ아미태산(阿彌泰山)에 숨었다.
그곳에는 평탄하고 고운 흙이 깔린 바닥에 풀이 무성한 동굴이 있었고,
수백 리에 달하는 산맥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아무도 쉽게 들어오지 못할 곳이었다.
그 뒤 이리는 열 명의 아들을 낳았고, 아들들은 장성하여 각기 성을 하나씩 가졌다.
그 중에서 사내아이의 성이던 '아사나'를 쓰던 자손이 번창해 점차 수백 가구로 늘어났고,
오랜 세월이 흘러 그 동굴를 떠난 그는 여여(茹茹)의 철공(鐵工)으로서
아미태산 남쪽에 정착했다. 그 산의 생김새가 마침 '두무(투구)'를 닮았었는데,
사람들이 '투구'를 가리켜 부르던 '돌궐(突厥)'이라는 말을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ㅡ
라는 것이 돌궐이라는 종족의 내력이다.
(몽골족이 스스로를 '푸른 늑대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옛 전설과 맞닿아 있는 건지도.)
돌궐은 서양에서는 '투르크'라고 불렸는데, 오늘날 '터키'라는 국명은 거기서 유래했다.
(터키의 전신이 이슬람계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임)
6.25 때 터키는 UN군의 일원으로 우리 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했는데,
지금이야 우리 나라에서 터키를 우리 우방이니 혈맹이니 하며 우호를 강조하고
터키 국사 교과서에서도 고려를 투르크의 형제국으로 가르치고 있다지만,
사실 우리와 터키는 처음에는 '친구'나 '우방'이 아닌 '적'으로서
그 역사적인(?) 첫만남을 떼었다. 신성과 백암성에서,
우리는 그들의 아들 1천을 죽이고 또 포로로 삼았었지.
그랬다.
우리는 그들의 적이었고, 저들은 우리의 적이었다.
초원과 바다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형제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이리의 후예와 곰의 후예가 만주 벌판에서 벌였던 처절한 야수의 싸움도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그저 지나가버린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차가운 벌판에 쏟아내린 피는 초원의 건조한 바람에 마르고 또는 강물에 씻겨 쓸려가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천년에 또 5백년을 더해,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나 터키 사이에 이렇다 할 앙금이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옛날의 이 전역을 두 나라 모두 기억 못하는 것이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한 하늘의 처방인지도 모른다.
<진파리 1호분. 고흘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의 진파리 1호분은 고흘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는 곳이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내가 알 길은 없지만,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들은 일단 솔밭에 꽃잎이 흩날리는 그림들.
남자의 무덤에 그려넣는 그림 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준다.
북한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고려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던,
수만 가지 꽃들이 만발하고 사시사철 시원한 바람이 불며,
오색의 구름과 꽃보라가 흩날리는 향긋한 향기로 가득한 이상세계,
천수국(天繡國)이라 불리는 하늘 세계로 죽은 자를 인도하기 위한 소원의 투영이
벽화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록 살아서는 처절한 전장을 누비며 피 튀기는 싸움 속에 살았지만,
부디 죽어서만큼은 그런 이상의 세계, 전쟁도 없고 다툼도 없는
하늘에서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는
고려인들의 마음이 벽화라는 이름으로 구현되었다고 말이다.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것은 전쟁 영웅에게 해줄 수 있는 또다른 의미의 예우이며,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최고의 기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탁의 사바, 진에의 세계, 고통과 거짓, 꿈과 환상의 연속인 이 세상을 떠나
겨우 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죽음은 오히려 축복이고 안식이며 평안이다.
고흘이라는 장수가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돌궐인을 죽였다 해도,
그 자신이 정작 그런 것을 즐겼는지 어땠는지도 우리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죽어서까지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면
그만큼 지루하고 고된 일이 또 있을까.
삶 속의 고단한 일상에서 영원히 풀려나기 위해 죽음이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벽화에 나타난 고려인들의 모습은 지극히 불교적이고, 내세적이다.
현세에서 괴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해도 내세에서만은 부디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고대인들의 단순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소망을 고려인들은 고스란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말인데, 그런 세상이라면 나도 한번 꼭 가보고 싶다.
이 지루한 세상이 끝나고 하늘에 오르는 날이, 내 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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