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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6>제24대 양원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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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성왕 무렵의 한반도 정세는 일단, 고려와 백제가 다시 충돌하려 하고 있었다. 백제의 성명왕은 수도를 사비도성으로 옮겨 국호를 남부여라 바꾼 것을 계기로 나라를 일신하고자 했고, 옛날 금관가야나 왜와 맺었던 남방해양동맹을 다시 재건하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니혼쇼키》에서 기록한 이른바 '임나재건'이 바로 그것인데, '임나' 즉 옛 백제와 가라 제국 사이의 연결통로이자 가라 제국의 '총 의견수렴소'를 백제 주도로 다시 회복시켜 가라 제국을 다시 백제의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는 체제를 복구하고자 애썼다. 모두가 고려에 대한 복수전을 위한 준비였다.

 

하지만 고려의 힘을 이미 겪어본 적이 있는 가라 제국으로서는 다시 고려와 백제의 싸움에 휘말리고픈 마음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백제를 자신들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위협하는 주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특히나 가라 제국 가운데서도 백제에게 적대적이었던 안라는 당시 왜가 임라에 파견해 주둔시키고 있던 왜신관(일본부)와 짜고, 가라 각국에서 파견된 요원인 '임나집사'를 갖은 핑계를 다 대며 백제에 못 가게 막거나, 백제가 가라 지역에 주둔시킨 군사 지도자들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등 백제의 '임나재건'을 어떻게든 막으려 애썼다. 그리고 신라 역시 백제의 이러한 시도들을 그저 조용히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四年, 春正月, 以濊兵六千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4년(548) 봄 정월에 예(濊)의 6천 군사로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예(濊)라고 하면 아마 강원도 지역 같은데, 그 무렵에는 아직 신라의 영역이 경상도 일대를 벗어나지는 못한 터였으므로,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잇달아 재위하며 확보한 강원도 지역에서 군사 6천을 내었다는 것이리라. 한강 유역을 상실한(?) 상황 속에서, 독산성은 백제가 한강 북쪽에서 유지하고 있었던 유일한 거점이었기에, 백제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지켜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백제의 독산성을 쳤는데, 하필 신라가 끼어드는 바람에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계획은 무산된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548) 봄 정월에 고려왕 평성(平成)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하여 갑병 3천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려군과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삼국사》 권제26, 백제본기4, 성왕 26년(548)

 

서력 548년의 독산-마천성의 전투는 한반도의 모든 세력이 서기 400년 이래로 다시 한번 충돌한 전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려와 백제의 충돌에서부터 시작된 이 싸움은, 백제가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끌어들여 삼파전으로 가는 듯 보였고, 나중에는 백제에게 적대적이었던 안라국(함안)이 고려에 독산성 공격을 주청한 것이 계기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본의 아니게 고려와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안라)가 독산성에서 모인 것이다. 《양서》에 보면 이 해 3월 갑진에 무동장군(撫東將軍) 고려왕이었던 고연(高延)이 졸하여 그의 아들을 영동장군(寧東將軍) 고려왕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해동역사》에는 안원왕의 죽음을 이 때에 와서 고한 것이라고 적었다. 안원왕이 죽은 것이 545년이니 꼭 3년만에 그 죽음을 고한 것이다. 3년상의 흔적이다.

 

[九年夏四月壬戌朔甲子, 百濟遣中部柾率掠葉禮等奏曰, "德率宣文等奉勅至臣蕃曰, '所乞救兵應時遣送', 祗承恩詔, 喜慶無限. 然馬津城之役<正月辛丑, 高麗卒衆圍馬津城>, 虜謂之曰, '由安羅國與日本府招來勸罰罰.' 以事准況, 寔當相似. 然三廻欲審其言遣召, 而並不來, 故深勞念. 伏願, 可畏天皇<西蕃皆稱日本天皇爲可畏天皇>, 先爲勘當. 躄停所乞救兵, 待臣遣報." 詔曰, "式聞呈奏, 爰覿所憂. 日本府與安羅不救隣難, 亦朕所疾也. 又復密使于高麗者, 不可信也. 朕命卽自遣之. 不命何容可得, 願王開襟緩帶, 恬然自安, 勿深疑懼. 宜共任那依前勅, 戮力俱防北敵, 各守所封. 朕當遣送若干人, 充實安羅逃亡空地.]

9년(548) 여름 4월 임술 초하루 갑자(3일)에 백제가 중부한솔 약엽례 등을 보내어 아뢰어 올렸다.

"덕솔 선문 등이 칙언(왜왕의 말)을 듣고 신의 나라에 와서 '청한 바 구원병은 필요한 때에 보낼 것이라 했다'라 하였소. 삼가 고마운 말씀을 듣고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그러나 마진성(馬津城)의 싸움<정월 신축에 고려가 병사를 거느리고 마진성을 포위했다.>에서 포로가 말하기를 '안라국과 일본부에 초빙되어 와서, 권하여 친 것이 원인이다'라고 하였소. 상황으로 봐서는 그럴 듯한 것이라 생각되오. 그러나 그 말을 상세히 밝히려 세 번 불러도 오지 않으니, 이를 깊이 마음에 두고 있소. 엎드려 바라건대 가외천황(可畏天皇)<서번은 모두 일본의 스메라미코토를 칭할 때에 가외천황이라 칭했다(?)>께서는 먼저 잘 살펴 보시오. 청한 바 있는 구원병을 보낼 것을 잠시 동안 멈추고, 다시 알릴 때를 기다리시오."

조하여 말하였다.

"가지고 온 주문(奏文)을 보고 이에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부와 안라가 이웃의 재난을 구하지 않은 것은 짐이 상심한 바. 또한 고려에 밀사를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일. 짐이 명하였다 하면 스스로 보낼 것입니다. 명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왕께서는 옷깃을 열고 허리띠를 너그러이 하시어, 조용히 안심하여 깊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임라와 함께 먼저 말한 대로 힘을 합쳐 다같이 북적을 방어하고 각자의 영토를 지키소서. 짐은 약간의 군사를 보내 안라가 도망친 빈 땅을 채울 것이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9년(548)

 

그러니까 정말 안라가 백제의 '임라재건' 시도를 좌절시키려고 고려에까지 손을 뻗쳤는가? '아니다'라기보다는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쪽이 더 정확한 답변일 것이다. '고려와 안라의 밀통'이라는 정보 자체가 고려군 포로에게서 나왔다고 했는데, 그 포로가 어느 지위에 있었는지는 《니혼쇼키》에 기록되어 있지가 않다. 6세기까지 고려와 안라가 서로 '누구?'하고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겠고,명색이 밀통인데 누가 언제 어떻게 만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려고 했는지 그걸 발설할 리가 없지. 밀통으로 고려를 끌어들인 안라였으니 백제 눈치를 보느라 고려군과 함께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고. 중요한게 뭐냐면 백제가 가라 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소위 '임라재건'을 추진하는 과정 중에서 가장 의심하던 것이 '안라'라는 존재였다는 거다. 적어도 그 전부터 백제와 안라 사이의 갈등은 깊었고, 백제가 혐의를 가질 정도의 정황도 충분히 있었고, 안라가 백제의 영향을 배제하려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는 것을 저 기록은 보여주고 있다. 그 와중에 백제의 적국인 고려까지 끌어들이려 할 정도로.

 

[秋九月, 丸都進嘉禾. 遣使入東魏朝貢.]

가을 9월에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4년(548)

 

평성왕을 즉위시킨 것은 추군가였지만, 그 추군이 국내성파였는지 평양성파였는지는 좀 헷갈린다. 환도라고 하면 국내성파 전통귀척에 속할 텐데, 나중에도 보이겠지만 이들은 나중에 평성왕에게 반역하다가 주살된다. 그렇다면 추군은 국내성파가 아닌 평양성파로 봐야 할까? 평양성파라면 분명 남쪽에 대한 정책을 좀더 중시했을 테니, 안라와 짜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려 했다는 말과도 어느 정도 아귀가 들어맞기는 한다만.

 

[五年, 遣使入東魏朝貢.]

5년(549)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549년, 고려가 동위에 조공을 보낼 그 무렵.

백제에서는 후경(侯景)이라는 자가 일으킨 난으로 양이 어지러운 줄도 모르고

건강(남경)에 사신 보냈다가 사신이 장엄사에 억류당했고,

신라는 양의 사신을 따라온 입학승 각덕(覺德)이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고 있었다.

사는 곳은 물론, 하는 말과 살아가는 방식, 지금까지 살아온 풍속 모든 것이 다른 이 동아시아를

하나로 이어준 또 하나의 매개는 서역에서부터 전파된 불교라는 이름의 이방종교였다.

 

단순히 이방의 종교였기에 현지의 이해관계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하면

우스운 이야기겠고, 단순히 그들의 권위를 높이려던 집권층들의 시녀 노릇이나 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말과는 다르게,

불교는 이 무렵 동북아시아의 '국제종교'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고,

집권층뿐 아니라 피지배층들에게까지 '자비'라는 이름의 새로운 희망을 가르쳐주었다.

아울러 욕망에서부터 비롯된 이 세상 인간의 삶 속 모든 투쟁은

결국 그 끝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라는 진리와 함께.

 

고려와 동위, 백제와 신라와 가라와 왜, 그리고 양이라는 남북대치 상황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대치를 넘어 불교는 퍼져나갔다.

국경이나 파수병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높은 산과 깊은 바다도 불교라는 하나의 사상,

그 거대한 가르침의 전파는 막지 못했다. 불교가 말하는 교리 안에서, 중국 남북조뿐 아니라

해동 4국이라는 각 나라들의 다툼은 참으로 부질없고, 가소로웠다. 

 

<평안도 평원 원오리 절터에서 발굴된 소조불상. 연가7년명금동불상처럼 불교 신도들의 '결사'를 통해서 다량 제작되었다.>

 

진흙으로 만든 불상을 소조불상이라고 하는데, 이 불상의 경우에는 거푸집,

그러니까 틀에다 찍어서 대량으로 만들고 색칠도 했다. (평양에서 이걸 만들 때 썼던

거푸집이 발견되면서 그걸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절터에서는 여래입상 204점,

보살상이 108점 정도 수습됐다는데, 다 깨지고 부서지고 해서 완전한 것은 몇 개 없었다고.

네이버 백과사전 설명을 들어보자면 이 불상에서는 당대 귀척들의 기품이나 취향이 엿보인다는데,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하긴, '고려'라는 나라의 이미지에 맞지 않게 부드러워보이긴 하네.



연가7년명금동불상은 '현겁천불' 신앙에 뿌리를 두고 승려들과 재가신도들이 공동으로 돈을 추렴해서 만든 천개의 불상 가운데 하나라고 예전에 얘기를 했었다. 원오리 소조불 즉 진흙불상들도 '현겁천불'신앙에 근간을 두고 만들어진 불상들인데, 그 시기는 대체로 서기 550년을 전후해 6세기 초엽이나 중엽쯤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을 만들 때에도 신도들의 종교적 믿음, 공통된 신앙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진 '결사'가 주도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어떤 공통의 목적과 의도를 갖고 모인 사람들이 푼돈을 추렴해서 목돈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모은 자금을 공통의 목적에 쓰고자 만든 모임을 '계(契)'라고 부르는데,이는 신라 때의 '향도(鄕徒)'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하지만 지금 고려의 이 불상을 두고 보자면 신라보다도 훨씬 더 이전까지 그 시원을 소급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형태의 '결사'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존재했다. 의읍(義邑)이나 법사(法私), 일본의 강(講)의 경우처럼.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만을 위해서 모인 것만이 아니라 구성원간의 경조사나 재난구제 같은 것에도 개입해 구제하고 지원해주는 기능도 담당했다는 것도 똑같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록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향도는 《삼국사》에 나오는 김유신의 용화향도(龍華香徒)인데, 문무왕 13년(673년)에 백제 유민이 모여 '계유명삼존천불비명(癸酉銘三尊千佛碑銘)'을 남긴 경우도 향도의 범주에 속할수 있겠다.

 

아무래도 불교신앙을 매개로 뭉쳐진 조합이다 보니 불상·종·석탑·사찰의 조성 또는 법회·보시·매향(埋香) 등에 대규모적인 노동력과 경제력 등의 제공을 매개로 하는 불교신앙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규모상 가장 소규모가 20명, 많을 때는 3000여 명까지도 가곤했다. 고려 때인 982년 현풍에서 조직된 향도는 불교신앙과 함께 재래의 악신(岳神)신앙과도 연결된 모습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공동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향도는 고려 후기에 이르면 조직과 성격이 다양화되어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향도가 나오기도 하고, 단순히 불교적 기념물 조성에만 치중하지 않고 재회(齋會)·소향(燒香)·매향·염불·상호부조행위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재래의 불교신앙 활동보다 향촌공동체적인 모습이 더 부각되는 경향은 조선조에 이르면 더 두드러진다. 자연촌을 기반으로 조직되고 회음의식(會飮儀式)·장례시의 부조행위 등이 주된 활동이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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