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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8>제24대 양원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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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과 대성산성. 고려는 전투용과 생활용으로 성곽을 나누어 쌓았다.>

 

고려의 방어체계는 추모왕이 처음 수도를 정한 이래로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평평한 땅에 지은 '생활용' 평지성, 그리고 산을 따라 쌓은 '전쟁용' 산성.

고려인들은 전쟁이 없을 때에는 '생활용' 평지성에서 룰루랄라 살다가,

전쟁이 터지면 곧바로 평지성을 떠나서 산성으로 옮겨서 농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적군이 돌아가려 할 때에 그 후미를 기습해서 작살내는 것이 여지껏 고려가 목숨을 보전해온,

근 5백년을 이어온 전술이었겠다마는.....

이 전술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헛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력 551년의 평양성 전투가 그것을 보여준다.

 

이미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평지성과 전쟁용 산성을 따로 만들었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평지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가서 싸우는데,

산성에서 버티는 동안 평지에 남겨진 평지성이 유린당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혹여 적이 물러간 뒤에라도, 새로 평지성을 수리하느라 또다시 국력을 소모하게 되고,

그만큼 기회비용이 줄어든다. 전후 복구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에서,

혹여 적군에게 약탈당했을지도 모르는 고려의 평지성과 왕궁을 다시 재건하는데

소모되어야 하는 만큼의 비용을, 장안성은 절감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지성(왕궁)과 산성의 기능을 하나의 성에 모두 동시에 갖출수 있게 되니까.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야 할 만한 긴장된 상황도 있었다.

 

대가라와 왜, 신라까지 끌어들여 4국 연합군을 형성한 백제의 명농왕은

대번에 한강을 넘고 수곡성을 지나 고려의 수도가 있던 펴라까지 밀고 올라왔고,

고려의 태왕은 '왕궁 담을 넘어 도망갔다'고 표현해놓은 대로 안학궁을 버리고 대성산성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성산성에서 고려군이 농성을 벌이는 동안 안학궁은 적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오오토모노 사데히코가 이끌던 왜병은 백제군의 묵인 하에 닥치는 대로 안학궁을 약탈했다.

태왕이 거주하는 내전에 쳐두었던 휘장과 비단 보료는 물론이고,

안학궁 처마에 올려져 있던 망새(치미)까지 긁어갖고 돌아왔다고 했으니,

대궐이 얼마나 크게 작살났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 마지막으로 '엿이나 먹어라'하고

대성산성의 고려 종실과 귀척, 대족과 군사들이 보란 듯이 황궁에 불을 지르고 가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나 다 치르던 수순이다.

 

비록 군사적으로야 크게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고 해도,

왕궁이 불타버렸는데 그걸 무슨 수로 또 지을 건가. 

지금처럼 포크레인이 있나 시멘트가 있나 추모왕 때처럼 안개가 이레 동안 끼었느니 하다가

갑자기 뚝딱 지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짓는데 들어가는 돈만 해도 당시로서는 엄청났을 것이고

그렇게 다시 짓는다고 해도 백제군이 이런 식으로 펴라까지 밀고 올라온 이상

언제 또 쳐들어오지 말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

지어놓으면 불지르고, 지어놓으면 불지르고, 지어놓으면 불지르고, 지어놓으면 불지르고.....

나같애도 피곤할거야.

 

양원왕 7년에 해당하는 태세 신미(551년)는 명실공히 6세기 고려의 파란(波亂)의 역사,

태왕의 즉위 기간 동안 가장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던 해였다.

남펴라도 아니고 고려의 본경(本京) 펴라가 공략당한 것은 고려인들에게는 퍽 충격이었던 듯.

백제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해왔을 것이다.

고려의 숙적 백제를 막을 수 있는 보다 획기적이고 효율적인 방어 시스템이 필요한 상황.

장안성은 그런 고려가 고심 끝에 내놓은 방어책 가운데 하나였다.

 

[八年, 築長安城]

8년(552)에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이때에 쌓았다는 그 장안성이, 오늘날 평양 시가지를 만든 그 성,

우리가 흔히 '평양성'이라 부르는 바로 그 성이다.

후대에 일부 수리한 것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지어질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백제 때문에 지었다'고 하면 쪽팔리고(백제 떨거지라는 뜻의 '백잔'이라고 깔보던 나라였으니),

'신라(실은 백제)가 침공해 10성을 빼앗아갔다'는 그 해 바로 다음에 장안성 축조 기사 같은 것을 실어놓으면

그걸 읽는 독자들이 '백제 때문에 지었구나'라고 대번에 눈치채지. 독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침공을 당한 바로 이듬해에 도성을 다시 쌓을 생각까지 한 걸 보면 확실히,

고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중원의 어떤 왕조보다도 단연 백제였던 듯.

하지만 아직은 '장안성'이라는 이 성이 그리 부각될 위치까지는 안 갔으니까,

나중에 장안성으로 천도한 이야기 할 때에 천천히 다루기로 하지 뭐.

 

여기서 고려는 또 한 가지 수를 쓰기로 한다.

백제의 신(新) 남방해양동맹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해있던 신라를 고려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마침 신라는 이때 백제의 고려 협공 제의를 거절한 뒤였고, 고려는 서둘러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려를 치자 하니 진흥이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려의 멸망을 바라겠소."
그리고 이 말이 고려에 전해졌다. 고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지내니,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1, 진흥왕

 

누가 먼저 화친을 제의했을까. 진흥왕일까 아니면 평성왕일까.

명색이 그래도 '밀약'인데 누가 먼저 '하자'고 손 내민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사실이 되랴.

병법이란 적의 빈틈과 상처를 노려 그걸 비집고 들어가 더 악화시켜 놓는 것인데.

저 기록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는 여기서, 백제와 신라의 사이가 흔들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고려의 노련함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백제가 그토록 왜에, 대가라에, 그리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고자 했는지.

 

가령 반에 내가 기분나쁘게 생각하는 녀석이 하나 있다고 친다. 힘이 세서든 싸가지가 없어서든, 찌질해서든,

어떤 이유로든 내가 저 녀석을 괴롭히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반에는 그녀석과 나 단 둘만이 있는게 아니다. 다른 애들도 많다.

다른 애들을 우선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저 녀석의 안 좋은 점을 시시콜콜 얘기해주고

'이러이러해서 질이 안 좋으니 저 녀석하고는 놀지 마'라고 말을 해줘야

'그랬나?'하고 다들 생각이라도 할 것이고, 정말 내 편을 들어줘서 그 녀석과 안 노는 애가 나올 것이다.

 

백제는 한반도 안과 중국 대륙, 그리고 일본 열도까지 갔다. 우리 반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반에까지 가서

고려라는 녀석의 단점과 치부를 까발리면서 '이러이러해서 안 좋은 놈이야 놀지 마'라고 자기 패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고려를 이 한반도, 나아가 전 동아시아 사회에서 따돌리는데 있었으니까,

설령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를 끌어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려의 우방을 없애는 정도의 성과는 거둘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백제는 충분히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애시당초 신라나 임나10국(가라 제국),

왜와 남조에까지 누차 사신을 보낸 것도 모두 고려를 한반도 안에서라도 고립시켜보자는 작전이었다.

(그래야 내가 마음 편하게 고려를 때리고 괴롭힐 수 있으니까)

 

이것은 거꾸로 고려에게 백제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 그리고 백제가 이 한반도 안에서

고려와도 호각을 겨룰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해 있었던 사실을 말해주는 반증이다.

사실 내가 힘이 없고 사교술이 좋지 않았다면, 그 녀석을 반에서 따돌리자는 생각에 동의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니가 뭔데?' 하고 내가 반대로 따돌림당할 수도 있다.

설상가상 그 녀석이 내게 없는 힘과 사교술을 갖고 있다면 그땐 전학가든지 학교를 그만두든지 해야겠지.

아마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과 작당하고 따돌리자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게 자기 분수에 맞는 짓일 거다.

 

결국 이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주적은 중원의 어떤 왕조보다도

자신을 이 동아시아에서 놀아주는 이 하나 없는 땅거지 외톨이로 만들려고 혈안이 된 백제였고,

같은 부여계에서 갈라져 나온 동족이면서도 선대 고국원왕을 남펴라에서 전사시킨 장본인이자 원수,

마음만 먹으면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만들 경륜과 노련한 외교술을 지닌 백제를 쓰러뜨리는 것 자체가

고려에게는 중원의 어떤 왕조를 복속시키는 것보다도 더 가치가 있었다ㅡ

아니, 백제를 멸하는 것 자체가 중원 획득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今年忽聞, 新羅與狛國通謀云, '百濟與任那頻詣日本. 意謂是乞軍兵伐我國歟. 事若實者, 國之敗亡可企踵而待. 庶先日本兵未發之間, 伐取安羅絶日本路.']

올해에 문득 들으니, 신라와 맥국(고려)이 공모하여 '백제와 임나는 자주 야마토에 드나든다. 이는 군사를 청하여 우리 나라를 치려는 것 같다. 사실이라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다. 야마토의 병사가 미처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쳐서 야마토의 길을 끊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ㅡ백제가 보낸 왜병 증원파병에 대한 요청서,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14년(553) 8월 신묘 초하루 정유(7일) 中

 

허나 고려도 바보는 아닌 것이, 백제와 신라 두 나라 사이에 생긴 틈을 적절하게 이용해 먹을 줄도 알았다.

아무리 전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라곤 해도, 적어도 '선생님한테 일러바쳐줄' 증인 하나만 만들어놓고 보면 

나중에라도 그 녀석을 응징하고 자신이 살아남을 길이 생기는 법이다.

마침 신라는 백제에게 나름 불만이 쌓여 있었다. 백제의 동맹국으로서 임나나 왜에 비하면 좀더 대등한 입장으로,

'4국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고려를 공격하고 펴라를 치는 데에 도왔건만, 백제는 신라에게 지분을 할당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엉뚱한 왜병을 더 증원해서 고려에게서 수복한 자신들의 땅을 독식하려고만 들었다.

젠장, 젠장 하면서 혼자 손가락만 빨고 있던 신라는 자연스레 고려를 떠올리게 된다.

고려로서도 백제의 동맹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와 신라 두 나라에게 싸움을 붙여 고려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게 만든 뒤에

서둘러 미뤄둔 내정이며 외치를 신경쓰자고, 하는 것이 고려의 계획이었다.

 

《문헌통고》를 보면 이 해에 북제 문선제는 북쪽으로 거란족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했는데,

그 뒤에 거란족은 다시 돌궐의 핍박을 받아 1만여 가를 거느리고 고려에 더부살이하며 살았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10년(554) 겨울에 백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니혼쇼키》에 보면 이것은 55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에 맞춰 554년의 일로 수정했다.

이 해 백제의 성명왕은 신라의 배신에 대한 보복전으로 위해 태자 부여창을 시켜 신라의 관산성ㅡ

지금의 옥천 땅을 쳤고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이것까지는 좋았는데, 불과 5천의 군사만 데리고

부여창이 있는 구타모라 성채로 향한 것이 명농왕의 실수였다. 신주(한강 유역)에서부터 증원군을 이끌고 온

신주군주 김무력(금관가라 구형왕의 막내아들)의 매복에 걸린 것. 성명왕은 이 싸움에서 측근이었던

4명의 좌평과 함께 삼년산성 성주에게 죽고, 태자 부여창이 뒤를 이어 위덕왕으로 즉위한다.

 

[冬十月庚寅朔己酉, 百濟王子餘昌<明王子, 威德王也>, 悉發國中兵, 向高麗國, 築百合野塞, 眼食軍士. 是夕觀覽, 鉅野墳腴, 平原瀰迤, 人跡罕見, 犬聲蔑聞, 俄而○忽之際, 聞鼓吹之聲. 餘昌乃大驚, 打鼓相應. 通夜固守. 凌晨起見曠野之中, 覆如靑山, 旌旗充滿. 會明有着頸鎧者一騎, 揷鐃者<鐃字未詳>二騎, 珥豹尾者二騎, 幷五騎, 連轡到來問曰 "少兒等言, 於吾野中, 客人有在, 何得不迎禮也. 今欲, 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百濟反問, 亦如前法, 而對答焉. 遂乃立율而合戰. 於是, 百濟以鉾, 刺墮高麗勇士於馬, 斬首. 仍刺擧頭於鉾末, 還入示衆, 高麗軍將, 憤怒益甚. 是時, 百濟歡呼之聲, 可裂天地. 復其偏將, 打鼓疾鬪, 追却高麗王於東聖山之上.]

겨울 10월 경인 초하루 기유(20일)에, 백제의 왕자 여창(餘昌)<명왕(明王)의 아들이며 위덕왕이다>은 나라 안의 군사를 전부 일으켜 고려에 가서 백합야(百合野)의 요새를 쌓고, 병사와 함께 먹고 잤다. 저녁에 멀리 바라보니, 넓고 기름진 언덕과 평평한 들에 인적은 드물고 개 짖는 소리도 끊어졌는데, 홀연히 극히 짧은 사이에, 북과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여창은 크게 놀라 북을 치며 대응하며 밤을 새워 굳게 지켰다. 새벽에 일어나 광야를 보니, 푸른 산을 덮은 듯 깃발이 가득하였다. 밝을 무렵에 머리 부분에 갑옷을 입은 자가 한 기(騎), 징을 가진 자<징은 미상이다>가 두 기, 범꼬리를 머리에 꽂은 자가 두 기, 합해서 다섯 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나와서 말하였다.

"부하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왔다' 했노라. 마중하여 예(禮)로서 대하지 않으면 안되리니, 원하건대 나와 예로서 응답하는 자의 성명과 나이와 지위를 속히 말하라."

여창이 대답하였다.

"성은 같고, 지위는 간솔(杆率), 나이는 29세다."

이어 백제 쪽에서 물으니 전의 법도에 따라 대답하였다. 그래서 깃발을 세우고 교전하매, 백제는 창으로 고려의 용사를 말에서 찔러 끌어 내려서 목을 베어, 머리를 창끝에 꽂아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의 장병이 격노하였다. 이때 백제의 환성이 천지를 흔들었으며, 그 부장들이 북을 쳐서 격렬하게 싸워 고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로 퇴각시켰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14년(553)

 

이건 뭐, 삼국지식 맞짱이냐. 일기토가 아니고 5기토구만.

《니혼쇼키》에 기록된 이 기록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는 조금 그렇지만,

어쨌거나 그때 이런 식으로 싸움이 벌어졌었다.

백제 웅천성을 공격했던 고려의 군사들이 오히려 백제 왕자 여창이 이끄는 군사들에 의해, 동성산까지 밀려났다고.

 

[十二月晦, 日有食之, 無氷.]

12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10년(554)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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