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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5>제24대 양원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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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군과 세군, 두 외척 집안의 '안학궁 궁문의 싸움'은 사실 고려의 왕실 내부다툼만이 아니라 구세력과 신진세력간의 충돌이기도 했다. 구도(舊都) 환도성과 국내성을 기반으로 하는 구귀척과 신도(新都) 평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귀척 세력이 고려 조정의 세력 판도를 놓고 벌인 정쟁이 무력충돌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안학궁 궁문에서의 싸움이었는데, 다만 추군과 세군 둘 중에 어느 쪽이 구세력이었다 신진 세력이었다, 국내성파였다 평양성파였다의 여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고려 왕실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지 겨우 백년도 못 되어 왕실의 권위가 형편없이 떨어지고, 강한 무력을 지닌 귀척들이 대두하여 왕위 계승을 좌지우지하는 등, 고려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평성왕(양원왕)은 그 두 외척의 집안 싸움 끝에 즉위했다.

 

[陽原王, 或云陽崗上好王, 諱平成, 安原王長子. 生而聰慧, 及壯雄豪過人. 以安原在位三年, 立爲太子, 至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양원왕(陽原王)<혹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평성(平成)이고 안원왕의 맏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기개가 크고 호탕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안원왕이 재위 3년에 태자로 세웠고, 15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백제본기》 인용 《니혼쇼키》 기사대로라면 평성왕은 즉위 당시 여덟 살. 《삼국사》에서 평성왕의 태자 책봉이 안원왕 재위 3년이었는데, 545년에 즉위한 평성왕의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고 잡고 그의 탄생년도를 계산하면 545-8=537. 안원왕 재위 3년은 서기 533년으로 이 무렵이면 아직 평성왕은 뱃속에도 없었는데,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태자로 봉했단 말인가? 대체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는 거지? 정말 《백제본기》 기사처럼 여덟 살로 즉위했다면, 안원왕의 중부인이 모후로서 섭정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외척인 추군가가 권력을 쥐었을 것인데, 태자로 봉해졌다는 때와 태어난 해 사이의 4년 공백은 무슨 수로 설명할수 있을까. 어쩌면 추군가 쪽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태자로 책봉된 시기를 실제보다 좀더 앞당기려다보니 오류가 생긴 것이 아닐까? 아니면, 안원왕은 이미 재위 11년에 죽어있었는데, 그걸 먼저 안 추군가 쪽에서 미리 어린 왕을 세워놓고 4년 동안이나 쉬쉬하다가, 세군가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안학궁 대궐 앞에서 두 집안이 맞붙어 싸우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른 것은 아닐까? 《삼국사》나 《니혼쇼키》 속에 인용된 《고기(古記)》와 《백제본기》 둘 중 어느 하나는 잘못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것이다.

 

부식이 영감은 너무 황당하고 신비롭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편찬자료였던 《고기》 내용을 거의 토씨 하나 빠뜨리는 일 없이 본기에 있는 그대로 적어넣었고, 《니혼쇼키》도 자기네 천황의 신성성 광고를 위해 과장하거나 부풀리고 혹은 뜯어고친 내용 투성이지만, 《백제본기》나 《백제기》, 《백제신찬》의 내용은 그런대로 믿을만한 것이 있으니, 《삼국사》나 《니혼쇼키》 두 책의 편찬자들이 일부러 거짓부렁을 하지 않은 한, 그 인용한 책들이 내용을 조금 틀리게 적은 것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내가 가진 이 딸리는 머리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으나, 아마 그러하리라 확신한다.

내용은 당대의 사실을 전하고 있지만 오기가 있을수 있다고.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겨울 12월에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원년(545)

 

《후위서》에는 평성왕을 가리켜 고련(高璉), 즉 장수왕의 5대손이라고 기록했다. 장수왕의 손자가 문자명왕이고 문자명왕의 장자가 안장왕과 안원왕인데 평성왕은 안원왕의 아들이니 장수왕(1대)-조다(2대)-문자명왕(3대)-안원왕(4대)-평성왕(5대)으로 왕계가 맞다. 평성왕이 사신을 동위에 보낸 것은, 외교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일선조치였다. 추군가에서 주도해서 먼저 동위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했을 수도 있다. 한편 백제에서는 오래도록 질질 끌어왔던 '임라재건' 즉 '신(新) 남방해양동맹'이 타결되고,백제의 명농왕은 중부호덕(中部護德) 보제(菩提)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 츠쿠시에서 얻은 보물을 가라 제국의 여러 한기와 왜신관의 요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장륙불상을 만들어 동맹이 타결되었음을 기념(?)하기에 이른다.

 

[二年, 春二月, 王都梨樹連理.]

2년(546) 봄 2월에 서울의 배나무 가지가 (서로) 붙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배나무 가지 서로 붙은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걸 기록에다 실어놓은 것인지, 참.

하긴 창경원 코끼리 감기 걸린게 사회면 한구석 차지하던 시대도 불과 몇십년 전에 있었으니.

 

<함경도 신포의 오매리 절터에서 나온 금동판.>

 

이건 고려에서 만든 것이지만, 발견된 것은 엉뚱하게도 발해의 절터에서 발굴됐다. 1988년 6월에. 뒷면에 못을 박았던 흔적 같은 것이 있는 걸로 봐서는 어디 절의 건물이나 탑 같은 데에다가 붙였던 것 같은데, 앞부분은 깨져나가고 없고 뒷부분만 남아있다. 평성왕의 부왕이자 선왕으로서 추군과 세군 두 집안의 다툼 사이에 죽은 안원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군가의 거점이었던 함경도ㅡ옛 옥저령에 해당하는 곳에서 주도하여 만든 것이다.(세군가는 안원왕 소비小妃의 사돈 집안이다)

 


[▨▨▨▨▨▨▨▨三輪垂世耳, ▨所階. 是故如來, 唱圓敎於金河, ▨神之妙宅, 現闍維▨▨▨▨▨迎於後代, 是以▨▨慧郎, 奉爲圓覺大王, 謹造玆塔, 表刻五層, 相輪相副. 願王神昇兜率, 查勤彌勒, 天孫俱會, 四生蒙慶. 於是頌曰: 聖智契眞, 妙應群生, 形言暉世, ▨育道成. 迷▨▨▨, 稟生死形, ▨神會性, 則登聖明. ▨和三年歲次丙寅二月廿六日, ▨戌朔記首.]
(앞부분 마멸) 삼륜(三輪)을 세상에 드리울 따름이니... 단계로 삼는 바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원교(圓敎)를 금하(金河)에서 제창하시니, 신(神)의 묘택(妙宅)을 ... 하고 화장[闍維]하는...을 드러내었다.... 후대에 받아들여져, 이 때문에 ▨▨혜랑(▨▨慧郞)이 원각대왕(圓覺大王)을 받들고자 삼가 이 탑을 만드노니, 겉에 5층을 새기고 상륜(相輪)이 서로 부응한다. 바라건대 왕의 영령이 도솔천으로 올라가 미륵을 뵙고, 천손(天孫)이 함께 만나며, 모든 생명[四生]이 경사스러움을 입기를. 이에 송(頌)하노라.

 

聖智契眞    성스러운 지혜는 진리에 계합(契合)하고,
妙應群生    뭇 생명에 오묘함을 부응하였으니, 
形言暉世    모습과 말씀이 세상에 빛나,

▨育道成    ▨가 자라고 도(道)가 이루어졌도다.
迷▨▨▨    미혹(迷惑) ... ,

稟生死形    생사(生死)의 형(形)을 받아 태어났으되,
▨神會性    정신에 ▨하고 본성(本性)을 깨친

則登聖明    즉 성스러운 밝음에 올랐도다.

 

태화(太和) 3년 세차(歲次) 병인(丙寅) 2월 26일 병술(丙戌) 초하루[朔]에 기록한다[記首].

 

여기서야 북한에서 읽는 대로 '태화'라고 읽고 태화 3년은 서기 546년, 평성왕 2년이라고 했지만, 사실 '화'의 첫글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앞글자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장수왕 14년(426)이 될 수도 있고 장수왕 74년(486)이 될 수도 있고, 영양왕 17년(606)이나 보장왕 25년(666)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요한 건 일단 저것이 고려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발해에서도 저걸 계속 썼을 거라는 사실이다.

 

천손은 고려 왕실의 왕, 여기에서는 앞서 죽은 선대왕들을 의미한다. 고려의 모든 왕들은 죽음을 곧 하늘로의 귀환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해모수가 그랬던 것처럼 천제(天帝)가 사는 천상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려의 왕들은 그저 이 지상에 내려오는 것 뿐이다. 낮이 되면 지상의 땅으로 내려와 인간을 다스리고, 밤이 되면 천상으로 올라가 하늘의 세상에서 산다. 적어도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자신들을 천제의 혈족으로 여기는 것이 고려 왕실ㅡ나아가 고씨 일족의 신앙. '천손'은 그러한 고려 왕실, 나아가 모든 고려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단어였고,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덴노(天皇)'와도 같은 황제의 존호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패기있고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그러한 고려인들의 전통적 하늘관은, 불교라는 종교와 만나 하나로 융화되어갔고, 언젠가부터 고려인들의 하늘은 도솔천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토속 종교와 불교,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창시되고 숭신받았을 두 종교의 만남과 충돌,화합과 융합의 과정을 거친 응결의 결과를 저 금판은 잘 보여주고 있다.

 

[夏四月, 雹.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2년(546)

 

이듬해 4월, 백제는 왜국으로 사신을 보냈다. 《니혼쇼키》 긴메이 8년(547)조 기사에 의하면, 전부나솔 진모선문(眞慕宣文)과 나솔 기마(왜인으로 백제에서 벼슬하고 있었음)가 중심이 되어 왜국으로 파견된 이들 사신단은 왜로부터 군사지원을 약속받기 위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신라와 임라(가라 제국), 왜를 잇는 해양동맹이 불완전하게나마 성사되고 2년만에, 백제는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 파병을 요구했다. 모든 것은 고려를 초점으로 맞춰진 군사작전이었다. 고려를 쳐서 선대의 원수를 갚고, 잃어버렸던 옛 땅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백제 조정의 지상과제. 명농왕의 움직임은 고려에도 보고되었다.

 

[三年, 秋七月, 改築白巖城, 葺新城. 遣使入東魏朝貢.]

3년(547) 가을 7월에 백암성(白巖城)을 고쳐 쌓고, 신성(新城)을 수리했다.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제7, 양원왕

 

평성왕 3년에 개축되었다는 백암성은 지금 중국 요령성에 있는 연주성인데, 가파른 언덕을 따라 쌓은 육중한 성곽이다. 멀리서 보면 돌의 색깔이 거의 흰빛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은 것으로 여겨진다. 기록상 이것이 백암성이라는 성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최초'라고 쓰지 않는 것은 이미 평성왕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백암성이라는 성이 고려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 집권기인 7세기, 1차 고당전쟁 때에는 그 성주 손대음이 엉뚱하게도 당에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불명예스런 이름을 남기게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고려 변경의 중요한 요새 가운데 하나였다.

 

<백암성의 성곽 가운데 '치'라고 하는, 방어용 돌출부>

 

성의 북쪽으로는 개모성(蓋牟城), 서쪽으로 22.8km 되는 곳에 요동성(遼東城)이라고도 불린 오열홀(烏列忽)이 있고, 남쪽으로 저 유명한 안시성 싸움이 있었던 안시성 즉 안촌홀(安寸忽)이 있다. 백암성은 현재 북쪽과 동쪽 성만 남아 있으며, 북쪽 성벽의 높이는 5~6m, 남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과 태자하라는 천연의 요새를 갖춘 고려의 전형적인 성곽이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을 쌓는 것은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 고유의 성곽 축조 방식. 그러한 고려의 성곽 가운데서는 가장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이 백암성이다. 나아가 고려의 서북대진(西北大鎭)이었던 신성에 대해서도 수리가 이루어졌다.

 

《니혼쇼키》의 기록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던 18세기 이전은 고사하고 근년에 이르기까지 백제가 남쪽에서 꾸미는 모종의 행동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었다. 《삼국사》에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가 백암성과 신성을 쌓을 때까지 소위 '중흥'을 이루어나가던 백제가 뭘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니혼쇼키》에서 말한, 백제의 성명왕이 추진한 '임나재건'이 식민사학의 주장과는 달리 대체로 고려 공격을 염두에 두고 행해진 백제의 군사동맹체 복원시도였음을 밝혀냈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고려에서는 그러한 백제의 시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 만약 고려에서 백제의 '불온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북방지역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건 고려가 백제에 대해서 '오만' 내지는 '방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밖에는 볼수 없을 것이다.

 

다만 고려에서 동위에 사신을 보내고, 성곽 축조에 힘을 기울인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인 목적도 있는 것 같아서, 당시 북쪽에서 일어나던 불온한 움직임(돌궐이나 거란, 물길족의 침략 위기 같은)에 국내의 관심을 돌려 나라 안에 남아있을 반발세력들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려는 의도로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해 '홍보'하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 시기 고려의 군사전략은 모두 남방에 있는 백제를 방어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은 백제에서 '임라재건'이라는 이름으로 남방해양동맹이 체결되고 왜에 원병파병을 요구하는 시기와 맞물려 고려에서 일련의 성곽 축조와 사신 파견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너무 견강부회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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