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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4>제23대 안원왕

백제에서 온갖 위협 무릅쓰고 데려온 한주미녀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지 못하고 의문의 시해를 당한 형 안장왕의 뒤를 이어

왕제 보연(《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보영寶迎이라고 했다)이 23대 태왕으로 즉위했다.

 

[安原王, 諱寶延, 安臧王之弟也. 身長七尺五寸, 有大量, 安臧愛友之. 安臧在位十三年, 薨, 無嗣子, 故卽位. 梁高祖下詔襲爵.]

안원왕(安原王)은 이름이 보연(寶延)이고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었으므로 안장왕은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양(梁) 고조가 조서를 내려 (전왕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신찬성씨록》에는 코마노오비토(狛首) 가문의 선조가

고려 안강상왕(安岡上王)이라 했다. 이 안강상왕은 보연왕(안원왕)을 가리킨 것일까.

키가 몹시 크고 도량이 넓어 형에게 무척 사랑받았다는 그는

의문의 시해를 당하고 원귀가 된 형의 뒤를 이어 고려의 태왕 자리에 앉았을 때

형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밝히려는 시도를 한 것 같지는 않다.

《니혼쇼키》가 전하는 대로 정말 안장왕이 시해당한 것이라면,

그 배후는 정작 형에게 사랑받던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 범인을 알고도 죄를 물어 죽이지 못할 정도로,

태왕인 그를 위협하는 뭔가의 막후 세력이 있었을까?

 

[二年, 春三月, 魏帝詔策使持節散騎常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 賜衣冠·車旗之飾.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六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2년(532) 봄 3월에 위(魏) 황제가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고, 의관 · 수레 · 깃발의 장식을 내렸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6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중국 대륙의 남북조시대도 이제 거의 말기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북조의 위와 남조의 양. 두 나라 사이에서 고려는 이중외교를 펼치며

북방의 위협을 없애려 했다. 1년 동안 위와 양 두 나라에 번갈아

4차례 사신을 보내면서 말이다.(6월에는 사신을 두 번 겹쳐서 북위에 보냈었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平成爲太子. 二月, 遣使入魏朝貢.]

3년(533) 봄 정월에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삼았다.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이때 태자로 삼은 왕자 평성이, 훗날의 양원왕이다.

형왕에게 태자가 없어 이리저리 혼란스럽던 상황을 잘 알았던 그이기에,

일찌감치 태자를 정해두어 후사 문제를 확실히 하고,

귀척들이 패를 나누어 싸우는 것을 막아보려 했겠지.

그것은 자신의 목숨과도 결부된 일일테니까.

 

[四年, 東魏詔加王驃騎大將軍, 餘悉如故. 遣使入魏朝貢.]

4년(534)에 동위(東魏)에서 조서를 내려 왕에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더하고, 나머지(작위)는 모두 이전과 같게 하였다.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백제본기에는 이 해, 그러니까 보연왕 4년(534) 3월에

사신을 남조의 양(梁)에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는 이듬해인 535년, 서둘러 사신을 양에 보냈다.

 

[五年, 春二月, 遣使入梁朝貢. 夏五月, 國南大水, 漂沒民屋, 死者二百餘人. 冬十月, 地震. 十二月, 雷, 大疫.]

5년(535) 봄 2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나라의 남쪽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죽은 자가 200여 명이나 되었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12월에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보연왕의 시대는 고려 역사 중에서 가장 자연재해가 많았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홍수와 지진은 물론이고,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돌아

죽어나가는 사람이 속출했다.(여름도 아니고 겨울에 전염병이 돌다니.

악성 독감이나 또 다른 것이었던가?)

 

[六年, 春夏, 大旱. 發使撫恤饑民.]

6년(536) 봄여름으로 크게 가물었다.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평양(펴라)의 방어성이었던 대성산성에는 연못이 많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확인된 것만 해도 170곳 정도 되는데, 주로 장수봉과 을지봉 중턱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대성산성은 지금은 공원으로 개장되어 있어서 말이지,

평양 사람들이 와서 쉬고 갈 수 있게 연못 일부는

유원지로 개조해서 쓸 수 있게 해놨다고 한다.

 

<대성산성 안의 연못 분포도.>

 

조선조 말년에 우리 나라를 방문했던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평양을 들렀을 때(물론 조선조 당시의 평양성은 대성산성이 아닌 장안성에 있었고)

평양 사람들은 대동강에서 그들이 쓸 용수를 직접 퍼다 나르고 있었다.

성 안에 우물을 파서 길어다 쓰지 않고 왜 힘들게 대동강에서 일일이 물을 퍼다 쓰는지

그 이유라는 것도 실로 황당한 게, 평양의 모양이 배처럼 생겼기 때문에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아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나라에서 우물을 못 파게

금지시켰다는 것이다.(배에 구멍이 뚫리게 되니까)

신라 말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풍수가 어떤 식으로 변형되어 이렇게까지 바뀌었는지.

뭐 평양의 암반이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식수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풍수 개념을 빌려서 우물을 못 파게 시킨 것이라고 분석한 분도 있다마는, 

'풍수'가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던 6세기 고려는

물이 필요하면 어디에서든 우물을 파서 썼다. 대성산성의 우물도 그 가운데 하나다.

 

조사결과 연못들은 모두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인위적으로 네모지게 조성된

인공 연못이었다. 고려인들은 이 인공연못 밑바닥에 찰흙과 막돌을 섞어 굳게 다져서

펀펀하게 고르고, 그 위에 조금 큰 돌을 깔아서 물이 새지 않게 했다.

그리고 둘레에 돌을 쌓으면 전시에 쓸 수 있는 군사용 식수보급탱크가 완성되는 셈이다.

이들 연못들은 대성산성으로 피신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식수가 되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는 성지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장수못. 성안의 연못들은 대체로 장방형이나 방형으로 네모지게 구획되어 있다.>

 

대성산은 조선조에는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해서, 비가 오지 않을 때마다

산성 안의 연못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비를 비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의 전통이고, 전세계적으로 기우제의 방식은 다양한데,

평양(펴라) 지역에서는 어떤 식으로 기우제를 지냈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불교가 들어온 뒤에는 불교의 수호신중 가운데 하나인 용왕(龍王)을

수신(水神)과 동일시했는데, 그 전에도 용을 물의 신격으로 간주해서

'미르'라고 불렀던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단어는 훗날 '물(Wa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됐다.

 

[秋八月, 蝗. 遣使入東魏朝貢.]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6년(536)

 

고려를 괴롭힌 것은 가뭄만이 아니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위무시킨 것이 채 몇 달도 안되어,

이번에는 때아닌 메뚜기들이 고려의 모든 논밭을 휩쓸어버린다.

가뜩이나 먹을것도 없는 판에, 민심은 거의 극악을 치달았고,

혼란스러운 정계만큼이나 백성들 역시 혼돈 속에서 살아야 했다.

 

[七年, 春三月, 民饑, 王巡撫賑救.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7년(537) 봄 3월에 백성들이 굶주려 왕은 (나라 안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메뚜기가 휩쓸고 간 그 이듬해 역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백성들.

그럴 때마다 일일이 사신을 보내던지 아니면 직접 찾아가서 그 아픔을 달래줄 만큼

후덕한 성품과 큰 도량을 지녔던 보연왕이었지만,

조정의 혼란만큼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九年, 夏五月, 遣使入東魏朝貢.]

9년(539) 여름 5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그저 다른 인재(人災)가 없도록, 인접한 중국의 왕조에 사신을 보내 우호하는 것밖엔.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 우리나라 국보 119호이다. 전체 높이 16.2cm에 부처님 불신(佛身)은 높이가 9.1cm.>

 

고려의 연호는 광개토태왕 시대의 '영락(永樂)' 하나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1963년에 경남 의령 하촌리 돌무더기 속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지금은 국보 119호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부처님이 서있는 대좌하고 등에 붙은 광배를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한꺼번에 틀에다 부어서 주조를 했다.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맺은 저 불상은

옷의 띠매듭 끈을 길게 내리지 않고 있는 등 나름대로 고유한 특징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북위의 색채가 짙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뒷쪽 광배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고려의 연호가 발견된다. 

 

[延嘉七年歲在己未, 高麗國樂良東寺, 主敬弟子僧演師徒人, 造賢劫千佛流布, 第廿九囙現義佛, 比丘供養.]

연가(延嘉) 7년 기미(己未)에 고려국 낙량동사(樂良東寺)의 주지 경(敬)과 그 제자인 승(僧) 연(演)을 비롯한 사제(師弟) 40인이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퍼뜨리기로 하였다. 제29번째의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가 공양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시간의 범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장엄겁(莊嚴劫), 현겁(賢劫), 성수겁(星宿劫)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현겁이라는 말은 이 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현자들이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서 말하는 '현겁천불'이란

즉 이 현세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할 천 명의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고대 중국 북위 때인 525년의 룽먼(龍門) 석굴의 조상명(造像銘)에서 

그러한 신앙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겁천불'의 스물 아홉 번째라고 명문에서 소개한 인현의불(因現義佛)의 이름은

고대 중국 남조 서진(西晉)의 승려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현겁경(現劫經)》에서는

'현의불(現義佛)', 북위의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번역한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에서는 공덕불(功德佛)로 되어 있다.

불상을 만든 동사의 승려들은 《불설불명경》이 아닌 《현겁경》을 따랐다.

북위의 양식을 따라 불상을 만들면서도, 그 불상을 만들게 한 신앙의 근원은

북조가 아닌 남조에서 전해진 셈이다.(사실 본격적인 남북조시대는

서진이 강남에 내려가서 동진이 된 시점에서 시작되니까 이 서진을

남조로 간주할지는 의문이지만)낙량동사(樂良東寺)라는 절도

고려 수도 평양(펴라)에 있던 사찰, 어쩌면 광개토태왕이 평양에다 세웠다는

아홉 절의 하나인지도 모른다.(단재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평양'과 '낙량'은

똑같이 '펴라'를 이두자로 표기한 글자임)

 

이 '연가'가 기록에서 잊혀진 고려의 연호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연가 7년이 정확히 언제를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설이 없다.

이 불상처럼 가사 자락을 왼쪽 손목으로 걸쳐 내려 가슴을 U자꼴로 터지게 해서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上內衣]를 보이도록 한 방식은 중국에서도 480년경에 이르러서야

새로 나타나는 것이란 점과, 연가7년명금동여래상과 같은 나발(螺髮)은

5세기 중엽 북위에서 시작되어 6세기 중엽에 일반화되었다는 점,

소위 '현겁천불' 신앙은 북위 시대인 525년의 룽먼석굴 조상명에서

처음 확인된다는 점 등에서 539년 혹은 599년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지만,

어느 쪽을 따라야할 지는 아직도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여기서는 일단 전자를 따라서 안원왕 9년에 이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적어둔다.

(이상 한국금석학종합영상정보시스템 사이트에서 '퍼옴')

 

<광배 뒷면에 적힌 명문. 오른쪽 윗부분에 '연가(延嘉)'라는 두 글자가 보인다.>

 

이 불상은 고려 수도에서 만들어졌지만, 엉뚱하게도 신라 땅 경남 의령에서 튀어나왔다.

아마 불교 전파를 위해 신라로 들어가던 승려들이 같이 갖고 들어가 

'전법(傳法)'하신 흔적이 아닐까 한다. 불상은 전체 길이가 30cm 자의 절반 길이에서

조금 더 크다. 한 손에도 잡힐 정도다. 이렇게 간편하게 갖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미니멈불상이 고려에서는 많이 만들어졌는데,

7세기 초엽에 고려에 갔던 말갈 사람 제시계(帝示階)가 얻었다는 구리불상처럼,

그 목적은 멀리까지 나가는 사람들이 일종의 호신용부적의 목적으로

지니고 다니기 위한 것이었다. 크리스트 교도가 외지로 가면서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나가는 것과 비슷한데 당시에는 이렇게

미니멈 스케일로 만든 불상을 십자가 목걸이 걸듯 품에 지니고 길을 나섰다.

 

낙랑동사 주지와 승려들이 불상을 만들 때 도왔다는 사도(師徒) 마흔 명은

고려의 재가신도들이었다. 지금의 재가신도처럼 집에서 자기 생업 계속 꾸리면서

간간이 절에 가서 기도드리고 불공드리고, 연등 만들고 스님들 밥 짓는 것도 돕던 재가신도.

'세상에 퍼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낙랑동사의 승려와 신도들은 대대적인 불사를 벌였다.

천 개의 불상을 만들었다는 말은 6세기 무렵 평양의 사원에서 불상을 만들기 위해

다수의 사람이 존재하는 '불사(佛事)'활동이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불교에 대한 '신앙'으로 모여 '결사(結社)'를 만들고,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들 돈을 조금씩 모아서 천개의 불상을 만들어서,

그 불상들을 전국 각지로 갖고 다니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다.

그 천 개의 불상 가운데 이 하나가 저 남쪽 신라 땅까지 흘러가서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八月, 高麗, 百濟, 新羅, 任那, 並遣使獻, 並修貢職.]

8월에 고려와 백제, 신라와 임나가 나란히 사신을 보내고 나란히 공물을 보내왔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원년(540)

 

이건 단순한 수식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무렵에 고려가 왜국에 조공을 보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심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뭐, 덴노가 즉위한 것을 축하하느라고 사신을 보냈다, 그 정도로만 만족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十年 秋九月, 百濟圍牛山城, 王遣精騎五千, 擊走之. 冬十月, 桃李華. 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10년(540) 가을 9월에 백제가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니, 왕은 정기(精騎) 5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2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쳐들어오는 군사야 어떻게든 이렇게 내쫓아버리면 그만이고,

별다른 악감정이 없다면 외교적으로 무난해지는 것도 방법이지만,

하늘에서 무시로 내리는 재앙은 예측할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을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 무렵의 고려는 그러했다.

 

[十一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11년(541) 봄 3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고려가 혼란에 빠진 동안에도, 백제와 신라는 계속해서 성장해나갔다.

동성왕, 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즉위한 백제는 중흥의 기치를 더욱 드높여나갔고,

신라에서는 법흥왕의 율령 반포와 건원(建元) 개원,

불교 수용을 통해 다져진 내실을 이어받아 즉위한 진흥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모두가 고려의 혼란을 틈타서 세력 확장을 엿보는 자들이다.

특히 신라는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던 금관가야를 무너뜨리고 고령가야를 압박하며,

대외 팽창을 꾀하고 있었다.

 

[十二年, 春三月, 大風拔木飛瓦. 夏四月, 雹.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12년(542) 봄 3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잇따르는 자연재해는 고려를 마구 흔들어놓았다.

큰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기왓장까지 날려갈 정도의 강풍이 고려를 휩쓸고,

우박이 떨어져 백성들을 괴롭히고 농작물을 해치는, 고려 역사상 유례가 없던 대재앙.

이어지는 천재지변 앞에서는 하늘의 자손이라 자부하는 고려도 속수무책이었다.

하늘이 하는 일에는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十三年,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

13년(543) 겨울 11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四年,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

14년(544) 겨울 11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조공하는 것도, 책봉받는 것도 도움이 안 되지.

 

[十五年, 春三月, 王薨. 號爲安原王.<是梁大同十一年, 東魏武定三年也. 梁書云『安原以大淸二年卒, 以其子爲寧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 誤也.]

15년(545)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안원왕이라 하였다.<이 때가 양 대동(大同) 11년이요, 동위 무정(武定) 3년이었다. 《양서》에『안원(왕)이 태청(太淸) 2년(548)에 죽자 그 아들을 영동장군(寧東將軍)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원왕

 

《삼국사》가 재위 15년,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재위 14년에 죽었다고 했는데,

왕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얼마나 재위했는지는 고사하고, 이 무렵 고려는 소란스러웠다.

보연왕 재위 말년에 이르러, 수도 평양(펴라)에서 때아닌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음 왕위를 놓고 벌어진 유력 귀척들간의 싸움이었다.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은 《니혼쇼키》 긴메이(欽明) 덴노 6년조(545) 기사.

지금은 전하지 않는 백제의 역사책 《백제본기(百濟本記)》의 기록을 인용해

그들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안원왕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나,

그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와 《양서》가 다른 것만을 봐도,

《니혼쇼키》가 전하는 이 《백제본기》 기사는 충분히 믿을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해에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주살당한 자가 많았다."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十二月甲午, 高麗國細群與麤群, 戰于宮門, 伐鼓戰鬪. 細群敗不解兵三日, 盡捕誅細群子孫. 戊戌, 貊國香岡上王薨也.]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에서 북을 치며 싸웠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이나 포위를 풀지 않고 세군의 자손을 모두 잡아 죽였다. 무술(24일)에 맥국(貊國)의 향강상왕이 승하하였다.

《백제본기(百濟本記)》 인용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6년(545)

 

당시 고려의 정계를 양분하고 있던 '추군'과 '세군' 두 양대 세력이

평양(펴라)의 궐문 앞에서 서로 싸웠고, 세군이 패하여 그 자손들이 모두

추군측의 군사들에게 잡혀 죽는 사태가 고려에서 벌어졌다.

 

[高麗, 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貊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麤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貊王疾  , 細群麤群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二千餘人也.]

고려는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맥왕(貊王: 고려왕)은 부인이 셋이었다. 정부인(正夫人)에게는 아이가 없었고, 중부인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 사돈[舅氏]이 추군이며,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사돈[舅氏]은 세군이었다. 맥왕이 병들자 세군과 추군은 각기 그 부인의 아들을 세우고자 하여, 세군의 죽은 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백제본기(百濟本記)》 인용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9, 긴메이키(欽明紀) 7년(546)

 

승리는 중부인 집안인 추군가에게로 돌아갔고,

그들은 세군측이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흘 동안이나 포위를 풀지 않은채,

세군의 자손을 비롯해 2천 명이나 되는 반대파 사람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보연왕은 마침내 병으로 승하하고 만다.

재위 15년만인 서기 545년 겨울 12월 24일.(《삼국사》에서

3월이라고 기록한 것보다 아홉 달이나 더 늦은 수치다)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 이브에 돌아가셨구나 참.

 

《니혼쇼키》에서 인용한 《백제본기》는 545년과 546년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의 양원왕 승하 기록에 의거한다면 이 내란은 545년에 일어났다고 했지만

《백제본기》는 12월 20일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에 안원왕이 죽었으며,

이듬해 정월 병오에 양원왕이 즉위했다는 시간관계상 안원왕의 사망은

《삼국사》에 기록된 것보다 1년 앞선 544년 겨울 12월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12월 20일에 두 집안 사이의 내란이 터졌고, 나흘 뒤에 안원왕이 죽고,

곧바로 이듬해인 545년에 양원왕의 지지세력인 추군이 그들의 외손자를

즉위시켰다고 하면 맥락이 맞는다. 승리한 쪽인 추군을 지지하던

궐내의 파벌들이 안원왕의 사망 소식을 일부러 숨겼을 수도 있다.

더구나 안원왕의 죽음을 544년으로 1년 앞당겨서 계산하면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안원왕의 재위기간이 14년이라고 말한 것과도 들어맞는다.

《니혼쇼키》가 실제 기록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일이 자주 있는 점을 감안해서,

나는 추군과 세군의 내란 및 보연왕의 사망은 544년에 있었고 바로 이듬해인 545년이

바로 보연왕의 공식 사망 선포 및 평성왕(양원왕)의 즉위가 이루어진 해라고 판단하여

이렇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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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상황이란 마치, 16세기 말 '전국통일'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부시(武士)들의 불만이 팽배했던 일본의 상황과 같았다. '좌식자(坐食者)'로 대표되는

수많은 무장들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데리고 정복전쟁을 수행하여 대외팽창과 함께

그 지위를 보장해주어야 했는데, '천도'를 통한 내부숙청을 통해 풀어버리려 했다.

그러자면 내부 분열은 피할수 없는 수순이 된다.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장수왕이야, '정복군주'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강력한 왕권을 부여받은데다 카리스마까지 있었으니 내부의 반발을 누를 수야 있었겠지만,

그 다음 왕도 장수왕이나 광개토태왕처럼 강력한 왕권을 지닌 군주가 될 거라는 보장이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하고 역량이 딸리는 군주 아래서 귀척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면,

밑에서 자라나는 풀을 찍어누를 만한 무게가 되지 못하는 돌처럼

결국 그 풀에 밀리거나 아니면 깨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후 고려는 그러한, 찍어누르는 무게가 강하지 못한 돌을 밀어내고

땅속 깊이서부터 돋아나려는 새로운 풀의 싹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고 갈라져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안원왕은 그 풀을 끝내 누르지 못한 무게없는 돌과 같았다.

왕위 계승이라는 중요한 일을, 왕가의 법도가 아니라 사돈 맺은 집안의

무력(武力)의 차이로 결정하는ㅡ 고려 무신정권 시대처럼 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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