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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3>제22대 안장왕

《동사강목》에서 안정복은 문자명왕 이후 평원왕이 즉위하기까지 고려의 왕은 대부분 용렬하고 별볼일 없는 왕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문자명왕 이후 22대 안장왕, 23대 안원왕, 24대 양원왕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는 실로 고려의 혼란기였다. 우선 남쪽에서 백제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려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며 세력을 키우면서, 고려는 백제와 신라. 두 적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나마도 국내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뒤부터, 고려는 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아이처럼 대륙으로의 팽창을 거의 멈추다시피 한다. 내부의 수많은 귀척과 대족들은 거의반이 무력을 갖추고 싸움으로 업을 삼던 자들. 대외팽창을 멈춘 고려 안에서 그들은 넘쳐나는 힘을 쓸 곳을 찾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칼과 활을 겨누기 시작했다. 무력을 지닌 무장으로서 고려 정계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던 귀척들과, 그들에 맞서 왕권을 더욱 강화해나가려는 태왕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런 의미에서 안정복이 고려의 중후반기를 '용렬하고 별볼일없는 왕의 시대'라고 부른 것은 틀린 말이 결코 아니다.

 

<평양 대성산성 전경.>

 

흥안왕(안장왕)은 그런 와중에 즉위했다.

 

[安臧王, 諱興安, 文咨明王之長子. 文咨在位七年, 立爲太子. 二十八年, 王薨, 太子卽位.]

안장왕(安臧王)은 이름이 흥안(興安)이고 문자명왕의 맏아들[長子]이다. 문자가 재위 7년에 태자로 삼았다. 28년에 왕이 승하하여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지금 일본에서는 아악의 한 분파인 난토호가쿠(南都方樂)의 한 가문의 시조로 흥안왕을 모신다. 흥안왕의 아들인 복귀군(福貴君)에서 난토호가쿠에 속한 오오코마노무라치(大狛連)씨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토 미카도로부터 直広肆 관직을 추증받았다는 오오코마노 모모에(大狛百枝)도 흥안왕의 후손이다(라고 하더라). 다만 《신찬성씨록》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적지 않고 그냥 오오코마노무라치가 복귀군에게서 비롯되었다고만 적었다.

 

그가 즉위하던 해, 중국 양(梁) 천감(天監) 12년, 고려의 승려 승랑은 양 무제가 보낸 전국의 유명한 승려 열 명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중에서 승전을 제자로 삼았다. 당대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승랑은 삼론종의 1인자로 손꼽히고 있다. 승랑 이후 그의 제자 승전과 법랑을 거쳐 길장에 이르러 삼론종은 백년 동안 성행했으며, 중국 삼론종의 대성자였던 길장(549~623)은 승랑에 대해 높은 평가를 했다. 이후 6세기 후반부터 백 년 동안 중국에서는 삼론종이 성행했지만, 정작 승랑 본인이 고려로 돌아왔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어쩌면 신라의 혜초처럼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생을 마쳤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발전시킨 신삼론종의 삼론사상은 중국뿐 아니라 고려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고, 6세기대 이후 고려에서 삼론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을 거라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승랑을 과연 중국 불교사에 편입시켜야 할지, 우리 불교사에 편입시켜야 할지, 그 점은 따로 생각해볼 문제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梁朝貢. 二月, 梁高祖封王爲寧東將軍都督, 營平二州諸軍事, 高句麗王, 遣使者江注盛, 賜王衣冠劒佩, 魏兵就海中執之, 送洛陽. 魏封王爲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 秋九月, 遣使入梁朝貢.]

2년(520) 봄 정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양(梁) 고조(高祖)가 왕을 영동장군(寧東將軍) 도독영평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고려왕으로 봉하고, 사신 강주성(江注盛)을 보내 왕에게 의관, 칼, 패물을 주었으나, 위 군사가 바다 가운데서 그를 붙잡아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위가 왕을 안동장군(安東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으로 봉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후위서》에 보면, 효명제(孝明帝) 신귀(神龜) 연간에 대홍려경(大鴻臚卿) 유영(劉永)이 사신으로서 와서 효명제의 책봉문서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책부원귀》에는“유장문(劉長文)이 대홍려(大鴻臚)가 되어 사신으로 가서 고려왕 고안(高安)을 책봉하여 제수하였다.”고 했다. 《해동역사》는 유영이 고려에 온 것이 신귀 2년, 흥안왕 원년에 해당하는 서기 519년의 일이라고 했으니 이 기록대로라면 양에서 사신을 보내기 전에 이미 고려는 북위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된다.

 

안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양 고조의 사신 강주성은 왕에게 줄 의관과 칼, 패물 등의 예물을 갖고 고려로 향했지만, 하필 거기서 북위 수군에게 걸려서 낙양으로 끌려간다. 절박한 순간에, 북위는 고려의 양다리 외교를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려에게 작위까지 주었다. 《책부원귀》에는 이때 북위에서 온 사신의 이름이 손소(孫紹)라고 적었다.

 

양이 고려에게 준 작위가 영동장군(寧東將軍) 도독영평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고려왕.

위가 고려에게 준 작위가 안동장군(安東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위가 양보다 좀 길다)

 

북위나 양이나 모두 중국 대륙의 통일을 꿈꾸는 자들이고, 언젠가는 서로 간에 일전을 벌여야 하는 처지였기에, 고려와 원수져서는 득될 것이 없었던 거다. 고려로서도 북위나 양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서는 안 되었다. 북위와 국경을 맞닿아 있기에 고려가 혹시나 남쪽으로 백제, 신라 두 나라(당시 백제와 신라는 서로 동맹관계였다.)와의 분쟁같은 변방의 위협이 생기면 가장 먼저 북위가 움직일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위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북위가 혹시라도 고려를 치게 되면 남쪽의 양이 움직일 것이고, 양과 미리 수교를 해놓으면 북위의 남쪽을 견제하는 형세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북위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 

 

고려에게 어울리는 것은, 이런 식으로 중국 왕조에게 조공이나 갖다바치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다. 거친 벌판을 달리며, 차갑게 얼어붙은 강을 건너 저 대륙으로 바다로 무한히 뻗어나가야만 하는 초원의 외로운 늑대. 그러나 이 시기 고려의 모습은 달랐다. 우리가 기억하는 광개토태왕 시절의 그 강인하고 패기 넘치던 그 무인의 기질을 지닌 고려인들은, 평양 천도 이후 너무도 바뀌어있었다.

 

[三年,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邑貧乏者, 賜穀人三斛.]

3년(521) 여름 4월에 왕은 졸본으로 행차하여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5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오다가, 지나는 주읍(州邑)의 가난한 자들에게 곡식을 한 사람에 1곡(斛)씩 주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졸본(홀승골성) 사행(祀行)이라. 실로 얼마만의 일이던가? 고려의 국왕이 선대 동명왕의 사당을 찾아뵌 것이. 태왕을 얕잡아보는 귀척들에게 왕실의 신성함을 과시하고, 지나는 주읍의 가난한 자들에게 두당 한 말씩 곡식을 나누어주는 센스까지.

이 시대의 복지정책이라는 건 뒤집어보면 다 이런 거다.

 

<정릉사터. 평양으로 이장한 동명왕의 무덤을 지키기 위한 왕실 원찰이었다.>

 

평양에는 정릉사의 옛 터가 있는데, 평양의 동명왕릉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왕실 원찰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사찰이었기에 고려의 어느 절보다도 빨리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고려가 멸망한 뒤 고려의 사찰들은 한갓 변방의 절간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아예 폐쇄조치를 당하기도 했는데, 이곳이 나라 잃은 유민들이 모여서 부흥운동의 근거지로 삼을 소지가 있는 위험구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릉사터에서 발굴된 고려 때의 질그릇 파편. 겉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릉사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것은 1974년에 정릉사터 발굴 현장에 있던 우물에서 튀어나온 다 깨진 질그릇 파편이었다. 그 파편에 새겨진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를 통해 이 절의 이름이 '정릉사(定陵寺)'였고, 정릉사의 바로 위쪽에 있는 거대한 봉분이 바로 동명왕의 무덤이었음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정릉사와 동명왕릉. 동명왕릉은 지금 크게 개건되었다.>

 

정릉사는 원래는 사당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고려에 불교가 수용되고 점차 토속신앙과 융화하면서 사당은 마침내 왕릉을 수호하는 능사(陵寺)로 승격되었고, 아울러 왕실의 별전이 부속건물로 추가건립되면서 정릉사는 형편 따라 조금씩 늘려 짓고 고쳐짓고 해서

지금과 같은 대규모 사찰로 발전했다.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뉘며 확인된 건물터만 열여덟 채, 회랑은 모두 열 개이고 총 면적은 약 9천 평으로 경주 황룡사터와도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정릉사의 가람배치도. 1탑 3금당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고려의 가람배치 양식이다.>

 

고려의 가람 배치는 흔히 '1탑 3금당'이라고 해서 탑을 하나 놓고 금당을 셋 배치하는 것인데, 정릉사의 경우에는 탑을 중심으로 금당을 동서 양쪽으로 두 개를 빙 돌아가며 디읃(ㄷ)자로 배치해서 '힘'을 강조했다. 이러한 가람 배치는 훗날 황룡사 가람 배치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황룡사의 가람 배치 역시 금당이 일직선으로 놓인 점을 빼면 고려 정릉사의 가람 배치와 거의 다를 바가 없는 '1탑 3금당' 양식이다.

 

 
<정릉사의 건물배치는 철저한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설계되고 구획되었다.>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보니까, 정릉사는 엄격한 기하학적 원리에 입각해 건물을 배치했다고 했다. 금당 전체 대지의 가로, 세로 길이는 1자=35.6cm 되는 고려자를 단위로 해서 쟀을 때 220자:220√2자의 황금비례가 나타나며, 정릉사뿐 아니라 금강사를 지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라고 한다. 탑 한 변의 너비를 기준으로 해서 쟀을 때 탑에서 문까지의 거리, 동서 금당까지의 거리, 금당의 층계까지의 거리가 일치한다. 도식화하면 금당터의 남쪽 면을 밑변으로 남쪽을 향하는 정삼각형을 그렸을 때 그 삼각형의 정점은 탑터의 중심점과 일치하며, 8각탑의 평면은 이 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점을 중심으로 금당터 층계 남쪽 변까지의 거리를 반경으로 하는 원을 그려보면 문터와 동서 금당터의 안쪽 면이 모두 이 원에 접하게 되는 기하학적인 설계가 정릉사터에서 드러나게 된다.

 

<정릉사 뒤편 우물. '나의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서 고구려적인 힘이 느껴진다고 예찬했던 그것.>

 

어느 시대나 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종교가 있고 사상이 있다. 고려에는 토착의 무속이 있었고 거기에 불교와 유교, 도교가 도입되어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속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사상이 도입되고 그렇게 해서 재래신앙에 변화가 생겨도 변하지 않는 것 하나는, 고려인들의 국조를 향한 숭모와 추숭의 극진한 예의였다. 재래신앙을 믿을 때는 재래신앙의 믿음 대로, 불교를 믿을 때는 불교의 가르침대로, 유교를 따르면서는 유교의 가르침으로, 도교에서는 도교의 가르침으로,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국조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을 통해 그를 거듭거듭 살려냈다. 그것은 국조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조를 그들 가까이로 되살려내는 고려인들 나름의 역사인식이고,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었던 거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가진 순수함이라고 믿는다. 저마다 자기가 믿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들이 최고의 가치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 가치에 대해서는 결코 깎아내리거나 부정하지 않고 당대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그 가치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겨줄 것이다. 살아생전에 불교는커녕 유교나 도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며 재래신앙을 믿고 따랐던 동명성왕이나 추모성왕이라고 단순히 재래신앙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인 시각에서 유교적인 가치로 추모를 평가하고, 불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추모를 재해석하고, 도교적인 인식을 통해서 추모의 신성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추모왕의 본모습은 훼손되거나 곡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추모왕의 모습은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면서 끊임없이, 추모왕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끊임없이 기억될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다양한 각도와 시각으로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이 가진 최고의 행운이 아닐까. 덕분에 살아서는 재래신앙 한 가지밖에 몰랐을 추모성왕이 유교에서 말하는 개국성왕, 불교에서 말하는 불신(佛神), 도교에서 말하는 상제(上帝)로 제각기 다른 세 가르침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려에게 격파당해 여러 해 동안 쇠약해져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말하였다.

『여러 차례 고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

《삼국사》 권제26, 백제본기4, 무령왕 21년(521)

 

백제. 고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남쪽으로는 섬진강 유역에서 대가라를 내쫓고 북쪽에서 계속되던 고려의 공격을 격퇴한 무령왕은 강국이 된 자신감을 양에까지 알렸고, 양에서도 그러한 백제의 역량을 인정하고서 기존의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에서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으로 '승진'을 시켜주었다. 양을 상대로 하는 남방외교에서 백제가 고려보다 한수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고 본다면 그것은 너무 억측일까. 하지만 2년만에 고려가 백제를 공격한 것을 보면 백제의 그러한 외교정책이 고려를 자극하긴 했던듯.

 

그리고 이때 신라의 법흥왕은 백제의 사신을 따라 양으로 가서 조공을 바쳤다. 이때 신라 사신들은 주로 백제의 바닷길과 항해기술을 이용해 중국으로 곧잘 가곤 했다. 옛날에는 고려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갔었지만..... 신라 사신들은 중국어를 할 줄 몰라, 사신이 간 자리에서도 백제인 통역을 통해서야 겨우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중국 기록은 전하고 있다.

 

[五年, 春, 旱. 秋八月, 遣兵侵百濟.]

5년(523) 봄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고려의 남쪽 사정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이 무렵 백제는 무령왕의 뒤를 이어 성명왕이 즉위했었는데,

고려가 침공해오자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령하여 보기(步騎) 1만으로 막게 했고,

패수 강가에서 고려군을 격퇴하기에 이르렀다.

백제와 신라의 역량은 이미 고려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커져있었다.

 

[冬十月, 饑, 發倉賑救. 十一月, 遣使朝魏, 進良馬十匹.]

겨울 10월에 기근이 들어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11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회[朝覲]하고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5년(523)

 

고려에서 북위에 사신을 보낸 것에 고무되었는지, 명농왕은 이듬해인 흥안왕 6년(524), 양(梁)의 고조(高祖)로부터 지절(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 백제왕의 봉호를 받아낸다. 그리고 또 이듬해에는 신라와 사신을 주고받는 등, 남부 한반도를 조용히 잠재우기위한 정지작업에 한창이었다.

 

[八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8년(526) 봄 3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려도 백제의 동향을 주의깊게 살폈다. 백제가 양에 사신을 보낸 뒤 고려가 양에 사신을 보낸 것은 양 고조가 명농왕에게 작호를 준지 2년만의 일로 고려로서는 상당히 발빠른 움직임이었다. 한편 백제는 고려와의 전쟁을 대비해 방어시설 확충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 해 겨울 10월에 "웅진성(熊津城)을 수리ㆍ수선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修葺熊津城, 立沙井柵]."고 백제본기에 실려 있다.

 

[九年,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9년(527)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뭐, 외교관계 개선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실실 웃기만 해서는 부국강병을 이룰수는 없을 것이다. 만주 벌판을 호령하며, 차갑게 얼어붙은 강을 건너 대륙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그렇게 한족의 목을 베고 그 땅을 빼앗아 우리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그것이 고려의 진짜 모습이지, 이렇게 외교로만 풀려고 하는 것은 고려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十一年, 春三月, 王畋於黃城之東. 冬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 克之, 殺獲二千餘級.]

11년(529) 봄 3월에 왕은 황성(黃城) 동쪽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오곡(五谷)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이것을 백제본기의 자문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7년(529) 겨울 10월에 고려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3만을 거느리고 오곡(五谷)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삼국사》 권제26, 백제본기4, 성왕 7년(529)

 

이때의 백제 공격, 오곡에서의 싸움에 대해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천년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고구려판 로맨스랄까? 물론 야사다. 그 야사를 풀어나가는 단초는, 《삼국사》 지리지에 기록된 짤막한 두 줄의 기록 속에 있다.

 

[王逢縣<一云皆伯, 漢氏美女迎安臧王之地, 故名王逢.>]

왕봉현(王逢縣).<또는 개백(皆伯)이라고도 하였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만난 곳이므로 왕봉(王逢)이라고 이름하였다.>

《삼국사》 권제37, 잡지6, 지리지 中 고구려 한산주

[達乙省縣<漢氏美女 於高山頭點烽火 迎安臧王之處 故後名高烽>]

달을성현(達乙省縣).<한씨(漢氏) 미녀가 높은 산 마루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이름하였다.>

《삼국사》 권제37, 잡지6, 지리지 中 고구려 한산주

 

한씨 성을 가진 미녀가 봉화를 올려 안장왕을 맞이한 곳. 이 야사의 주인공은 안장왕과 함께, 한씨 성을 가진 백제의 미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있고, 《동사강목》에서는 조금 더 늘려서,

 

왕이 여색을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나가 놀 적에 개백현(皆伯縣)<지금의 고양(高陽)의 덕양현(德陽縣)이다>에 이르니, 한(漢)씨의 딸이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烽火)를 올려 왕을 맞이하였다. 뒤에 사람들이 그 땅 이름을 왕봉(王逢) 또는 고봉(高烽)<지금의 고양(高陽)의 고봉현(高峯縣)이다.>이라 했다.

《동사강목》 신해년(신라 법흥왕 18년, 고구려 안장왕 13년ㆍ안원왕(安原王) 원년,

백제 성왕 9년: 531)

 

라고 했었지. 뭔가, 안장왕과 한씨 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 싶지만, 그저 '만났다'와 '봉화를 올려 맞이했다'고만 해서는 야사를 이룰 수는 없으리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저술한 《조선상고사》에는, 《해상잡록(海上雜錄)》이라는 책에서 그 자세한 내막을 전하고 있다고 했지만, 아무리 인터넷이며 도서관을 뒤져봐도 이 《해상잡록》이라는 책은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게 어찌된 일인지. 분명 인용한 책이 있을 텐데 어째서 전해지지가 않는 것인가. 《해상잡록》이라는 책에서 봤다고 했으니 분명 단재 선생께서 그 책을 갖고 계셨을텐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여기서는 그 기록된 이야기만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고양시가 개백현으로 불리던 백제시대, 이 고장에 한(韓)씨 성을 가진 장자가 살았고, 그 장자에게는 한주(韓珠)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하루는 한주가 길에서 옷차림은 남루하나 비범해 보이는 한 청년을 만났다. 둘은 서로에 매료됐고, 몇 차례 은밀히 만나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다가 청년이 길을 떠나게 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었고, 사내는 길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고구려의 왕자 흥안이며, 고구려 땅이었던 이곳을 되찾기 위해 상인으로 변장하고 정탐하러 왔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군사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아내로 맞이할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만 남긴채, 고구려로 돌아갔고, 519년 문자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22대 안장왕으로 즉위한다. 즉위한 뒤 수차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하고 와야 했다.


그러던 중 개백현 태수가 한주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청혼을 하였는데, 그녀는 자신에게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다며 번번이 거절했다. 태수는 화가 치밀어 구슬 잡아들이게 했다. 한주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이 소식을 듣게 된 흥안왕은 신하들을 불러, 개백현을 되찾고 한주미녀를 구해오는 자에게는 많은 황금과 만호후(萬戶候)의 지위를 주겠다는 포고를 내린다. 이때 을밀(乙密)이라는 장수가 앞으로 나서 개백현을 되찾고 한주를 구해오겠다면서 이기고 돌아오면 왕의 여동생 안학공주와 혼인하게 해달라고 한다. 흥안왕에게는 안학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고 을밀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을밀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태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을밀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 집에 있었는데, 마침 이 이야기를 듣고 흥안왕에게 청한 것이다. 왕은 흔쾌히 응낙했다.

 

을밀은 우선 수군을 데리고 백제로 잠입하면서, 흥안왕에게는 육로로 군사를 이끌고 천천히 내려오시라고 진언한뒤, 백제에 다다라 스무 명의 정예 병사들을 뽑아 광대패로 변장하고 개백현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옥에 갇힌 한주미녀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고, 태수는 자신의 생일에 맞춰, 한주를 옥에서 끌어내 재차 청혼했고 끝내 그녀는 거절했다. 이때 광대패로 변장한 을밀의 결사대가 태수의 생일날 흥을 돋군다는 명목으로 관아에 불려와 있다가, 무기를 빼들고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백제 병사와 을밀의 광대패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고, 이때 관아를 빠져나온 한주는 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이 신호를 보고 흥안왕은 개백현을 공격하여 마침내 옛 땅을 탈환했다. 이렇게 해서 흥안왕과 한주는 다시 만나고, 을밀대의 주인공 을밀과 안학공주도 혼인을 하게 되었다.ㅡ

 

그러한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내려오다가 조선조에 이르러서 유명한 판소리 춘향전의 근원설화가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고ㅡ.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솔직히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믿기 어렵다. 흥안왕과 한주 사이에 그러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도, 그 이야기가 실려있었다는 《해상잡록》이라는 그 책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에야 어떻게 사실로 다 믿겠는가. 인터넷 돌아다니다 보니 《고양군지》라고, 조선조 영조 31년(1755)에 고양군수였던 이석희(李錫禧)가 편찬하게 한 고양군의 읍지(邑誌)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데, 그 《고양군지》는 1990년대에 다시 개찬되었다니 또 의심스럽다. 어차피 사실의 여부에 그리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 야사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대 사실이 가미되지 않았다고는 볼수 없는, 사실과 허구의 어정쩡한 경계에 있는 고대판 루머가 바로 야사인지라, 그러한 루머 속에 사실이 있을수도 있고 허구가 있을 수도 있는 것.

 

나는 야사가다. 그런 루머(뒷담화)를 다루지만, 엄연히 '사실'로서의 역사를 추구한다 자부하는 사관. 사관으로서 '진실'을 모른체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부끄럽고 수치스런 일이 또 있을까. 일단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보류해야 되겠다. 하지만 야사라는 그 가볍고도 끌리는(슬쩍 듣기만 해도 입질이 슬슬 오는) 발칙하기 그지없는 역사의 루머가 지닌 속성을 생각하자면, 한여름날 마룻바닥에 앉아 콜라 따고 통닭 뜯으면서 할수 있는 편안한 이야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한다. 고대는 그만큼 신비롭고 재미있는 시대니까. 

 

<을밀 장군이 쌓았다는 을밀대. 여기서 보는 봄 경치는 '평양팔경'의 하나다>

 

[十三年, 夏五月, 王薨. 號爲安臧王<是梁中大通三年, 魏普泰元年也. 梁書云 『安臧王在位第八年, 普通七年卒.』 誤也>]

13년(531)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안장왕이라고 하였다.<이 때가 양(梁) 중대통(中大通) 3년, 위(魏)의 보태(普泰) 원년이다. 《양서》는『안장왕이 재위 제8년인 보통(普通) 7년(526)에 죽었다.』고 했는데 잘못이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안장왕

 

분명 이 기록만 보자면 안장왕은 재위 13년 여름 5월에 자연사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선, 안장왕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사망년도에 따른 재위기간이 문제였다. 《삼국사》 고구려본기는 재위 13년에 죽었다고 했지만,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기해년(519)에 즉위한 뒤 12년 동안 재위했다고 해서 1년 정도 차이가 있고, 《양서》에서는 재위 8년만인 서기 526년(양 보통 7년)에 죽었다고 하는 등. 일본측의 《니혼쇼키》는 백제의 역사책이었던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인용해 또 이렇게 전한다.

 

[大歲辛亥三月, 師進至于安羅營乞城. 是月, 高麗弑其王安.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 俱崩薨.]

태세 신해(531) 3월에 군사를 안라(安羅)에 진주시키고 걸탁성(乞城)을 쌓았다. 이 달에 고려가 그 왕 안(安)을 죽였다. 또한 들으니 왜의 미카도(天皇)와 태자, 왕자가 모두 죽었다 한다.

《백제본기(百濟本記)》인용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17, 게이타이키(繼體紀) 25년(531)

 

안(安)은 곧 흥안(興安), 안장왕의 이름이다. 그 무렵 백제의 가장 큰 적은 고려였고, 고려의 동향을 살피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백제였다. 고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서 백제는 비밀요원(고려 쪽에서 보면 간첩)을 파견해(백제인들 스스로가 고려의 간첩승 도림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봤던 전력이 있는만큼) 고려의 내부사정을 예의주시하며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백제본기》에는 첩자들이 수집한 고려의 내부사정들이 드문드문 기록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고려에서 안장왕 흥안을 죽였다는 것이다. 사망년도는 531년으로 《삼국사》와 《니혼쇼키》가 서로 같은데, 그 원인만은 괴이하게도 서로 다르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죽은 달수도 《삼국사》 기록(5월)과 《니혼쇼키》의 기록(3월)이 서로 다르다. 왕 한 명의 죽음을 가리켜서 《삼국사》와 《양서》, 《니혼쇼키》. 동양 3국의 문헌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이 왕의 죽음에 정상적인 자연사 과정이 없었다는 뜻.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남기더니, 죽음마저도 그리도 극적이었던가? 역사 속에 이러한 극적인 이야기가 있는것은 우리같은 야사가한테는 글감이 많아져서 좋은 일이다만, 실제 역사에서 이렇게 극적인 장면은 사실 그리 많지도 않고, 만약 그렇다면 그게 소설이지 역사인가? 역사가 극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 뒤에 깔려있는 뒷담화가 많다는 뜻이다. 뒷담화 많은 사람 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나라는 인간도 마찬가지로 뒷담화 투성이다.) 역사도 그러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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