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온달이 바보로 불린 건 ○○때문이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열두 번째 이야기
11.02.21 15:05 l 최종 업데이트 11.02.21 15:05 l 김종성(qqqkim2000)
▲ 서울 광진구 아차산에 있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 ⓒ 김종성
'고구려 후기의 명장'하면 흔히 을지문덕과 양만춘을 떠올린다. 이들은 통일 단계에 접어든 거대 중국에 맞서 황혼기의 고구려를 지켜낸 명장들이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군대를, 양만춘은 안시성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그런데 고구려 후기의 명장 계보는 온달 장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거룩한 계보'는 온달-을지문덕-양만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온달 역시 통일 단계에 접어든 거대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명장이기 때문이다.
온달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왜 '바보'라고 불렸는가 하는 점이다.
'바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사람을 놓고 아무리 열심히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봤자, 듣는 이들은 '바보가 정말 그랬을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온달은 왜 바보라고 불렸을까'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바보 노무현'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보'라는 수식어가 반드시 지적 능력의 결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보 노무현'이 실제 바보가 아니듯이 '바보 온달' 역시 실제 바보가 아니었다.
물론 '바보 노무현'의 바보와 '바보 온달'의 바보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보 노무현'에서 '바보'는 참혹한 실패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보 온달'의 '바보'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얼굴은 웃음이 나도록 못생겼지만 마음씨는 고왔다. 집이 무척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고, 해진 저고리에 헐어빠진 신발로 시내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보고는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한없이 착해 보이면서도 웃음이 날 정도로 못생긴 사람이었다. 착해 보이면서 못생긴 사람은 경우에 따라 바보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런 외모에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동냥까지 하고 다녔으니, 더욱 더 바보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보 같은 겉모습 때문에 온달은 평강왕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대단한 유명인사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바보 아이콘인 영구나 맹구 이상으로 6세기 후반의 고구려에서는 온달이 바보의 대명사였다. 이런 유명세가 원인이 되어 훗날 평강공주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 온달에게 갈래!"라며 왕궁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참고로, '평강공주'의 '평강'은 공주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이름이다. 사료에 공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평강왕의 공주'라는 의미에서 편의상 평강공주라 불렀던 것이다.
고구려판 '슈퍼스타K'에서 당당히 1등 한 온달
온달의 정신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점은, 평강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의 광경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온,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주의 존재 앞에서 온달은 지극히 '이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주를 자처하는 아가씨의 황당한 프러포즈 앞에서, 온달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 게 아니라 버럭 화부터 냈다. "이건 젊은 여자 분이 하실 행동이 아니죠, 댁은 사람이 아니라 필시 여우나 귀신이에요, 날 괴롭히지 마세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온달이 지극히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꽤 이성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온달은 딱 한 번만 거절했을 뿐, 더 이상 거절하지는 않았다.
온달이 모자라기는커녕 웬만한 사람보다 출중했다는 점은, 무과시험 역할을 겸한 전국사냥대회에서 그가 1등을 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나 조선 같은 문인사회에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문과시험으로 몰리지만, 고구려 같은 무인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무과 시험으로 몰리게 된다. 따라서 무인사회의 무사는 문인사회의 선비에 비견되는 것이다. 사실, 무인사회의 무관은 문인사회의 무관보다 지적 능력이나 전투력이 훨씬 더 월등한 법이다.
고구려판 '슈퍼스타K'인 전국사냥대회에서 1등을 한 사실은 온달이 단순히 짐승만 잘 잡았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무인사회의 엘리트가 되는 데 필요한 지적 능력과 전투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공주가 재정적 후원을 했다 할지라도 온달 자신이 우수한 인재가 아니었다면 고구려 같은 대제국에서 전국 1등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온달은 알고 보면, 꽤 우수한 인재였다
▲ 고구려 무사의 모습.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제3권. ⓒ 사계절
온달이 알고 보면 꽤 우수한 인재였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거대 중국으로부터 황혼기의 고구려를 지켜낸 ( )-을지문덕-양만춘 계보에서 온달이 ( )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통일 단계에 들어선 거대 중국에 맞선 고구려인들의 저항에서 온달이 가장 앞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3~6세기 동아시아 정세를 체크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중국의 분열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한나라의 후신(後身)인 후한이 멸망한 뒤인 '서기 220년 이후의 위·촉·오 삼국시대'와 '서기 304년 이후의 5호 16국 시대'에 고구려는 가장 행복했다. 5호 16국 시대가 특히 그러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중국이 가장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5호(胡) 즉 다섯 유목민족의 중국 진입을 계기로 북중국에서 16개의 나라가 명멸한 5호 16국 시대를 틈타 고구려는 만주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고구려가 만주의 지배자가 된 것은 5호 16국 시대의 끝 무렵인 405년 이전이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의 서진(西進)을 저지할 만한 강력한 중국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북위(北魏, 386~534년)라는 강국이 출현하여 북중국의 혼란을 수습하면서부터 고구려의 서진은 중단되고 말았다. 장수왕(재위 413~491년)이 수도를 만주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칼날을 백제·신라 쪽으로 돌린 것은 그때부터는 더 이상 중국 쪽으로 진출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중국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북위라는 장애물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위의 출현 이후에 시작된 남북조 시대(420~589년)에 고구려는 더 이상 서쪽으로 진출할 수는 없었어도 그럭저럭 강대국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이 남중국(남조)과 북중국(북조)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고구려를 상대로 전력을 쏟아 부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북위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져서 북중국이 다시 분열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위가 북주(北周)로 바뀐 후에 고구려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북주 때부터 중국의 통일운동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전 중국을 통일할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는 576년에 중국 서쪽 유목국가인 토욕혼을 물리치고 남중국의 진(陳)나라를 물리친 데 이어 577년에는 동위의 후신인 북제(北齊)를 멸망시킴으로써 북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인색'한 김부식도 온달 위업 상세하게 기록해
▲ 남한강이 보이는 온달산성.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에 있다. 온달이 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아직 전 중국을 통일하지는 않았지만 남중국을 제압하고 북중국을 통일함으로써 거대 중국의 반열에 오른 북주는 그 여세를 몰아 577년에 고구려까지 침공했다. 북주-수나라-당나라로 이어지는 거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여는 서막이었다. 고구려의 국운이 위협을 받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역사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고구려를 구출해낸 인물이 바로 온달이었다. '온달열전'에 의하면, 그는 북주가 침공하기 직전에 열린 전국사냥대회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가 출현한 시점은 고구려 평강왕 19년 3월 3일, 서기로 치면 577년 4월 6일로 추정된다. 거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되기 몇 달 전의 일이었으니, 시기적으로 절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전에 바보로 유명했다가 한동안 잠잠하던 인물이 전국사냥대회에 참가했으니, 이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해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로 치면 과거시험이요 요즘으로 치면 사법시험이나 마찬가지인 전국사냥대회에 나온 온달을 보면서, 사람들은 "세상이 시끄러워지니까 별 게 다 날뛰네"라며 "고구려에 이렇게도 사람이 없나"라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온달의 존재 앞에서 황당함을 느꼈을 구경꾼들은 잠시 후 한 번 더 황당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바보 온달이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온달은 말을 가장 잘 다뤘을 뿐만 아니라 사냥감도 가장 많이 잡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회를 주재한 평강왕도 황당하고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1등은) 가까이 오라"라고 말한 그는 "저는 온달입니다"라는 자기소개를 듣고는 놀라고 또 놀랐다고 한다. 바보의 아이콘인 온달이 1등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평강왕은 온달을 사위로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직접 목격한 온달의 실력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를 고구려 장군으로 삼기로 했다. 나라에 위기가 닥쳐오는 때인지라 출신이 어떻든 간에 능력만 있으면 일단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온달이 등장한 직후에 북주가 쳐들어왔다. 북주의 침공 앞에서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위기를 느꼈는가는 평강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왕이 직접 출정한 전쟁에서 신출내기인 온달이 선봉장을 맡았다. 중요한 전쟁에서 온달에게 중책을 맡긴 걸 보면 전국사냥대회에서 온달이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북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고구려까지 삼키고자 했던 북주 군대는 선봉장 온달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온달이) 날랜 모습으로 적군 수십 명을 베자, 모든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 크게 이겼다"고 '온달열전'은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대승을 거둔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북주가 대패를 당하고 물러갔으니, 온달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인물이 당대의 동아시아 최강을 물리쳤으니,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이 덕분에 온달은 평강왕의 사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고구려에게 매우 인색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온달의 위업을 상세히 설명한 사실만 보더라도 온달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을지문덕과 양만춘의 선배격인 '온달'
온달의 활약으로 인해 중국의 통일 열기는 '일단 멈춤'되고 말았다. 기세가 꺾인 북주는 581년에 멸망하고 수나라가 북주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풍전등화 같았던 고구려는 온달의 활약 덕분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589년에 중국을 재통일하고 612년에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에 맞서 을지문덕이 활약을 펼치기 전까지 고구려는 온달의 전공에 힘입어 오랫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 온달동굴. 온달산성 아래에 있다 하여 온달동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위와 같이 온달은 통일 단계에 접어든 거대 중국이 고구려를 삼키려고 덤벼드는 때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나라를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을지문덕과 양만춘의 선배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온달이 을지문덕·양만춘과 완전히 똑같았던 것은 아니다. 을지문덕·양만춘은 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에 맞섰고 온달은 북중국을 통일한 북주에 맞섰다. 하지만, 이들 세 명은 중국이 분열기에서 통일기로 접어들던 단계에 등장하여 거대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온달은 거대 중국으로부터 황혼기의 고구려를 살려낸 '거룩한 계보'의 시작이었다. 온달의 실제 위상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고도 남는다. 그는 바보가 아니라 대제국 고구려의 명장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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