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86983.html
“오매불망 아버지를 위해”…박정희를 극복 못한 유신공주
등록 :2017-03-17 19:18 수정 :2017-03-17 19:25
[토요판] 커버스토리
박근혜, ‘아버지를 위한 대통령’의 비극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유신정권 시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는 단지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는 정도가 아니라 유신 지지 활동 등 국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1978년 5월1일 남산3호터널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앞 왼쪽)과 큰딸 박근혜양의 모습.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갈무리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유신정권 시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는 단지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는 정도가 아니라 유신 지지 활동 등 국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1978년 5월1일 남산3호터널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앞 왼쪽)과 큰딸 박근혜양의 모습.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갈무리
18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던 2012년 9월23일 저녁,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박근혜 후보 선대위의 대변인에 임명된 김재원은 기분이 좋아 기자들을 한 식당으로 불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김재원은 “박근혜 후보가 정치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얼마 안 지나 김재원은 어딘가로부터 ‘아버지 명예회복’ 발언을 질책하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마친 김재원은 기자들에게 “네가 보고했어?”라고 물으면서 “이런 병신××들” 등의 막말을 쏟아냈다. 그는 막말에 책임진다며 다음날 대변인을 그만뒀지만, 실은 ‘아버지 발언’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실제로 아버지 박정희는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였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 박근혜는 이회창을 돕기 위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에 입당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60∼70년대 국민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멜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라며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그의 부하인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망한 1979년부터 정치에 입문할 때까지 18년간 박근혜의 삶을 지배한 것도 아버지였다. 박정희 사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공식적인 박정희 추모행사를 금지하는 등 박정희를 조용히 뒷방으로 몰았다. 박정희 후계자이긴 해도 권력의 속성상 전임자가 부각되는 것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1987년 민주화로 박정희 추모사업이 가능해지자, 박근혜는 박정희 10주기 행사(1989년)를 비롯해 영화(<조국의 등불>)와 책(<겨레의 지도자>), 월간신문(<근화보>) 등을 통해 박정희 재평가 사업에 전념했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기념사업을 시작하기 이전의 세월, 나의 생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나 개인의 모든 꿈이 없어져 버린 상태였다. 자나 깨나 꿈과 희망이 있다면 오직 그것을 바로잡아 역사 속에서 바른 평가를 받으시게 하는 것, 오매불망 그것만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 해야 할 일이었다.” 박근혜가 당시에 쓴 일기의 한 대목(1991.1.6)이다.
육영수 “근혜, 대통령 자질 충분해”
박근혜와 아버지 박정희는 사실상 정치적 스승과 후계자 관계였다. 박정희 부부는 일찍부터 큰딸 근혜에게 밥상머리 정치교육을 시켰다. 아침 라디오의 시사해설을 함께 듣고 얘기를 나누는가 하면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는 신문을 읽게 한 뒤 주요 현안에 대한 딸의 의견을 청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국방, 외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박정희의 ‘근혜 키우기’는 육영수의 죽음(1974년 8월)으로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기 전부터 이뤄졌다. 박정희 부부는 1972년 10월 큰딸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세웠다. 스페인이 유조선 진수식에 애초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를 초청했으나 딸을 대신 보낸 것이다. 박근혜가 스무살 때였다. 이듬해 1월에는 하와이의 ‘한국인 이민 70주년 경축행사’에 박근혜를 공식적인 국가 대표로 보냈다. 박근혜는 하와이 상원의 개원식에 참석해 방송으로 생중계되는 연설까지 했다. 박근혜가 귀국한 뒤 청와대를 방문한 여교수 한 명이 육영수를 만난 자리에서 “그만하면 근혜양도 퍼스트레이디가 될 자질이 충분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육영수는 “왜 퍼스트레이디예요, 대통령이 될 자질은 못 되고요?”라고 답했다. 이 일화를 책 <육영수 여사>에 기록한 박목월은 “가벼운 농담”이었다고 적고 있지만, 박정희 부부가 큰딸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1979년 청와대 나온 뒤 박정희 추모사업에 매진
퍼스트레이디 5년 동안 유신정권 뒷받침 충실, ‘아버지=영웅’ 신화 빠져
박정희는 ‘인혁당 후회’했으나 딸은 “5·16 구국혁명”에 고정, 집권 뒤도 ‘아버지 추존’ 집중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근혜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최태민과 함께 ‘구국선교단’과 ‘구국여성봉사단’을 만들어 유신을 적극 뒷받침했다.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은 구국선교단은 집회 때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위하여 기도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를 맡은 구국여성봉사단은 1979년에 이름을 ‘새마음봉사단’으로 바꾼다. 새마음봉사단은 전국 읍면에까지 지부를 조직했다. 총재 박근혜는 시도별 또는 직장별 ‘새마음 갖기 궐기대회’에 참석해 충효사상을 강조했다. 단순히 유신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유신정권을 지키고 강화하는 데 앞장선 명실상부한 유신공주였다.
그는 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챙기는 이른바 ‘영부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겨울 한파에 대한 각 시도별 대책을 보고받는가 하면 중앙정보부장 교체 건의 등 국정 운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그는 1989년 엠비시(MBC)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제가 여러통의 편지와 건의서를 받았거든요. 그것은 시국을 걱정하는 편지고 건의서인데 아버지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일을 망치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사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건의였어요. 거기에 차지철, 김재규씨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날 그걸 제가 종합적으로 아버지께 다 말씀드렸지요”라며 “10·26 사태가 없었다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이 경질됐을 것은 확실하고 차지철 경호실장도 그 자리를 물러났을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977년 8월31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 앞에서 서예를 하고 있는 큰딸 박근혜양.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갈무리
“근혜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박정희의 고백
아버지 역시 그런 딸을 누구보다 신임했고, 딸에게 의지했다. 아버지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딸에게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1974.9.14 일기 중에서)라고 토로했으며, 수시로 “근혜가 최고다”라고 치켜세웠다. 20대의 어린 딸에게 이런 아버지는 오로지 “비범한” 영웅이자 “민족과 나라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고, 사심이 없었던”(<고독의 리더십-인간 박근혜의 60년>) 무결점의 정치지도자였을 뿐이다. 아버지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이었으며, 유신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 욕을 먹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결정”(‘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이었다.
아버지의 말은 딸에게 항상 진리이자 진실의 기준이었다. 유신정권이 저지른 김대중 도쿄 납치 사건(1973년)이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파리 실종 사망사건(1979년)도 박근혜에게는 “한국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북한이 저지른” 일(‘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이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말년에 “술만 취하면 울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8명의 사형을 후회”한 얘기(2006년 7월 인혁당재건위 재심 5차 공판의 증인 김종대 증언) 등 독재자 내면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기회가 어린 딸에게는 없었다.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맹신은 정치인이 된 뒤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 그는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 때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으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등 큰 위기를 맞자, 박근혜는 2012년 9월24일 기자회견을 열어 “5·16,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처음으로 아버지의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말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집권하자마자 제3세계로의 수출을 명분으로 케케묵은 새마을운동을 다시 끄집어내는 등 박정희 부활에 공을 들였다. 또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막기 위해 검찰총장의 뒤를 캐서 내쫓는가 하면 비판적인 예술가들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탄압하는 등 아버지식 통치를 그대로 따랐다. 유신헌법을 기초했던 김기춘을 청와대 비서실장에 앉힌 뒤 이런 흐름은 더 가속화됐다.
정책 저서 한권 없이 수필집만 내
아버지 평가와 관련해서는 아예 역사교과서를 고쳤다.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는 2013년 교학사의 한국사는 그 첫 시도였다. 5·16을 군사 정변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쿠데타가 마치 나라 안팎에서 지지를 받은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일선 학교의 외면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박근혜는 이번에는 역사교과서 발행을 검정이 아니라 국정으로 바꿨다.
박정희 등 독재를 미화한 국정교과서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인 올해부터 전국에서 사용될 예정이었다. 박근혜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었지만, 딸의 탄핵과 함께 ‘박정희 교과서’도, 박정희 시대의 부활도 종말을 기했다.
<내 마음의 여정>과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등은 박근혜가 낸 책이다. 바른 생활을 강조하는 수필집 또는 배신을 증오하는 내용의 일기모음집들이다. 정치지도자로서 국가 운영에 대한 철학이나 정책에 관한 깊은 고민을 담은 책은 한권도 없다. 청와대를 떠난 스물일곱살 이후의 생각의 진전을 찾을 수 없다. 효성스런 유신공주로만 머물렀던 박근혜의 비극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오매불망 아버지를 위해”…박정희를 극복 못한 유신공주
등록 :2017-03-17 19:18 수정 :2017-03-17 19:25
[토요판] 커버스토리
박근혜, ‘아버지를 위한 대통령’의 비극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유신정권 시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는 단지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는 정도가 아니라 유신 지지 활동 등 국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1978년 5월1일 남산3호터널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앞 왼쪽)과 큰딸 박근혜양의 모습.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갈무리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유신정권 시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그는 단지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는 정도가 아니라 유신 지지 활동 등 국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1978년 5월1일 남산3호터널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앞 왼쪽)과 큰딸 박근혜양의 모습.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갈무리
18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던 2012년 9월23일 저녁,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박근혜 후보 선대위의 대변인에 임명된 김재원은 기분이 좋아 기자들을 한 식당으로 불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김재원은 “박근혜 후보가 정치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얼마 안 지나 김재원은 어딘가로부터 ‘아버지 명예회복’ 발언을 질책하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마친 김재원은 기자들에게 “네가 보고했어?”라고 물으면서 “이런 병신××들” 등의 막말을 쏟아냈다. 그는 막말에 책임진다며 다음날 대변인을 그만뒀지만, 실은 ‘아버지 발언’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실제로 아버지 박정희는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였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 박근혜는 이회창을 돕기 위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에 입당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60∼70년대 국민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멜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라며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그의 부하인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망한 1979년부터 정치에 입문할 때까지 18년간 박근혜의 삶을 지배한 것도 아버지였다. 박정희 사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공식적인 박정희 추모행사를 금지하는 등 박정희를 조용히 뒷방으로 몰았다. 박정희 후계자이긴 해도 권력의 속성상 전임자가 부각되는 것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1987년 민주화로 박정희 추모사업이 가능해지자, 박근혜는 박정희 10주기 행사(1989년)를 비롯해 영화(<조국의 등불>)와 책(<겨레의 지도자>), 월간신문(<근화보>) 등을 통해 박정희 재평가 사업에 전념했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기념사업을 시작하기 이전의 세월, 나의 생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나 개인의 모든 꿈이 없어져 버린 상태였다. 자나 깨나 꿈과 희망이 있다면 오직 그것을 바로잡아 역사 속에서 바른 평가를 받으시게 하는 것, 오매불망 그것만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또 해야 할 일이었다.” 박근혜가 당시에 쓴 일기의 한 대목(1991.1.6)이다.
육영수 “근혜, 대통령 자질 충분해”
박근혜와 아버지 박정희는 사실상 정치적 스승과 후계자 관계였다. 박정희 부부는 일찍부터 큰딸 근혜에게 밥상머리 정치교육을 시켰다. 아침 라디오의 시사해설을 함께 듣고 얘기를 나누는가 하면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는 신문을 읽게 한 뒤 주요 현안에 대한 딸의 의견을 청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국방, 외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박정희의 ‘근혜 키우기’는 육영수의 죽음(1974년 8월)으로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기 전부터 이뤄졌다. 박정희 부부는 1972년 10월 큰딸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세웠다. 스페인이 유조선 진수식에 애초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를 초청했으나 딸을 대신 보낸 것이다. 박근혜가 스무살 때였다. 이듬해 1월에는 하와이의 ‘한국인 이민 70주년 경축행사’에 박근혜를 공식적인 국가 대표로 보냈다. 박근혜는 하와이 상원의 개원식에 참석해 방송으로 생중계되는 연설까지 했다. 박근혜가 귀국한 뒤 청와대를 방문한 여교수 한 명이 육영수를 만난 자리에서 “그만하면 근혜양도 퍼스트레이디가 될 자질이 충분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육영수는 “왜 퍼스트레이디예요, 대통령이 될 자질은 못 되고요?”라고 답했다. 이 일화를 책 <육영수 여사>에 기록한 박목월은 “가벼운 농담”이었다고 적고 있지만, 박정희 부부가 큰딸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1979년 청와대 나온 뒤 박정희 추모사업에 매진
퍼스트레이디 5년 동안 유신정권 뒷받침 충실, ‘아버지=영웅’ 신화 빠져
박정희는 ‘인혁당 후회’했으나 딸은 “5·16 구국혁명”에 고정, 집권 뒤도 ‘아버지 추존’ 집중
퍼스트레이디 시절 박근혜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최태민과 함께 ‘구국선교단’과 ‘구국여성봉사단’을 만들어 유신을 적극 뒷받침했다.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은 구국선교단은 집회 때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위하여 기도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를 맡은 구국여성봉사단은 1979년에 이름을 ‘새마음봉사단’으로 바꾼다. 새마음봉사단은 전국 읍면에까지 지부를 조직했다. 총재 박근혜는 시도별 또는 직장별 ‘새마음 갖기 궐기대회’에 참석해 충효사상을 강조했다. 단순히 유신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유신정권을 지키고 강화하는 데 앞장선 명실상부한 유신공주였다.
그는 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챙기는 이른바 ‘영부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겨울 한파에 대한 각 시도별 대책을 보고받는가 하면 중앙정보부장 교체 건의 등 국정 운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그는 1989년 엠비시(MBC) ‘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제가 여러통의 편지와 건의서를 받았거든요. 그것은 시국을 걱정하는 편지고 건의서인데 아버지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일을 망치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사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건의였어요. 거기에 차지철, 김재규씨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날 그걸 제가 종합적으로 아버지께 다 말씀드렸지요”라며 “10·26 사태가 없었다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이 경질됐을 것은 확실하고 차지철 경호실장도 그 자리를 물러났을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977년 8월31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 앞에서 서예를 하고 있는 큰딸 박근혜양.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갈무리
“근혜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박정희의 고백
아버지 역시 그런 딸을 누구보다 신임했고, 딸에게 의지했다. 아버지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딸에게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1974.9.14 일기 중에서)라고 토로했으며, 수시로 “근혜가 최고다”라고 치켜세웠다. 20대의 어린 딸에게 이런 아버지는 오로지 “비범한” 영웅이자 “민족과 나라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고, 사심이 없었던”(<고독의 리더십-인간 박근혜의 60년>) 무결점의 정치지도자였을 뿐이다. 아버지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이었으며, 유신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 욕을 먹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결정”(‘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이었다.
아버지의 말은 딸에게 항상 진리이자 진실의 기준이었다. 유신정권이 저지른 김대중 도쿄 납치 사건(1973년)이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파리 실종 사망사건(1979년)도 박근혜에게는 “한국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북한이 저지른” 일(‘박경재의 시사토론’ 인터뷰)이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말년에 “술만 취하면 울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8명의 사형을 후회”한 얘기(2006년 7월 인혁당재건위 재심 5차 공판의 증인 김종대 증언) 등 독재자 내면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기회가 어린 딸에게는 없었다.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맹신은 정치인이 된 뒤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 그는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 때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으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등 큰 위기를 맞자, 박근혜는 2012년 9월24일 기자회견을 열어 “5·16,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처음으로 아버지의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말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집권하자마자 제3세계로의 수출을 명분으로 케케묵은 새마을운동을 다시 끄집어내는 등 박정희 부활에 공을 들였다. 또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막기 위해 검찰총장의 뒤를 캐서 내쫓는가 하면 비판적인 예술가들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탄압하는 등 아버지식 통치를 그대로 따랐다. 유신헌법을 기초했던 김기춘을 청와대 비서실장에 앉힌 뒤 이런 흐름은 더 가속화됐다.
정책 저서 한권 없이 수필집만 내
아버지 평가와 관련해서는 아예 역사교과서를 고쳤다.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는 2013년 교학사의 한국사는 그 첫 시도였다. 5·16을 군사 정변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쿠데타가 마치 나라 안팎에서 지지를 받은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일선 학교의 외면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박근혜는 이번에는 역사교과서 발행을 검정이 아니라 국정으로 바꿨다.
박정희 등 독재를 미화한 국정교과서는 박정희 탄생 100주년인 올해부터 전국에서 사용될 예정이었다. 박근혜가 아버지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었지만, 딸의 탄핵과 함께 ‘박정희 교과서’도, 박정희 시대의 부활도 종말을 기했다.
<내 마음의 여정>과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등은 박근혜가 낸 책이다. 바른 생활을 강조하는 수필집 또는 배신을 증오하는 내용의 일기모음집들이다. 정치지도자로서 국가 운영에 대한 철학이나 정책에 관한 깊은 고민을 담은 책은 한권도 없다. 청와대를 떠난 스물일곱살 이후의 생각의 진전을 찾을 수 없다. 효성스런 유신공주로만 머물렀던 박근혜의 비극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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