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x7arVT (사라진 듯)
*"발해 거란 전쟁의 재검토 - 강성봉" 중 "3.양국의 군사체계와 전술 - 2)발해 방어체제의 특징"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발해 방어체제의 특징
강성봉 성북문화원 2014
발해는 전성기에 5경 15부 62주를 관할하였다. 본고에서는 교통로와 성곽체제를 중심으로
발해 방어체제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27) 먼저 이에 따른 아래의 지도들을 살펴보자.
<그림1> 발해의 지방제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그림2> 발해지역 위성지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그림3> 고구려성의 위치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우선 <그림1>의 발해의 지방제도 그림을 살펴보면, 5경 15부 62주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다. 이를 <그림2>의 발해지역 위성지도를 비교하여 살펴볼 때, 발해 영역의 특징을 쉽게 살펴 볼 수 있다. 즉, 건조한 지역에 해당되는 거란, 실위지역, 당의 영주지역 일대는 모래색깔인 회색톤으로 <그림2>에 표시되지만, 발해지역은 삼림과 분지형태로 표시되어있다.28) 한편 발해의 성곽은 아직 중국측에서 발굴조사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29) 대체로 목단강과 경박호를 포함하는 상경성 주변에 집중되어 위치하고 있다. 즉, 발해 상경 지역은 목단강을 기준으로 강의 좌우안과 서쪽의 장광재령, 동쪽의 노야령 산맥의 산정상과 그 자락에 남북으로 다중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다.30)
발해 수도성 주변에 통구고성, 동위자고성, 우장촌고성, 토성자고성, 승리촌보루 등 보조방 위성을, 100리 안밖에 성장립자산성, 중진하산성, 성자후산성, 서후수자고성, 고정성촌고성, 구공리산성, 연고대산성, 석하채석장산성, 용두산성, 대목단고성, 향전둔고성 등을 배치하여 위성방어체계를, 남호두고성, 만구고성, 남성자고성, 목단강변장성 등을 쌓아 외곽방어체계를 형성하여, 삼중의 수도방어체계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31) 이상 발해 산성이나 요새의 분포로 미루어, 발해인의 주요 방어 방향이 동북과 서남이었으며 동북 방향으로는 주로 흑수말갈을 방어하고 서남쪽으로는 당(唐)의 군대와 후에 강대해진 거란(契丹) 방어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2)
그렇다면 고구려의 성곽체제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림3> 고구려성의 위치도를 참조할 때 고구려는 요동지역과 압록강, 두만강, 평양일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요동지역의 자연 지리적 형세를 보면 서쪽으로 요하(遼河)와 혼하(渾河) 가 남북으로 흐르며 요동만(遼東灣)으로 흘러들고, 요하와 혼하의 중류 지역에는 길림합달령(吉林合達嶺)산맥이 지나면서 요하와 혼하를 나누고 있다. 또 요동반도 한가운데에는 천산(天山)산맥이 자리잡고 있어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나누고 있다. 이들 산맥에서 발원한 수많은 지류가 요하와 혼하 및 바다로 흘러가며 곳곳에 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이들 하천은 곧 당시의 주요 교통로로 기능하였으며, 고구려는 이러한 평야 지대 곳곳에 형성된 주민 거주지를 통치하고 방어하기 위한 성곽을 요동 지역에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다. 고구려는 주요 거점 성들이 개별적으로 방어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변의 성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다.33)
즉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먼저 고구려는 수,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주요 거점성들이 주변의 성들을 유기적으로 연계망을 구축하고 있으며, 수도 평양성에 이르는 1선, 2선, 3선과 같은 방어체계가 갖추어짐을 알 수 있다. 반면, 발해의 경우에는 그 영역이 지리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조밀한 성곽방어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었으며, 목단강유역을 비롯한 상경성 주변 일대를 제외하고는 견실한 성곽체제를 운영할 필요도 없었다. 아울러 수도인 상경성의 위치도 동북쪽으로 치우쳐 있고, 분지에 위치해 천해의 요지에 입지하고 있어 상경성 주변에 성곽이 밀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발해의 방어체제가 수도 상경성일대를 집중방어하는 시스템으로 갖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신당서』 발해전에 나타나는 발해교통로34)에 관한 다음의 지도를 살펴보자
<그림4> 발해의 교통로
위의 <그림4>를 통해 발해의 서쪽변계는 부여부로서 거란과 접하였고, 거란으로 가려면 반드시 부여부를 통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부여부의 소재지는 오늘의 농안이다. 발해의 거란도는 대체로 상경용천부에서 출발하여 남으로 목단강하곡지대를 거슬러 올라가 액목(額穆)을 지나 위호령(威虎嶺)을 넘고 황송전(黃松甸)에서 서쪽으로 향해 나아가 자오허(蛟河,교하), 지린(吉林,길림), 주타이(九台,구태)를 지나 음마하(飮馬河)를 건너 곧바로 부여부(농안)에 이르렀다. 이 길은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킬 때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부를 치고 상경성을 점령하였다가 다시 귀국한 동선이다. 그다음 농안(農安)에서 다시 떠나 서남으로 향해 나아가 장령(長嶺)을 지나 서요하와 시라무렌 유역의 거란지구에 들어섰다가 다시 서행하여 퉁랴오(通遼,통요), 카이루(開魯,개로), 톈산(天山,천산)을 지나 거란의 수도 임황(臨潢)에 이르렀다.35)
<그림5> 거란의 발해 침공루트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원본에도 루트는 안 보이는군요. 내용 참고)
먼저 발해의 5경15부 중 부여부는 거란도의 경유지이면서 항상 경병(勁兵)을 두어 거란에 방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여부 아래에 강사현(强師縣)이 있는데, 그 명칭으로 보아도 발해가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생각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36) 따라서 부여부는 발해의 15부 중에서 군사적 긴장감이 높은 접경지역에 해당되며, 병력충원에 있어서도 부여부의 군사들은 상경성을 비롯한 5경지역에 번상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충원이 되어 상비군의 군사체제를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발해 멸망기에 거란의 공격에 대항하여 발해의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행동이 있어 주목된다.
천찬 초(天贊 初)에 홀로 기병(騎兵) 5백을 거느리고 노상군(老相軍) 3만을 물리쳤다. 발해를 함락시키고 동단국(東丹國)으로 고쳤다.37)
위의 사료는 요(遼)가 부여부(扶餘府)를 함락시키고, 일주일 후에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여 노상(老相)38)이 이끄는 발해 수도방위군대 3만 명을 물리친 기사이다. 즉 발해 멸망직전의 상황을 나타내는 사료로서, 궁성(宮城) 및 경성(京城)을 방비하는 발해의 수도방위부대의 규모가 약 3만 명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노상군의 패배 후 별다른 전투없이 상경성이 함락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발해의 방어시스템은 수도방위를 중심으로 한 발해의 도성방어체계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겠다
주석
25) 『遼史拾遺』 권13에 인용된 宋 吳會의 能改霽漫錄.
26) 유재성, 『여요전쟁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90, 34~47쪽.
27) 발해의 군사조직 및 편제 등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강성봉, 「발해 8위제에 관한 검토」, 『군사』79, 2011)
28) 이와 관련하여 현재 중국 길림시 동쪽부터 산림과 구릉지대가 분포하며, 길림시 이서지역은 광활한 개활지였다.
29) 한편 발해 부여부에서 상경성까지, 그리고 상경용천부 인근의 발해 성들을 분류한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김기섭,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 『한국고대사연구』50, 2008, 표1, 표2).
30) 발해 산성이나 요새의 분포로 미루어, 발해인의 주요 방어 방향이 동북과 서남이었으며 동북 방향으로는 주로 흑수말갈을 방어하고 서남쪽으로는 당의 군대와 후에 강대해진 거란 방어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王禹浪王宏北, 「黑龍江Ⱁ渤海山城에 나타난 高句麗文化 硏究」 『고구려연구』 12집, 고구려연구회, 2001).
31) 북한의 김창호는 상경성 주변의 방어시설의 종류는 산성, 평지성, 보루, 장성으로 구분되며, 방어 권역으로 볼때는 전연방어체계, 지역방어체계, 수도방어체계 등으로 구분된다고 보았다. 또한 발해가 고구려의 위성방어체계를 도입하여, 수도성 중심의 방위성들을 조밀하게 배치하였고, 수도 외곽부에도 방위성을 쌓아 수도성에 대한 다중 성방어체계를 형성하였다고 보았다(김창호, 「발해의 상경성방어체계에 대한 몇가지 고찰」, 『조선고고연구』, 0208-2, 31쪽). 이상의 내용은 다음의 논문에 <표>로 잘 정리되어 있다(권은주, 「발해 상경성의 역사 및 지리 연구현황-상경천도의 배경 재검토-」, 『발해 상경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고구려발해학회 동 계학술대회 발표자료집), 2012).
32) 王禹浪 王宏北, 「黑龍江 渤海山城에 나타난 高句麗文化 硏究」, 『고구려연구』 12집, 고구려연구회, 2001.
33) 임기환, 「고구려의 성곽과 방위체제」, 『이땅을 지켜온 역사』(군사제도사 및 강역에 관한 연구 사업기념 학술토론회_2011.11.3), 43~46쪽.
34) 『新唐書』 卷219, 列傳144, 北狄, 渤海, “龍原의 동남은 바다에 임하였는데 日本道이다. 南海는 新羅道이고, 鴨綠은 조朝貢道이고, 長嶺은 營州道이고 부여는 契丹道이다”.
35) 방학봉, 『발해의 주요교통로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0, 105쪽.
36) 송기호,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1995, 226쪽.
37) 『遼史』, 卷73, 列傳3, 蕭阿古只.
38) ‘老相’을 발해 政堂省의 장관인 大內相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金恩國, 「渤海滅亡에 관한 재검토」 『白山學報』 40, 1992, 113~115쪽). 한편 발해가 멸망한지 1개월 후에 渤海老相은 東丹國의 우대상右大相이 된 기사가 있다(『요사』 권2, 천현 원년 2월 병오, “以皇弟迭剌爲左大相 渤海老相爲右大相 渤海司徒大素賢爲左次相 耶律羽之爲右次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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