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402/200402230391.html
[한민족의 북방고대사 6] 고구려 부흥을 꿈꿨던 발해
발해, 만주 중·동부 장악… 한국史上 가장 큰 영토 지배
입력 : 2004.02.23 18:51 27'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서기 926년 1월 14일은 발해가 거란족에게 굴복한 날이다.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며 만주 동쪽 땅에 나라를 세운 지 228년 만이고, 고구려 멸망으로부터는 258년 만이다. 이날은 단지 한 국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날일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우리의 활동 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비운의 날이기도 하다.
▲ 발해가 시작된 동모산 발해의 첫 번째 도읍이었던 길림성 돈화시 부근 동모산의 모습. 발해는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을 이끌고 세웠다.
우리 조상들은 선사시대 이래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중부지방까지 오르내렸다. 고구려와 부여도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점차 다가오는 중국 세력에 밀리면서 고구려가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였고, 대동강 이남 땅만 통일신라의 수중에 들게 되었다. 이렇게 쪼그라든 무대를 다시 넓혀주었던 나라가 발해이다. 전성기의 발해는 만주 동부와 중부를 모두 차지하여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지닌 국가가 되었다. 그 영토는 대략 고구려의 1.5~2배, 통일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 정도였다.
▲ 오랫동안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의 도성 정문 유적.
비록 만주를 잃었지만 요동 지방만은 고려 말까지도 우리 땅으로 인식됐다. 성종 12년(993) 거란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 서희(徐熙) 장군은 “우리 나라는 고구려 후계국이다. 경계로 말하면 압록강 안팎이 우리 영토로서 오히려 당신의 동경(지금의 요양)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한다”고 꾸짖었다. 공민왕 19년(1370)에는 방문(榜文)을 붙여서 요양과 심양 사람에게 “그곳은 본시 우리 나라 땅이고, 그 백성은 우리 백성이다”라고 선포하였다.
고려 말의 요동 정벌도 이런 의식이 배경이 되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그런 인식마저 잘라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 땅의 경계가 되었고, 만주에서 일어났던 우리 역사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세종 9년(1427)에 예조판서 신상(申商)은 “삼국의 시조 사당을 마땅히 도읍지에 세워야 하는데,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아뢰었다. ‘동국통감’에서는 거란 사신을 거부한 만부교 사건을 두고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하여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라고 하여 발해는 우리 역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 땅을 잃어버린 데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역사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 발해 시대의 절터. 석등과 석사자상 등이 남아 있다.
발해는 8~9세기를 거치면서 당나라, 통일신라,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4강 구도를 구축하였고, 때로는 황제국으로 자처할 정도로 기개가 있던 나라였다. 9세기에는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송을 듣게 되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3년 뒤에 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핵심지에 있던 발해인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발해의 수도는 불에 타버린 채 인적이 끊겨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렸다. 요동 지방에 끌려온 발해인도 금(金)나라 초기까지 역사 기록에 그 종적을 보이다가 점차 중국인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발해가 사라진 빈 자리를 차지한 종족이 거란족과 여진족이었다. 멀리 요령성 서쪽에서 유목을 하던 거란족은 10세기 초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영도 아래 갑자기 세력을 키워 중국 북부와 만주를 호령하였다. 이것이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버린 요나라이다.
그 뒤에는 금·원·명·청나라가 이어가며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웠고 청나라는 그 후신인 만주족이 세웠다. 이들의 조상은 고구려 때의 숙신족이요, 발해 때의 말갈족이다. 지금 하얼빈 부근에는 금나라 발상지가 있고, 심양에는 만주족의 옛 궁전이 남아 있다. 원나라는 몽골족의 정권이었다. 이렇게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만주의 역사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됐고, 단지 과거의 역사로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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