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문화적 접근’…唐 태종 환심 얻어
<81>동맹의 출발
2013. 10. 30 16:02 입력 | 2013. 10. 30 16:03 수정
신라의 실력자 김춘추가 당나라 광록경 유형과 마주 앉았다. 사신 접대의 총책이었던 유형은 김춘추가 당태종을 만나기에 앞서 당 조정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설명을 했다. “조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많은 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황제께서는 3년 전 고구려에 다녀온 후 중풍을 얻었어요. 휴양차 장안에서 오십 리 떨어진 태령(泰嶺) 산맥의 한 봉우리인 종남산(終南山)의 행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당나라 “고구려 전력 남쪽에 묶어둬야 수월하게 공격”
대규모 침공 선언 후 신라의 실권자 나타난 것은 호재
돌로 쌓은 성벽이 압록강변의 산비탈을 따라 산봉우리까지 이어져 있다. 이 성이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추정된다. 필자제공
황제는 입이 돌아가고 한쪽 손발이 마비된 반신불수의 몸이 됐어도 고구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부하들을 시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던 터였다. 소모적인 전투를 벌여 진을 빼고 있었다.
●고구려와 소모전
647년 5월 이세적의 군대가 요하를 넘어 고구려의 북쪽으로 들어갔다. 남소성(南素 : 현 요녕성 서풍현 남쪽) 등 여러 성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성을 등지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본격적인 충돌은 없었다. 이세적은 심리적인 충격을 주기 위해 곳곳에 방화를 했다. 7월에 가서 우진달의 수군이 현재 요동반도에 상륙했다. 고구려의 작은 요새 석성을 차지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주변의 여러 곳을 공격했다. 적리성(積利城)에서 한 차례 큰 전투가 있었다. 고구려군 1만이 성문을 열고 나왔고, 양측에서 각각 1000~2000 정도의 전사자가 나왔다.
648년 4월 14일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에 있는 오호(烏胡 : 현 발해만 황성도)의 진장 고신감(古神感)이 요동반도의 역산(易山)에 상륙했고, 고구려군 5000과 전투가 벌어졌다. 백중세였다. 밤이 되자 고구려군 1만이 당 함대가 정박한 곳을 습격했다. 이를 예측한 고신감이 역습을 가했다. 매복에 걸린 고구려군은 놀라 물러났고, 고신감도 배를 타고 돌아왔다. 고구려군은 당군이 어디에 상륙해 어디를 공격할지 알 수 없었고, 고구려가 대규모 군대를 준비해 출동할 시간이 되면 당군은 언제나 철수했다.
김춘추가 신라에서 당으로 향할 무렵이었다. 648년 6월께 설만철의 함대가 압록강 입구로 들어섰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대낮에 당나라 수군이 압록강에 나타난 모습을 본 고구려인들은 놀랐다. 백리를 간 그들은 박작성(泊灼城) 앞에 상륙했다. 이를 본 백성들이 성 안으로 모여들었고, 이내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구당서’ 설만철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구성해보자.
●박작성의 혈투
전투준비를 마친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이 성문을 열었다. 고구려 보병 기병 1만이 성 앞에 나와 차례로 도열해 진을 만들었다. 여름 습기를 먹은 더운 공기 속에서 성을 등진 고구려군 1만과 상륙을 완료한 당나라군 3만이 박작성 앞 들판에 대진했다.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당군이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선발대인 배행방(裴行方)이 진을 삼각형으로 만들어 고구려군에 다가섰다. 고구려군이 밀렸다. 그러자 승세를 타고 설만철의 본대가 움직였다. 고구려군의 진이 무너졌다. 고구려 군대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들판 쪽으로 후퇴했다. 당군이 이를 추격했다. 성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서 당군과 결전이 벌어졌고, 고구려군이 패배했다. 성주 소부손이 진(陣)의 대열 속에서 전사했다. 이는 고구려에 시간을 벌어주었다. 당군이 돌아와 박작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수로가 휘감고 있는 박작성은 한 번의 공격으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 버티는 사이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고구려 구원군 3만이 도착하면서 전투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했다.
구원군은 진을 두 개로 벌렸다. 그러자 당군도 그렇게 했다. 6만의 병력이 서로 뒤엉켜 싸우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곤봉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압록강 들녘의 푸른 하늘에 울려 퍼졌다. 기세에 밀린 당군은 적지 않은 시신을 남긴 채 배가 정박된 곳으로 물러났고, 도주했다. 9월 장안에서 참전 장수들 사이에 책임소재를 놓고 언쟁이 있었고, 황제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전투일지를 불태웠다.
석달 전 황제는 다음해 30만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대규모로 침공하겠다고 선언해 놓은 터였다.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앞둔 마당에 장안에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가 나타난 것은 호재였다. 신라가 고구려 전력을 남쪽에 묶어야 당이 고구려를 수월하게 공격할 수 있다.
●김춘추 당태종의 마음을 얻다
김춘추가 광록경 유형과 함께 장안성으로 들어왔다. 중요한 만남을 앞두고 대기를 하던 김춘추는 어떻게 해야 황제의 마음을 얻을까 고심했으리라. 648년 12월 7일 그는 황제를 만났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태종이 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름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는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황제가 지은 온탕비(溫湯碑) 및 진사비(晉祠碑)의 비문과 새로 지은 ‘진서(晉書)’를 주었다.” 한국에 유교문화가 국가주도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김춘추가 황립 대학인 국학에서 매년 음력 2월쯤에 행해지는 공자 석전대제(釋奠大祭) 의례를 보겠다고 한 것은 당태종을 놀라게 했다. 한반도의 구석 벽진 곳에서 온 왕족이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501년에서 530년대까지 세워진 포항중성리비, 영일냉수리비, 울진봉평비의 문장을 보면 한학(漢學)을 공부한 신라학자들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왕손인 김춘추는 논어맹자 등 중국의 고전을 어릴 적부터 배웠고,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의 국학 석전대제 참관 의지는 공자에 대한 순수한 마음으로 비춰지기 충분했다. 무인이지만 높은 학문수준을 갖고 있던 당태종이다. 말이 통하는 이 신라 왕족을 보고 그는 향후 신라와 밝은 미래를 보았다. 김춘추도 그것을 느꼈다. 황제는 금방 편찬한 ‘진서’와 자신이 지은 온탕비와 진사비의 탁본을 주었다. 김춘추가 자신의 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그 가운데 특히 진사비는 자신이 고구려에서 패배하고 태원(太原)에 와서 지은 것이었다. 당태종 자신이 바라는 당제국의 앞날에 대해 써내려간 절제된 문장이다. 대전을 나온 김춘추는 이제야 자신이 황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다. 신라로 귀국하기 전에 황제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
중국, 석전대제 한국에서 역수입
성균관에서 지난 9월 28일 봉행된 석제대제의 한 장면. 김춘추는 당나라의 석전대제를 보고 싶다는 문화적 접근으로 당나라의 환심을 샀다. 연합뉴스
중국은 위·수·당 제국 이후로 석전을 국학에서 올렸다. 김춘추가 장안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신라에 국학 설립을 추진했고, 석전이 초보적이나 행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682년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에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그 제자 10철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했다. 지금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231개소)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한다.
중국은 문화혁명(1966~76년) 기간에 유교문화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산동성 취푸(曲阜)에 있던 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 등 이른바 삼공(三孔)은 훼손됐다. 등소평 등장
이후 공자는 복권됐고, 유교는 장려댔다. 하지만 석전대제 의례는 잊힌 상태였다.
공자의 후손들과 중국의 관리들은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국의 성균관에 주목했다. 1991년부터 한국의 성균관이 자발적으로 중국의 석전대제 복원에 동참했고, 2004년에 10월 25일 한국 성균관 유생 500명이 취푸에 가서 석전대제를 올렸다. 장면을 보던 공자의 후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중국은 유교문화가 그대로 보존된 한국에서 석전의례를 수입하여 그것을 복원했다. 순환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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