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Bd4HZn

당, 657년 장창보병으로 서돌궐 10만 기병 격파
<87>소정방의 등장
2013. 12. 11  14:57 입력

657년 윤1월 당나라는 서돌궐과의 결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앞서 2년 전 당은 대고구려 전선에 병력을 보낸 적이 있다. 그들 가운데 65세의 노장이 있었다. 소정방(蘇定方, 592~667)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중랑장(中郞將)이란 직책으로 고구려전선에 파견됐고, 요하를 건너 잠시 싸우다 바로 퇴각했다. 그는 최후의 서돌궐전쟁을 앞두고 장군으로 진급해 서역 전선으로 전보됐다.

하위직 맴돌던 소정방 극적 승리로 출세 발판 서돌궐 붕괴로 백제 침공 병력 확보 가능해져


중국 신강성 준가리아 분지의 초원 뒤쪽 멀리 천산(天山)이 보인다. 서돌궐과의 전쟁을 위해 소정방은 이곳을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필자제공


당나라 무사 모습을 묘사한 도용. 자료사진

● 젊은 날 비운을 뒤로하고 

657년 12월 초원은 황량한 겨울이라 잿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이쉬쿨(Issyk-Kul) 호수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서돌궐을 정벌하기 위해 이려도(伊麗道) 행군총관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하북 무읍(武邑) 출신인 그는 수나라 말 농민반란기에 군웅 두건덕(竇建德)의 부장 고아현(高雅賢)의 양자로서 어린 나이에 전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줄을 잘못 섰다. 621년 두건덕이 이세민에게 패배하고 장안에 압송돼 처형됐다. 직후 유흑달(劉黑闥) 밑에 들어갔지만 3년 후 그도 패배자가 되어 피살됐다. 소정방은 고향에 내려가 놀다가 이정(李靖)에게 발탁돼 630년 동돌궐(東突厥)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약탈사건에 연루돼 해고됐다. 그는 이후 25년간 아무런 관직도 없이 지냈다. 한참 활동할 젊은 시절을 우울하게 보낸 그는 65세의 초췌한 노인이 되어서야 다시 등용됐고, 2년 후 장군이 됐다. 실패한 인생을 산 그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리라.

소정방의 휘하에는 회흘의 추장 파윤, 돌궐 왕족 아사나미사·아사나보진 등의 부락민으로 구성된 1만 규모의 유목민 기병이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소정방 자신이 훈련시킨 중국인 장창보병이 뒤를 따랐다. 예질강(중앙아시아 어얼치스강) 서쪽에 도착했을 때 서돌궐의 가한 아사나하로의 10만 대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정방은 남쪽 들판에 장창보병을 남겨두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진을 쳤다. 

서돌궐 기병의 입장에서 장창보병은 초라해 보이는 존재였다. 아사나하로는 만만한 그들을 먼저 치우려 했다. 진을 중앙과 좌우 양쪽으로 펼쳐 다가오다가, 사면으로 포위했다. 이때 당의 장창보병은 초원의 비교적 높은 지형에 진을 치고 대항했다. 진 앞의 땅은 예질하의 물을 끌어들여 흠뻑 젖어 있었다. 

● 소정방의 전술 

‘구당서’ ‘신당서’를 바탕으로 소정방의 장창보병의 전투 장면을 복원해보자. 그들은 크게 창수와 노수(弩手)·궁수(弓手) 셋으로 구성돼 있었다. 창수가 대열 앞에 나가 있고, 노수와 궁수는 뒤에 있었는데 사정거리가 긴 순서대로 노와 궁을 혼합했다. 최전선에 장창을 든 병사들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인간방벽을 만들고 두 번째 줄에는 장거리 기계 노와 강궁을 든 병사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대기하고, 그다음 줄에는 중거리 노를 든 병사를 배치했다. 마지막 줄은 선 자세로 적을 겨눈 단거리 노수를 배치했다.

적이 100보 정도의 거리로 접근해오면, 먼저 장거리 기계 노로 사격을 하고, 70보에 강궁을 든 병사가, 50보에 소형 노를 든 병사가 서서 사격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간적인 간격을 없앴다.

그렇다면 장창을 든 창수의 역할은 무엇인가. 질주해오는 적 기병 앞에 서 있는 보병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달려오는 기병은 보병이 바라보기에 너무나 높고 빠르다. 기병의 주파능력은 상대 보병들에게 극단적인 공포감을 주며, 그들을 정신적 공황 상태로 내몬다. 이럴 때 기병 장창보병의 존재 여부는 병사들의 사기를 좌우한다. 모든 일은 20여 초라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 장창과 방패를 들고 앞줄에 있는 창병들은 인간장벽이었다. 궁수들이 도피할 수 있는 벽을 만들어 사격을 하는 데 심리적 안정을 줬다. 

장창보병의 창이 겨냥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말의 가슴이나 목이었다. 기병 선두대열을 낙마시켜 전 기병대의 흐름을 정체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장창보병들은 창의 밑동을 땅에 고정시켰다. 육중한 말이 빠른 속도로 달려올 때 창을 땅에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그 힘에 밀려날 뿐만 아니라 치명상을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공격에서 서돌궐 기병은 소수인 당의 장창보병을 얕잡아봤다. 초전에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사방에서 질주했다. 그러나 장창보병은 정해진 순서대로 활과 노를 발사했고, 서돌궐 기병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물에 젖은 땅에 말발굽이 박혀 속력이 느려졌을 때 화살의 적중률은 높았다. 연이은 두 번째 공격에서도 하로는 정면공격을 단행했다. 서돌궐 기병들은 화살 세례를 받았다. 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다. 실패에도 서돌궐은 수적으로 우세를 자랑했으니, 희생자가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 번째 공격은 전보다 비장한 각오로 이뤄졌다. 이번에도 서돌궐은 원진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당 장창보병의 화살 세례를 받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돌격은 감행됐고 그들은 당 장창보병의 진에 바짝 다가갔다. 그러나 빽빽하게 밑동을 땅에 박은 장창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고슴도치와 같았다. 

서돌궐 기병은 속력 때문에 멈춰 설 수 없었다. 기병의 선두대열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고 직감하는 순간, 그들의 말의 가슴과 목에 창이 찔렸고 잇달아 낙마했다. 장창보병에 가로막힌 기병의 대열은 서로 엉켰다. 여담이지만 소정방의 장창보병 전술은 통일전쟁기 동맹군인 신라에 이전됐고, 이렇게 탄생한 신라의 장창보병(長槍幢)은 양측이 적으로 돌아선 나당전쟁기에 당기병을 막아낸 첨병이 됐다. 

마지막 공격이 실패하자 서돌궐 병사들 머리에는 “당 보병의 사격으로 자신들이 죽거나 부상당할지도 모르며, 화망을 뚫고 나아간다 해도 장창에 걸려 생존할 수 없다”는 공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극복할 수 없는 위험을 인지하면서 생겨나는 공포감은 병사들의 전투의지를 무력화한다. 서돌궐 측에서는 일단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북쪽에서 기병진(騎陣)을 치고 있던 소정방은 적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공황상태인 서돌궐에 대해 소정방 기병이 급습을 가해왔던 것이다. 순간 서돌궐 병사들에게 이미 확산된 공황의 씨앗이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 서돌궐 붕괴, 통일전쟁 개시의 서곡 

서돌궐은 무너졌고,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휘 체계가 마비된 서돌궐의 부대들이 뒤엉켜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패닉 상태였다. 아무리 병력이 많다 해도 침착함을 잃으면 얼마나 약해지는가를 소정방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소정방이 공세의 끈을 늦춘다면 서돌궐은 대열을 재정비해 공격해올 것이다. 30리를 추격해 수만을 사살 생포했다.

소정방의 예기치 않은 승리에 서돌궐 10만 군대는 무너졌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이에 호록옥 등 다섯 노실필의 모든 무리가 와서 항복했고, 사발라 혼자서 처복곤굴률 철(?)의 수백명 기병과 더불어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때 아사나보진이 남쪽 길로 왔는데, 다섯 돌육의 부락에서 사발라가한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에게 항복했다.” 

소정방은 아사나하로를 추격해 버얼타라강 근처에서 따라잡아 그의 마지막 남은 병사들을 궤산시켰고, 아사나하로와 그 아들이 타슈켄트로 도망쳤지만 체포돼 장안으로 압송됐다. 당은 서돌궐을 해체하고 그곳에 기미부주를 설치했다. 소정방의 승리로 신라 왕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를 당고종에게 요청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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