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날, 정몽주는 왜 거꾸로 말을 탔을까?
[포은과 임고서원 1] 포은의 절개, 그 뿌리를 찾아서
17.08.10 21:29 l 최종 업데이트 17.08.10 21:29 l 홍성식(poet6)
▲ 죽음을 예견한 포은 정몽주는 1392년 4월 4일 밤 말을 거꾸로 타고 선죽교를 건넜다. 이는 죽음까지도 품위를 지키며 맞으려 했던 선비정신이 아니었을까? ⓒ 경북매일 자료사진
타임머신을 타고 가보자. 때는 지금으로부터 625년 전인 서기 1392년. 한 왕조가 초라한 그믐달처럼 이지러지고 있었다. 3명의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쉰여섯의 대학자(大學者)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예견했다.
새롭게 떠오른 권력집단의 핵심 인물로부터 "이제 힘을 잃은 당신의 왕을 버리고 우리와 함께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점잖게 시(詩)로써 거부하면서부터 그의 죽음은 이미 예정돼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막다른 길.
하지만 학자는 의연했다. 어차피 직면한 죽음이라면 두려움을 떨치고 당당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해가 떨어지고 달이 차올랐다. 물에 젖은 무거운 담요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밤.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말에 거꾸로 올랐다. 왜 그랬을까?
새로운 권력자의 하수인 몇몇이 조그만 돌다리 아래 몸을 웅크리고 학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건 쇠도리깨와 철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었다. 마침내 학자가 탄 말이 그 다리에 이르렀다.
성마른 암살자 하나가 먼저 철퇴를 휘둘렀다. 이어 달려온 자객들의 무자비한 칼질이 이어졌다. 학자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의 이름은 정몽주(1337~1392). 우리가 포은(圃隱)이라 칭하는 고려의 충신이었다. 포은이 사망한 후 3개월. '고려'라는 이름의 나라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라는 글씨가 선명한 임고서원 입구의 송탑비. ⓒ 경북매일 자료사진
우리는 포은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학창시절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앞서 서술된 글을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위에 등장하는 '옛이야기'가 누구에 관한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망해가는 왕조'가 고려란 것도, '새로운 왕조'가 조선이란 것도, 포은 정몽주를 유혹한 권력집단의 핵심 인물이 훗날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 되는 이방원(1367~1422)이란 것 역시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이방원 앞에서 점잖게 읊조린 시가 '단심가(丹心歌)'라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알고 있다. 왜냐? 이 에피소드는 이미 수십 차례 영화와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한국인에게 소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적 영상을 통해 알고 있는 포은의 모습이 그의 진면목일까"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정몽주의 몇몇 모습만을 보고 있는 건 아닐지.
취재를 위해 만난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이원석(53) 교학부장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충절을 지킨 지조 있는 신하였고, 3년 시묘살이를 두 차례나 한 지극한 효심의 소유자였으며, 고려 때 사람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하던 명나라와 일본을 도합 7차례나 다녀온 탁월한 외교관"이라고 포은을 설명했다.
임고서원은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위치한 사액서원(賜額書院·왕이 편액을 내린 서원)으로 포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원 입구에서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라 쓰인 거대한 빗돌과 만났다. 이 송탑비는 포은이 '동쪽 나라 성리학의 대학자'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 임고서원 유물관에서 만난 포은의 영정. ⓒ 경북매일 자료사진
난(蘭)과 용(龍)이 등장하는 꿈이 선물한 영특한 아이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난 포은은 성장하면서 세 차례 이름을 바꾼다. 어머니의 태몽에 난초가 나타났다 하여 몽란(夢蘭)이라 지어졌던 이름이, 포은이 여덟 살이던 시절 몽룡(夢龍)으로 바뀐다. 검은 용이 나무에 오르는 꿈을 꾼 후 나타난 아들을 본 게 개명의 이유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몽주(夢周)는 관례를 치르고 난 후에 얻은 이름이다.
포은은 어린 시절 영특함이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다고 전해진다. 충효문화수련원 김명환(73) 원장은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래와 같은 에피소드를 웃음 띤 얼굴로 들려줬다.
"정몽주가 아홉 살 때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집에 데리고 있는 여종의 남편이 전쟁터에 나갔어요. 얼마나 지아비가 걱정되고 보고 싶었겠어요.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고민하던 그 여종이 주인집 도련님인 포은에게 '편지 한 통만 대신 써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지요.
글을 모르는 여종의 입장을 이해한 포은이 아주 짤막한 편지를 써줬는데 그 내용이 뭔 줄 아세요? '妾心不移(첩심불이)'였답니다. 그게 '당신을 기다리는 저의 마음은 어느 곳으로도 옮겨가지 않습니다'라는 뜻이잖아요. 변치 않는 사랑으로 남편을 기다리겠다는.
얼마나 명민했으면 겨우 아홉 살 아이가 어른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 그토록 간결하고도 명료한 표현을 했겠어요. 이 이야기만 봐도 삶의 어떤 순간에서도 지조를 버리지 않은 포은의 품성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 영천시 임고면 효자로에 위치한 포은의 생가. 눈이 뿜어내는 새하얀 기운이 그의 염결했던 성품과 닮았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선비
절차탁마한 포은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 6년인 1357년이다. 그해 포은은 국자감시에 합격한다. 그때 그의 나이 약관 20세. 3년 뒤에는 문과(文科) 장원으로 향후 큰 뜻을 펼칠 기틀을 완성하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빼어난 시문(詩文)과 문장을 남긴 포은을 '문신(文臣)'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정몽주는 문약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살기를 거부했던 사람이다. 1363년에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해 여진족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고, 1383년엔 동북면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가 돼 함경도 지방을 유린하던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무신(武臣)'의 기질도 다분했던 것이다.
문무 겸비의 포은은 명석한 두뇌와 두둑한 배짱을 바탕으로 '고려 최고의 외교관'으로 인정받았다. 1377년엔 일본으로 건너가 인질로 잡혀간 백성 수백 명의 석방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명나라를 오가면서는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깊은 식견을 보여줘 중국 대신들의 기를 죽였다. 포은을 '동방이학지조'라 부르는 것은 이 같은 연유에서다. 알다시피 '이학'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 앞에서는 생명도 가벼이 여겼던 포은의 결기와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고려의 문신 김득배(1312~1362)는 포은을 문과에 급제시킨 은인이다. 그가 모함에 의해 처형됐다. 누구 하나 시체를 거두려는 이가 없었다. 그때 왕에게 청해 김득배의 시신을 장례 치르고, 제문을 지어 안타까운 죽음을 위로한 이가 포은이었다. 자신도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희생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 임고서원 유물관에 전시된 포은의 문집. ⓒ 경북매일 자료사진
아직도 영천시민들 가슴 속엔 정몽주가 산다
앞서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맞닥뜨렸던 죽음의 순간 말을 거꾸로 탔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오랜 기간 포은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해온 나이 지긋한 역사학자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포은은 이성계와 이방원에게 목숨을 빼앗길 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미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 아래서 자신을 기다리던 자객들은 결정권이 없는 이방원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사람이니 그들을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 포은은 죽음의 순간 그들의 눈동자를 보지 않음으로써 철퇴와 칼을 휘두른 자객을 이미 용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학식과 지조를 갖추고, 충과 효를 실천으로 증명한 포은 정몽주. 그의 몸은 625년 전 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남아 고향 영천 사람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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