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2705
고려왕을 몽골의 '제후'로 책봉한 진짜 이유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사극 <왕은 사랑한다> 두 번째 이야기
17.08.24 15:31 l 최종 업데이트 17.08.24 15:31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장지혜(jjh9407)
엘리자베스 2세한테는 영국왕 외에도 직함이 많다. 그중 하나가 노르망디공이다. 엘리자베스 2세를 포함한 영국왕들은 전통적으로 노르망디공을 겸직했다.
노르망디는 영국과 마주보는 프랑스 서북부 해안가 지방이다. 과거에 이곳은 노르망디공(公)이란 제후가 다스리는 노르망디공국(公國)이었다. 노르망디공국은 그 앞바다 섬들까지 다스렸다.
정복자 윌리엄 1세가 나라를 창업한 1066년 이래, 모든 영국왕은 어떤 형태로든 윌리엄 1세의 후손이다. 어머니 쪽으로든 아버지 쪽으로든 그렇다. 윌리엄 1세가 영국왕이 되기 전인 1035년,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아 노르망디공이 되었다.
노르망디공은 프랑스(윌리엄 1세 당시에는 카페왕조)의 제후였다. 윌리엄 1세는 프랑스왕의 제후인 노르망디공인 상태에서 영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왕이고 프랑스에서는 제후였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져 엘리자베스가 영국왕과 노르망디공을 겸하고 있다.
그런데 노르망디공국의 대부분은 프랑스에 통합되었다. 지금은 노르망디 앞바다의 채널제도만이 프랑스에 흡수되지 않고 남아 있다. 영국왕은 채널제도에 대한 지배권을 근거로 노르망디공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채널제도는 형식상으론 영국의 일부이지만 완전한 일부는 아니다. 독자적인 의회를 가진 곳이다. 채널제도와 영국의 관계는 홍콩과 중국의 관계와 비슷하다.
우리 역사에도 유사한 사례들이 있었다. 이 땅의 왕이면서 다른 나라 특정 지방의 제후를 겸한 이들이 있다.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 아버지 충렬왕(정보석 분)과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는 충선왕(임시완 분)도 그런 왕이었다.
▲ <왕은 사랑한다>. ⓒ MBC
고려 최초로 몽골인 왕비의 몸에서 출생한 충선왕은 스물네 살 때인 1298년 아버지를 몰아내고 고려 주상이 되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아버지한테 도로 내주고 몽골 수도인 대도로 소환됐다. 대도는 지금의 베이징 절반과 그 북쪽에 걸쳐 있었다.
복귀한 충렬왕은 아들한테 두 번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고 몽골 조정에 로비를 많이 했다. 아들이 돌아올 수 없도록 붙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충선왕도 살아날 방도를 강구했다. 몽골 황실의 권력투쟁에 개입해, 장차 승자가 될 카이산을 후원하는 행운을 얻었다. 카이산은 1307년 대칸(황제)이 됐고 충선왕은 막강한 배경을 얻게 되었다.
카이산은 답례를 했다. 몽골의 지방 제후 지위였다. 1307년 혹은 1308년 충선왕을 고려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심양로 제후로 책봉했다. 로(路)는 행성(行省) 밑의 2급 행정구역이었다.
심양로는 심양(션양)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이었다. 심양은 경도 상으론 신의주보다 약간 서쪽이고, 위도 상으론 백두산보다 약간 남쪽이다. 심양왕은 지금으로 치면 심양시장이 아니라 심양 담당 부총리 같은 것이었다. 심양왕은 1310년 심왕으로 개칭됐다.
충선왕은 심양왕이 된 상태에서, 아버지가 죽은 뒤 고려 주상에 복귀했다. 고려 주상 겸 몽골 심양왕이 된 것이다. 형식상 2개의 왕을 겸하게 된 셈이다. 노르망디공인 상태에서 영국왕이 된 윌리엄 1세처럼, 충선왕은 심양왕인 상태에서 고려 주상이 됐다. 심양은 만주 땅의 요지다. 발해 멸망 이후, 제후 신분으로나마 만주 땅의 군주가 된 것은 충선왕이 처음이다.
카이산이 충선왕을 심양왕에 책봉한 진짜 이유
그런데 카이산이 충선왕을 심양왕에 책봉한 것은 단순히 보은 차원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몽골 황실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칭기즈칸 이래로 몽골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그의 세 아들과 후손들이 만주 땅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황제 지위 쟁탈전에도 개입했다.
몽골 황실은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투항한 고려인 세력가인 홍복원 가문을 활용했다. 고려 입장에서는 반역자인 홍복원 가문한테 대대로 벼슬을 주고, 만주에서 세력을 형성한 칭기즈칸 후예들을 이 가문을 통해서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홍복원 세력이 너무 강해졌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 중에 고려에서 피신한 이주민들이 홍복원 관할 하에 들어감으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이제, 몽골 황실은 또 다른 고려인 세력가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목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고려 왕족 왕준이다. 한때 몽골은 왕준을 앞세워 홍복원 가문을 견제하는 동시에, 왕준과 홍복원을 함께 내세워 칭기즈칸 후예들을 견제했다. 왕준과 홍복원이 상호 경쟁하면서도, 칭기즈칸 후예들을 상대로는 공동보조를 취하도록 한 것이다.
카이산이 충선왕을 심양왕에 책봉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왕준의 자리를 충선왕으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이산은 심양왕이란 세습직 제후직까지 줌으로써, 충선왕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충선왕이 홍복원 가문에 제동을 걸면서도, 필요할 때는 홍씨 가문과 힘을 합쳐 칭기즈칸 후예들을 견제해주는 게 카이산의 바람이었다.
카이산은 그런 동기로 심양왕에 책봉했지만, 충선왕 입장에서는 고려 땅 바깥에 또 다른 땅을 갖게 됐으니 개인적으로 대단한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 최강인 몽골 영토 안에 자기 땅을 갖게 됐으니, 국제적으로 상당히 높은 위상을 확보한 셈이었다.
▲ 충선왕(임시완 분). ⓒ MBC
심양왕 지위, 고려 왕실에 '독'이 되다
하지만 심양왕이란 지위는 충선왕이 전적으로 자기 힘으로 얻어낸 게 아니었다. 물론 카이산을 도와준 대가로 얻은 것이지만, 심양왕이란 지위에 딸린 토지와 권력에 비하면 충선왕의 노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상당부분은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공짜 선물'의 성격이 다분했기에, 거기엔 '독'도 함께 묻어 있었다. 심양왕이란 지위는 나중에 고려 왕실에 해독을 끼치는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왕은 사랑한다>에서도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권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아버지를 상대로 벌였을 정도다. 그런데 충선왕은 자기 아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 복귀한 충선왕은 자기 장남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세력을 형성하자, 장남을 죽여 버렸다. 그러고는 둘째 아들(훗날의 충숙왕)을 후계자로 만들었다.
충선왕은 자기가 가진 지위 전체를 충숙왕에게 넘기지 않았다. 충숙왕한테 넘긴 것은 고려 주상 자리뿐이다. 심양왕(심왕) 지위는 조카 왕고한테 넘겼다. 이것이 고려 왕실에 분란을 조장했다.
왕고는 심양왕 지위를 이용해 고려 주상의 지위까지 빼앗으려 했다. 충선왕이 죽은 뒤에 몽골의 후원을 받아 그 아들 충숙왕의 자리를 넘본 것이다. 왕고는 충숙왕의 아들인 충혜왕 때도 그랬다. 왕고의 활약은 몽골 황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왕고를 통해 고려 왕실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고는 단순히 고려왕만 노린 게 아니다. 그게 여의치 않자, 고려국의 자주성을 지워버리려 했다. 1323년, 그는 고려를 몽골의 '51번째 주'로 만드는 운동을 벌였다. 몽골 조정을 움직여 고려를 몽골의 일개 행성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그럴 만한 힘이 몽골한테는 없었다.
왕고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홍복원 가문과 칭기즈칸 후예들을 견제하라고 만든 심양왕 자리가 나중에는 고려 왕실을 견제하는 도구가 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이것은 고려의 존립까지 위협했다.
영국왕의 노르망디공 겸직은 영국 왕실의 자주성에 위협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 왕실에 위협이 될 뿐이었다. 그에 반해, 고려 주상의 심양왕 겸직은 몽골이 아닌 고려 왕실에 위협이 됐다.
이 차이는 제후직을 획득한 경위에서 비롯됐다. 영국 왕실은 영국을 차지하기 전에 자신들의 힘으로 노르망디를 얻어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왕한테서 노르망디공의 지위를 받아낸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영국 왕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노르망디공 지위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고려 왕실은 자신의 힘이 아닌 몽골의 힘으로 심양왕 자리를 얻어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 자리를 활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도리어 고려를 위협하는 악영향을 끼쳤다. 자기가 직접 얻은 게 아니라, 외세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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