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58082
핵폭탄 쏘자는 '전쟁광'의 마지막은 초라했다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6] 강추위 속 1.4 후퇴
17.09.10 19:39 l 최종 업데이트 17.09.10 19:39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4 후퇴 피란민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1951. 1. 5.).ⓒ NARA
트루먼의 '비장의 카드'
1950년 11월 25일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연내에 끝내고자 회심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 명령을 유엔군 전 장병에게 하달했다. 하지만 복병 중국군의 반격과 미처 예상치 못한 북부 산악지방의 날씨와 험준한 지형에 후퇴치 않을 수 없었다.
대참패였다. 1950년 12월 25일에는 공산군이 38선 이북 전 지역을 거의 다시 장악해 맥아더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공산군은 12월 31일 밤 전 전선에서 다시 38선을 돌파한 뒤 남하했다.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점령했고, 1월 중순에는 37도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총공세가 대참패로 돌아가자 경악했다.
1951. 1. 중국군 공세에 밀려 38선 남쪽으로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NARA
미군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패배를 당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마침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는 기자 회견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 사용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이미 1950년 12월부터 원자폭탄 사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만주지역에 무려 26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자본주의 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의 국제전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세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대부분 나라가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계획을 비판할 뿐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조차도 반대 여론이 높아졌다. 한국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지상군을 파견한 영국마저도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계획에 반기를 들고 나셨다. 영국은 중국 영토 내 홍콩을 식민지로 두고 있었기에 마냥 중국과 적대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 수상 애틀리는 화급히 워싱턴을 방문해 트루먼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방어선을 유지해 전쟁의 확산을 방지하면서 명예롭게 종식시키는 방향'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그러면서 한반도에서 결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을 것임을 재차 확인하고, 유엔의 후원 하에 휴전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1951. 1. 3. 1.4 후퇴 전날 밤으로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NARA
강추위 속 1. 4 후퇴
이러한 합의 배경에는 당시 미국의 주적은 소련이었기에 중국과의 전쟁에서 힘을 소비하는 건 곤란하다는 판단과 함께 당시 일본 방위를 위해 주한미군의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등의 요인도 있었다.
마침내 미국은 전 세계적인 반대 여론과 그 무렵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정보에 한국전에서 원자폭탄 사용 카드를 접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은 서로 죽이 맞아 원자폭탄 사용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1950. 12. 3. 평양. 강추위 속 피란민 대열의 한 소녀.ⓒ NARA
1.4 후퇴 피란민 행렬로 소가 힘들어 하자 어린이가 달구지를 밀고 있다(1951. 1. 5.).ⓒ NARA
그 당시 자주 국방력이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원자폭탄 사용 주장과 한국전쟁 확전 및 북진 주장은 일종의 블랙코미디였다. 그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한국전쟁을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은 '대재앙'이었다. 만일 그와 맥아더의 주장대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면 동북아 전 지역의 모든 생명을 몰살시켰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때 맥아더와 이승만의 원자폭탄 투하 주장이 옳았다고 여기는 소위 '전쟁광'들이 많이 있다. 만일 그때 미국이 원자폭탄 26기를 투하했다면, 중국은 우호국인 소련의 원자폭탄을 빌려다가 한반도 남부에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그때 죽었거나 이 땅은 아직도 피폭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1950. 12. 28. 서울. 피란민들이 나룻배로 언 한강을 건너고 있다.ⓒ NARA
누가 그에게 그런 권한을 줄 수 있는가. 그들은 인류의 적일 뿐 아니라 뭇 생명들의 말살자로 규탄돼야 마땅하다.
유엔군이 38도선 아래로 밀리기 시작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12월 24일 서울시민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전 '백'(back)이 있는 사람은 유엔군이 밀린다는 정보를 듣고 12월 초부터 피란을 떠났다. 그해 12월 말에는 80만 서울시민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1951년 1월 3일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천도했다. 이전 여름 서울 잔류로 수복 후 호되게 당한 서울시민들은 대부분 피란길에 올랐다. 1월 4일 공산군이 입성할 때 서울은 유령의 도시처럼 변해 있었다.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으로 언 강을 피란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NARA
"인구 백만이 넘던 도시는 갑자기 텅 비었다. 북쪽 하늘에서는 지난 여름처럼 우릉우릉 하는 공포의 음향이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이 집도 저 집도 대문이 굳게 닫혔고, 밤이면 바람 소리만이 말발굽 소리처럼 텅 빈 거리를 황량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약탈이 시작되었다. 한밤에 이웃집의 대문이 부서졌고, 그 안에서 낯선 사내들이 무언가를 분주히 골목 밖으로 들어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떠나도 죽고, 남아 있어도 죽을 바에는 차라리 길에서 죽기보다는 자기 집에서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 두 번째 군상들의 피란 행렬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앞서 떠난 사람들보다 훨씬 초조하고 다급했다. 지닌 것은 체력뿐 변변한 재산이 없는 그들은, 좀 더 많은 피란 짐을 운반하기 위해 가장 크고 귀찮은 짐인 어린아이들을 길에 버렸다. 그들에겐 어린아이란 세월이 좋아지면 다시 생기는 것이었다." - 홍성원 지음, 문학과 지성사 <남과 북> 제3권 248쪽
1.4 후퇴 피란민 행렬로 차와 수레와 사람들이 뒤엉켜 있다(1951. 1. 5.).ⓒ NARA
맥아더 전격 해임되다
중국군의 제3차에 걸친 공세로 37도선까지 후퇴를 거듭했던 유엔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한 뒤 대반격의 작전을 펼쳤다. 유엔군은 1951년 3월 18일에 서울을 재탈환했고, 3월 23일에는 38선 이남을 다시 장악했다.
그때부터 미국 내 여론은 확전보다 전쟁을 제한하는 기류로 흘러갔다. 하지만 맥아더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그런 기류를 '전쟁에서 싸워 이기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에 대한 강력한 보복 조치를 트루먼에게 요구했다.
1951. 5. 29. 서울. 중국군 춘계 대공세로 서울시민들이 세 번째 피란봇짐을 꾸려서 뗏목으로 엮어 만든 한강 부교를 건너고 있다. ⓒ NARA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 본토에 직접적인 군사행동으로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 적대 행위에 말려든다면 결코 이롭지 못하다면서 맥아더의 요구를 거절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을 전격 해임했다. 이는 그 무렵 미국의 확전 반대 분위기를 대변한 조치였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의견 충돌은 전선사령관 교체라는 결과를 낳았다.
맥아더 후임에는 미 제8군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가 임명되고, 새로운 미 8군사령관에는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중장이 임명됐다.
1951. 1. 4. 서울. 한강변의 1.4 후퇴 피란민 행렬.ⓒ NARA
종전에 무게를 두다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최대 관심사는 소련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으로, 그들은 한국전의 확전보다 명예로운 종전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1951년 3월 말 이후 38선을 중심으로 양측이 몇 차례 공방을 거듭했지만 이전과 같은 북진이나 남진은 없었다. 어느 편이든 엄청난 인명 희생과 군사적 모험 없이는 상대편 지역 깊숙이 진격한다는 게 불가능해졌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앵무새처럼 북진통일을 외쳐댔다. 전쟁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다 희생시킨 다음 자신은 하와이 망명정부로 도망갈 심산이었을까.
1951. 1. 8. 강릉. 강추위 속에 피란민 행렬이 남으로 이어지고 있다.ⓒ NARA
"그 무렵 유엔군은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울 계획이었다. 대한민국의 주요 인사를 비롯하여 약 10만 명의 사람들을 하와이 근처의 섬으로 옮겨 망명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입안 단계에서 취소됐다. 중국군의 공세가 방어전술로 전환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유엔군은 곧 제한적인 반격을 취했고, 1951년 3월말, 전선은 다시 38선 부근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망명정부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은 당시 유엔군의 위기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박태균 지음, 책과함께 <한국전쟁> 233~235쪽
역사란 준엄한 것이어서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 후 부인과 함께 하와이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1.4 후퇴 피란민 행렬(1951. 1. 4.).ⓒ NARA
(* 다음 회는 '포로수용소' 편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1951. 1. 4. 끝없이 이어진 피란행렬 ⓒ NARA
1951. 1. 20. 어느 부자의 피란 행렬로 부인과 큰 아들은 전란에 잃었다고 함.ⓒ NARA
1951. 5. 29. 서울. 중국군 춘계대공세로 서울시민들이 세 번째로 피란봇짐을 꾸려서 한강을 건너고자 몰려들고 있다. 피란민들이 한강철교의 단절로 부교로 남하하고 있다.ⓒ NARA
1951. 5. 29. 서울. 중국군 춘계대공세로 서울시민들이 한강을 부교로 건너고자 몰려들고 있다. ⓒ NARA
덧붙이는 글 |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한 한국전쟁 사진 자료 및 관련 문서 및 포스터는 눈빛출판사에서 『한국전쟁 Ⅱ』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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