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11244.html
50년 전 ‘동백림 사건’, 50년 동안 윤이상에 ‘간첩’ 꼬리표
등록 :2017-09-16 10:22 수정 :2017-09-16 10:36
[토요판] 커버스토리
윤이상과 한국사회
1967년 11월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동백림 사건’ 공판에서 윤이상(서 있는 사람)이 증언을 하는 모습. 윤이상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2심과 3심을 거치며 10년형으로 감형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중정)는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을 발표했다. 서독과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 유학하고 귀국한 현직 대학교수나 현지 유학생 등 194명이 관련된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었다. 이날 중정이 공개한 명단엔 ‘박정희 앞에서 자수한 간첩’인 철학자 임석진뿐 아니라 서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의 이름이 맨 위에 올랐다. 시인 천상병, 화가 이응노 등의 이름도 포함됐다.
윤이상이 ‘동백림 사건’으로 구속됐을 당시 사진.
윤이상의 나이 50살 때 벌어진 ‘동백림 사건’은 이후 50년 동안 윤이상이란 이름 세 글자가 한국 사회에서 떠안게 될 운명을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중정은 윤이상에게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왕래하고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해 밀봉교육을 받고 돌아와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를 씌웠다. 그해 12월 열린 1심에선 그에게 무기징역(간첩죄·잠입죄)이 선고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구속된 사람 모두가 70년말까지 감형과 특사 형식으로 풀려났고, 국외에서 잡혀온 사람들도 모두 ‘강제출국’되는 선에서 슬그머니 마무리지어졌다. 윤이상도 2심과 3심을 거치며 10년형으로 감형된 뒤 1969년 3월 서독으로 추방됐다.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강압수사를 통해 소극적인 대북 행적에 간첩죄를 적용했고, ‘윤이상=간첩’이라는 오명을 둘러쓰게 한 건 부당하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중정, 1967년 ‘동백림 사건’ 연루 발표
1심 무기징역, 69년 석방돼 강제추방
‘통영의 딸’ 등, ‘간첩 딱지’ 놀이 이어져
박근혜 정부, 윤이상콩쿠르 예산 중단도
몸은 풀려났으나 그의 예술혼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무엇보다 윤이상이란 이름은 한국 사회에서 금칙어로 자리잡았다. 고국에서 버림받고 서독으로 돌아간 뒤 그가 한국 정부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데다, 그의 작품 활동에 높은 관심을 보인 북한 사회와 접촉면을 더욱 넓혀간 영향도 컸다. 윤이상은 1974년 유럽 교민과 유학생 55명이 모여 만든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 설립을 주도해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에 맞서는 국외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키웠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한국 사회의 보수·공안세력이 질기도록 그에게 ‘간첩’ 딱지를 계속 끌어다 붙이는 배경이 됐다. 1992년 봄 터진 ‘오길남 사건’이 대표적이다.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북한으로 이주했다가 가족을 두고 혼자 탈출해 한국으로 들어온 재독 학자 오길남 박사가 북한 이주 과정에 윤이상의 적극 권유가 있었으며 탈출 뒤 도움을 청하러 간 그에게 윤이상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회유했다고 주장한 것. 이어 2011년 6월엔 오 박사의 부인(신숙자) 구출운동이 불붙으면서 ‘통영의 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근 공개된 2011년 10·26 재보궐 선거 직후의 국정원 내부문건(‘SNS의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은 “통영의 딸 구하기와 같은 국민적 공감대 확보와 보수진영 철학 전파에 유리한 의제를 적극 발굴하여 트위터 공간의 여론 건전화를 선도”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자유민주주의수호시민연대 등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뿐 아니라 국정원이 직접 통영의 딸 논란을 키우는 데 개입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당시 통영의 딸 구하기 운동에 앞장섰던 한국자유연합의 대표는 국정원 민간인 댓글부대 ‘알파팀’의 팀장으로 밝혀졌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윤이상은 여전히 금기시됐다. 윤이상평화재단이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유네스코 산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한국 최초로 가입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정부 지원금이 끊기는 수모를 당했다.
현대음악 무대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한국 출신의 작곡가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탄생 100주년인 올해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힘을 받고 있다. ‘윤이상기념관이되 윤이상기념관이라 부르지도 못한’ 통영 도천테마기념관(2010년 개관)은 15일 윤이상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91)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윤이상의 삶과 음악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활발해지는 게 반갑다”며 “그간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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