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57021

흥남부두에 남겨진 사람들이 마주한 끔찍한 최후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5] 흥남 철수 막전막후
17.09.06 15:42 l 최종 업데이트 17.09.07 12:06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950. 12. 흥남. 유엔군 수송선(LST)에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탄 피란민들. 부두에는 미처 오르지 못한 피란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 NARA

'굳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 바람찬 흥남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 금순아 어디로 가고 /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김사랑이 노랫말을 쓰고 박시춘이 곡을 쓴, 가수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가요는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요는 공전의 대히트 곡으로 같은 이름의 영화와 드라마로도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또한 2014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도 흥남 철수 작전 때 부산으로 피란한 인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초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일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뒤 전광석화처럼 북진했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회심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구상한 뒤 B-29 등 폭격기로 북한 지방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그런 다음 맥아더는 11월 25일 유엔군 전 장병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으니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크리스마스에는 그대들은 가족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격 명령에 따른 유엔군의 대공세는 기세 좋게 압록강까지 이르렀지만 곧 중국군과 인민군의 거센 반격에 부딪혔다. 특히 복병 중국군의 북과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불쑥불쑥 나타나는 고전적인 전술과 영하 30℃가 넘는 북부 산악지대의 강추위는 유엔군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  


1950. 11. 중국 지원군이 개천지구에서 유엔군을 공격하고자 눈 쌓인 산을 벌떼처럼 오르고 있다. ⓒ 중국해방군화보사 / 눈빛출판사


1950. 12. 9. 중국군 참전으로 북진한 유엔군들이 혹한 속에 후퇴하고 있다.ⓒ NARA

죽음의 계곡

11월 말 무렵, 낭림산맥 동쪽 장진호 일대에는 미 해병1사단 1만 3500여 병력과 미 7사단 일부 병력이 중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M. Almond)는 맥아더의 충복이었지만, 영민하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 장군은 용맹스럽고 영리했다. 스미스 장군은 상황 판단을 한 뒤 과감히 후퇴명령을 내렸다. 그는 그러면서도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기지를 발휘했다. 

"이건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1950. 11. 29. 중국군 참전으로 장진호 일대 주둔하던 유엔군들이 후퇴하고 있다. ⓒ NARA

마침내 탈출 퇴로가 보였다. 스미스 장군이 전투 초기 비난을 무릅쓰고 장진호 들머리 하갈우리에 야전 비행 활주로를 건설해 놓은 덕분이었다. 이 비상 활주로에 C-47 수송기가 착륙해 부상자를 후송보내고 부대 보급품을 받을 수 있었다. 

미 해병1사단 장병은 퇴로를 차단한 중국군과 건곤일척의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결과 20여 킬로미터의 포위망을 돌파해 마침내 기적과 같이 흥남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작전에 참가했던 장병들은 훗날 이 후퇴 길을 '죽음의 계곡'(Hell fire valley)이라고 이름지었다. 

미국 출신 사진작가 겸 종군기자였던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해 <라이프>에 게재했다.


1950. 12. 10. 장진호 일대에서 중국군에 밀려 후퇴하는 유엔군과 피란민들.ⓒ NARA

"모든 것이 얼어붙는 매섭게 추운 아침이었다. 그야말로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감사 그 자체였다."

흥남 지역으로 후퇴한 유엔군은 미 제1해병사단, 제7사단, 제3사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예하 수도사단, 3사단, 해병 2, 5대대)과 영국군 일부로 10만 5000여 명이었다. 여기에 수십만 명의 북한 동포가 남으로 피란하고자 유엔군을 따라 나섰다. 

이 피란민들은 유엔군 북진 때 협조한 주민들이거나 미군이 후퇴한 후 원자탄을 떨어뜨린다는 소문에 피란봇짐을 싸서 구름처럼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보름, 길어야 한 달 내로 귀가할 줄 알고 떠났다. 그렇게 집을 떠난 지 70년이 흘렀지만 38선은 휴전선으로 더욱 견고해졌다.

원산항은 공산군 측이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 철수는 흥남항에서만 이뤄졌다. 사상 최대 흥남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10일부터 24일까지 보름동안 전개됐다.


1950. 12. 6. 중국군 참전으로 유엔군들이 강추위 속에 후퇴하면서 추위와 졸음으로 길가에 쓰러져 눈을 붙이고 있다.ⓒ NARA

너희들이 여기 오지 않았던들

흥남철수작전에는 각종 함선 132척이 동원됐다. 행선지는 부산, 마산, 거제, 울산, 포항, 울진, 묵호 등이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배는 적었다. 흥남철수작전 마지막 배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아(Meredith Victory) 호로 길이 455피트(약 138미터), 7600톤 급이었다. 이 배는 제2차 대전 당시 장비를 실어 나르던 화물선이었다. 

원래 이 상선은 흥남항에 적재된 각종 무기를 실어 나를 예정이었지만 선장 라루(Leonard P. Larue)와 선원들은 피란민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배에 실은 무기와 짐을 모두 내리고 피란민을 태웠다. 최대 승선 인원은 2000명 정도였는데 무려 1만 4000여 명을 태웠다. 문재인 대통령 부모님도 이 배에 탔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도 부두에 몰려온 피란민을 모두 태울 수는 없었다. 그때 흥남부두는 아비규환이었다고 전해진다. 후일 언론인 김용삼은 당시 흥남부두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군 LST(상륙함정)가 부두에 몸을 대고 그물망을 내렸다. 피란민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죽기 살기로 몰려들었다. 밟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물에 매달려 기어오르다 떨어져 죽은 시체가 즐비했다. 주인 잃은 피란 보따리가 산처럼 쌓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을 에는 혹한의 연속이었다. 부두를 빠져나간 배가 다시 돌아오려면 며칠씩 걸렸다. 추위에 못 이겨 얼어 죽은 시체가 매일 밤 수없이 버려졌다." - <한국현대사 119대 사건> 100~101쪽


1950. 12. 19. 흥남. 유엔군 피란 수송선에 오르고자 몰려든 피란민들.ⓒ NARA

1950년 12월 24일 오후 2시 45분, 마지막 수송선이 흥남부두를 떠날 때 남은 피란민들은 울부짖으며 배를 향해 몸부림쳤다. 배에 탄 사람과 거의 같은 수의 피란민들이 부두에 남았다. 그러자 일부 피란민 가운데 미군에 대한 저주를 퍼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놈들아, 미국 놈들아! 너희들이 차라리 여기 오지 않았던들 우리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를 죽이고 가는구나. … 너희들을 믿고 타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만세를 불렀다가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구나. 우리는 미국 놈들에게 속았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 편 1권 169~170쪽


1950. 12. 16. 흥남. 후퇴한 유엔군들이 부두에서 초조히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NARA


1950. 12. 16. 흥남 항에서 철수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NARA


1950. 12. 24. 흥남철수작전 완료 뒤 유엔군이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으로 흥남부두를 폭파하고 있다ⓒ NARA

크리스마스의 기적

마지막 수송선이 부두를 떠나자 유엔군은 적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 흥남부두에 대규모 함포사격과 공중 폭격을 가해 그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 틈에 부두에 남았던 피란민들도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으로 상당수 희생됐다. 

마지막 수송선 빅토리아호는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이 피란민을 태운 뒤 28시간 항해하여 부산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부산에는 피란민이 가득 차 다시 50마일을 더 항해한 뒤 거제도 장승포항에 닻을 내렸다. 콩나물 시루와 같은 피란민의 승선으로 지극히 위험했지만 수송선 내에서 이틀 동안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 항해 기간 동안 배 안에서 모두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전 세계로 타전됐다고 한다. 


1950. 12. 쫓기는 유엔군 병사들이 흥남에서 철수 수송선을 타고자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 NARA


1950. 12. 19. 흥남 부두에서 유엔군 수송선에 오르고자 몰려든 피란민들. ⓒ NARA


1950. 12. 19. 흥남 항에 몰려 있는 피란민 수송선들. ⓒ 박도


1950. 12. 19. 피란민들이 흥남 항에 정박 중인 피란민 수송선에 타고자 목선을 타고 접근하고 있다. ⓒ NARA


1950. 12. 흥남에서 철수한 후 묵호항에 내리는 유엔군 병사들. ⓒ NARA


1950. 12. 24. 흥남. 유엔군 철수 후 함포사격과 공중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흥남항 부두.ⓒ NARA

(* 다음 회는 '1.4 후퇴' 편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한 한국전쟁 사진 자료 및 포스터는 눈빛출판사에서 <한국전쟁 Ⅱ>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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