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7962
'뼛속까지 몽골 사랑' 고려 충선왕의 놀라운 업적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사극 <왕은 사랑한다> 세 번째 이야기
17.09.07 10:51 l 최종 업데이트 17.09.07 10:51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박순옥(betrayed)
조선은 이성계를 위시한 무인 집단과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의 합작으로 세워졌다. 조선 왕조가 고려 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혁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인 집단이 아니라 신진사대부 때문이었다.
신진사대부로 불리는 사대부 그룹은 이전의 지배층과 확연히 달랐다. 권세 있는 가문이고 세력 있는 족속이라 해서 권문세족이라 불린 종전의 고려 지배층은 실력보다는 가문에 더 의존했다. 또 대규모 노비와 부동산에 의존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기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변화를 거부했다.
신진사대부로 분류되는 선비 그룹은 가문보다는 실력에 의존했다. 학문적 실력이 이들을 도드라지게 했다. 이들도 노비와 부동산을 보유했지만, 권문세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중소 규모의 지주였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중소기업 정도의 경제적 기반에 의존하는 세력이었다.
신진사대부는 일반 평민들보다는 잘살았지만, 자기 위에 넘어야 할 계층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개혁성을 띠었다. 물론 꼭 시기심만으로 개혁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유교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에, 지식인이라는 소명 때문에도 개혁을 주장했다.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소신 있게 개혁을 외칠 수 있었다.
정도전이 신진사대부를 이끌고 새 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집단이 공민왕 때 지배층이 됐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무명의 승려 신돈을 전격 발탁해 국정을 위임하고 그를 앞세워 구세력을 숙청했다. 불교 승려 신돈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며 구세력을 숙청하면, 공민왕은 빈자리를 유교 성리학자인 신진사대부들로 채웠다. 이래서 신돈 집권 5년 동안에 신진사대부는 구세력을 대체하고 새로운 지배층으로 급부상했다.
공민왕은 고려 멸망 41년 전인 1351년 왕이 됐다. 신진사대부가 중앙 정계를 장악한 것은 그 이후다. 공민왕이 그들과 제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전에 그들이 정치적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런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운 왕이 있었다.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충선왕(임시완 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몽골 수도로 가버린 고려의 왕
▲ <왕은 사랑한다>. ⓒ MBC
충선왕은 몽골인 왕비의 몸에서 출생한 최초의 고려왕이다. 그는 순혈 고려인인 아버지 충렬왕을 상대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는 1298년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고 왕이 됐다가 7개월 만에 도로 빼앗겼다. 그 뒤 몽골 수도에서 생활하던 중에 10년 만인 1308년, 아버지가 죽자 고려로 돌아와 제2차로 왕위에 등극했다.
아버지와 투쟁을 한 것도 모자라 자기 아들과도 정쟁을 벌였다. 세자가 된 아들이 자기한테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자, 세자를 죽이고 둘째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 둘째아들이 충숙왕이다. 충숙왕이 낳은 두 아들이 충혜왕과 공민왕이다. 충혜왕은 MBC 드라마 <기황후>에 등장했다. 배우 주진모가 충혜왕을 연기했다.
제2차로 등극한 지 2개월 뒤 충선왕은 개경을 버리고 몽골 수도 대도(大都)로 돌아갔다. 외갓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몽골 생활에 익숙해져 고려 생활이 불편했던 탓이다. 대도는 지금의 베이징 절반과 그 위쪽에 걸쳐 있었다. 그는 거기서 원격으로 고려를 통치했다. 스마트폰 화상통화도 없던 시절에 인편을 통한 원격 통치를 했기에 고려 지배층의 빈축을 많이 샀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보나 근무 자세로 보나 충선왕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 분야에서만큼은 꽤 선명한 업적을 남겼다. 신진사대부가 기반을 잡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놓은 것이다.
1298년 제1차 즉위 당시, 고려 정부에 문한서(文翰署)란 관청이 있었다. 임금 명의의 문서를 작성하는 기관으로, 실력은 있으되 가문이 약한 선비들이 주로 근무하는 곳이었다. 관직제도를 정리해놓은 <고려사> 백관지에 따르면, 문한서에 대해 충선왕은 이런 조치를 내렸다.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문한서가 관리 선발을 주관하도록 했다. 얼마 후에 사림원(詞林院)으로 고치고, 왕의 명령을 내보내는 임무를 맡겼다."
충선왕은 인사권을 행사하는 정방을 폐지한 뒤 그 권한을 문한서에 주었다. 그리고 문한서를 사림원으로 개칭한 뒤, 왕명 출납권까지 주었다. 비서실 기능까지 부여한 것이다.
충선왕의 조치는 사림원에 근무하는 '배경 약한' 선비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71년 발행된 <역사학보> 제52집에 실린 이기남의 논문 '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의 문투를 지금에 맞게 수정했다.
"사림원의 구성원들은 모두 문과 시험에 급제해서 출세한 인물들이며, 대부분이 지방 출신의 신진세력이었다. ······ 주요 가문에 끼지 못하여 신진세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지방 출신의 신진 선비, 즉 신진사대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충선왕의 노력은 충숙왕한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진행됐다. 1308년 제2차로 즉위했다가 1313년 양위한 충선왕은 대도에 만권당(萬卷堂)이란 학술기관을 세웠다. 상왕이 된 그는 이곳에 진귀한 서적들을 모아둔 뒤 고려인과 중국인 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양쪽들이 학술 교류를 하도록 만들었다. 몽골 치하의 중국인 학자들이 거둔 학문적 성과가 고려 학계로 유입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활동한 대표적 학자가 이제현이다. 이곳을 통해 고려에 유입된 유교 철학의 분파가 성리학이다. 세계 정치의 중심인 몽골 수도 대도에서 고려 상왕이 신진사대부들의 학문을 지원했으니, 고려 본국에 있는 신진사대부들의 입지도 강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신진사대부의 대부인 이색이나 그의 제자들인 정도전·정몽주 등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1351년 등극한 공민왕이 구세력을 내몰고 신진사대부를 새로운 지배층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공민왕이 신진사대부를 지배층으로 만든 것은 할아버지 충선왕의 노력을 완성시키는 의미였다.
▲ 드라마 <정도전>. ⓒ KBS
'왕권 강화' 노린 신진사대부 육성, 조선 건국 낳았다
충선왕이 신진사대부를 지원한 일차적 동기는 왕권 강화였다. 고려 왕실은 전통적으로 귀족세력에 눌렸다. 몽골 간섭기의 고려왕들은 몽골의 지원에 힘입어 귀족들에 맞섰다. 그래서 고려 왕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이 없었다. 몽골 간섭기는 물론이고 고려시대 전 기간을 관통하는 그 같은 고려 왕실의 고민거리와 관련하여, 미국 UCLA 존 던컨 교수의 <조선왕조의 기원>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대부분 중앙집권화 시도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국왕을 반대했다 ······ 그런 반발을 극복하기 위해서 국왕은 구 귀족에 반대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수립에서 이익을 얻는 집단과 제휴하려고 시도했다."
충선왕의 경우에는, 제휴 상대가 지방 출신 선비들이었다. 그는 왕권 강화나 중앙집권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이런 세력을 중용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꽤 과감한 정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에 비주류 인사들을 과감하게 등용한 것 이상으로 과감한 일이었다.
왕권강화라는 동기에서 벌인 일이기는 하지만, 충선왕의 조치는 고려 역사뿐 아니라 한국사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띠는 사건이었다. 그가 양성한 신진사대부는 손자 공민왕 때 가서 지배층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공민왕 사후에 구세력인 권문세족이 부활하자, 신진사대부는 정도전·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웠다.
고려와 비교할 때 조선은 서민의 이익을 더 존중하는 나라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은 고려보다 진보적인 국가였다. 충선왕이 양성한 신진사대부가 그런 나라를 세웠다. 조선이라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왕조가 등장하는 데에 충선왕이 씨를 뿌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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