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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⑨] 해양방어 시설 철쇄 (2)
박종평 연구가승인 2015.08.31 10:29호수 111318면
일본침략 대비 바다에 설치한 쇠사슬 전술
삼포왜란 평정 뒤 왜구 침입 방지용
1592년 1월 11일, 이순신 일기에는 이봉수가 선생원에 있는 석산에 가서 큰 돌 17덩어리에 구멍을 뚫은 것을 보았다고 보고한 것을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그 돌은 여수 본영과 돌산도 사이에 쇠사슬을 설치하기 위한 용도다. 그 이후에도 쇠사슬을 설치하는 모습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 1592년 1월 16일. 성(城) 아래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가 석수로 선생원의 쇄석(鎖石, 쇠사슬 설치할 돌)을 떠내는 곳에 가서 근처 백성의 강아지에게 해를 끼쳤다. 장(杖) 80에 처했다.
▲ 1592년 1월 17일. 저녁에는 쇠사슬을 고정시킬 돌을 실어 오려고 선생원으로 배 4(척)을 보냈다.
▲ 1592년 2월 2일. 쇠사슬을 가로로 설치하기 위한 큰 돌덩어리와 중간 돌덩어리 80여 개를 실어왔다.
▲ 1592년 2월 9일. 새벽에 쇠사슬을 꿰는 긴 나무를 베려고 이원룡에게 군사를 이끌고 두산도(斗山島, 돌산도)로 가게 했다.
▲ 1592년 3월 27일. 배를 타고 소포에 도착했다. 쇠사슬을 가로로 설치하는 것을 감독했다. 내내 나무 기둥을 세우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일기들은 이순신이 쇠사슬을 설치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들이다. 그 후 쇠사슬과 관련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순신은 쇠사슬을 왜 바다에 설치했을까? 그것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어 계획의 하나였다. 침략자를 바다에서 격퇴하기 위해 거북선을 개발했다면, 이 쇠사슬은 본영을 침입할 수 있는 일본군의 배가 수중장애물인 쇠사슬에 걸려 본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었다.
임진왜란 전후 쇠사슬을 이용한 방어 전략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웃지역인 경상도는 물론, 이순신과 함께 전라도를 방어하는 한 축이었던 전라 우수영도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없다. 이는 즉 우수영 인근의 명량에 쇠사슬이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명량해전에서 쇠사슬을 활용해 일본군을 격퇴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다. 그런데 이 쇠사슬 전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순신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쇠사슬 전술과 비슷한 사례와 실제 쇠사슬을 설치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수중 장애물에 대한 기록으로는 연산군 3년(1497년)에 이량(李良, 1446~1511)이 이순신이 쇠사슬을 설치했던 곳 인접지역인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에 수중제(水中堤)를 쌓은 경우가 있다. 이량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바다 속에 돌을 쌓았다. 그래서 이 바다 속의 뚝을 ‘방왜축제(防倭築堤)’라고 부른다. 현재는 거의 유실되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량의 방왜축제 이외에 실제로 해양 방어를 위한 쇠사슬이 설치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중종실록》에 나온다. 중종 5년(1510년), 도원수 유순정(柳順汀, 1459∼1512)이 삼포왜란을 평정한 뒤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쇠사슬을 설치하자는 건의를 했다.
▲ 도원수 유순정이 보고하기를, “… 삼포왜란 때 왜적들이 제포·영등포·안골포·부산포·다대포의 전투선을 불태웠기에 남은 배가 없습니다. 왜적이 만일 다시 쳐들어오면 또 똑같이 불태울 것이니, 이를 막기 위해 배를 감춘 포구 바다에 큰 나무를 박아 세운 뒤 쇠사슬로 연결하고,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매달아 그 나무가 물 밑 한 자 정도 잠기게 해 놓으면 왜적의 배들이 걸려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연결한 나무 중앙에는 쇠갈고리를 설치해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해서 열고 닫을 수 있게 해 놓으면 우리가 배를 내보낼 때는 풀고, 내보내지 않을 때는 닫아놓으면 됩니다. 제가 우후 김양필을 시켜 수영(水營)에서 시험하게 했습니다. 편리하고 도움이 된다면, 좌·우도 각 포에 같은 형태로 만들어 설치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유순·김수동·성희안 등이 유순정의 건의대로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중종 5년(1510년) 5월24일)
유순정이 나무와 쇠사슬, 돌덩어리, 칡동아줄 등을 이용해 방어시설을 만들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실제로 그 건의가 집행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 후 80년이 지나 이순신의 일기에 쇠사슬이 다시 등장했다. 유순정이 건의한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중에서, 쇠사슬과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류성룡의 기록이 있다. 명나라에 일본군의 동정을 보고한 문서로 류성룡이 선조를 대신해 쓴 것이다. 류성룡은 일본군이 1593년, 서울에서 후퇴한 이후 경상 좌·우도 해안 지방을 점령하고, 성을 쌓고 “쇠사슬 설치를 증가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쇠사슬이 정확히 어떤 용도인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쇠사슬 설치 사례와 유순정의 기록을 살펴보면, 류성룡이 말한 일본군의 쇠사슬 설치도 같은 해양 방어 목적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어쩌면 쇠사슬을 이용한 해양 방어 전술은 일상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박종평 연구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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