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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⑫] 자신의 삶 과녁에 명중시켜라!
일요서울 승인 2015.09.21 10:11 호수 1116 54면

- 조선시대 무인 활쏘기 ‘무예훈련’ 시작과 끝
- 임금중 ‘정조’ ‘신궁’ 50발 중 50발 명중 


<한산도 활터> 

▲ 1592년 1월 12일. 궂은비가 내렸고 개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 객사 동헌에 나갔다. 본영과 각 포(浦) 진무(鎭撫)들의 활쏘기 시험을 보아 우등(優等)한 사람을 뽑았다.

1592년 1월 1일부터 남아 있는 일기 중에서 처음 활쏘기가 등장한 부분이다. 이날의 활쏘기는 부하 장수들의 활쏘기 시험을 보았다는 일기이다. 이날 일기의 ‘진무(鎭撫)’는 《조선군사제도사(리조편)》(문병우, 2012)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중견급 군사 실무 담당관이다. 중앙에서는 정3품 당하관부터 종6품 참상관 중에서 임명하고,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소속과 같은 지방의 경우는 전선의 감독, 해도(海島) 순시 등의 임무를 띤 군관이다.

조선시대에서 문·무 양반들의 활쏘기는 일상생활이었고, 자기 수양의 과정이었다. 특히 무인의 경우, 조선시대 개인 무기로 가장 중요한 것은 칼이 아니라 활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의 달인’이 아닌 ‘검의 달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모습이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활쏘기는 무예훈련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중일기》 속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고(故) 박혜일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난중일기》에는 270여 회의 활쏘기가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바로 1월 12일의 일기처럼 부하장수들의 활쏘기 시험이 아니라, 이순신 자신과 부하장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기록이다. 일기에 기록된 이순신의 다양한 활동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1592년 1월 1일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이순신이 활을 쏜 기록을 살펴보면, 1592년 2월 5일, 18순을 쏜 것부터 4월 14일까지 10일간 총 109순을 쏘았다. 1회 평균 10.9순, 약 55발을 쏘았다. 매번 약 2시간 정도 활을 쏘았다. 이순신의 유년기 일화에도 전쟁놀이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중심에 활쏘기가 나온다. 또 1586년 함경도 녹둔도를 기습한 여진족 수십 명을 활을 쏘아 사살하기도 했었다. 활과 이순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조선 시대 다른 무인들의 사례는 어떨까? 1600년대 인물인 박계숙과 박취문 부자(父子)가 각각 무과 급제 후 함경도에서 복무할 때 남긴 일기인 《부북일기》를 살펴보면, 당시 군대 생활 중에 얼마나 많이 자주 활을 쏘았고, 명중률이 어떤지, 또 활쏘기 시합에서 패한 사람들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아버지 박계숙 일기의 3분의 1도 활쏘기 이야기이다. 아들 박취문의 일기에는 활쏘기 성적이 아주 자세히 나온다.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자신의 활쏘기 성적 기록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단 한 차례뿐이다. 1592년 3월 28일의 일기다. 활 10순(1순은 5발)을 쏘아 “5순은 연달아 맞혔고, 2순은 네 번 맞혔고, 3순은 세 번 맞혔다”고 한다. 총 50발 중 42발, 80.4%의 명중률이다. 오늘날의 궁도 전문가들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궁도 8단 수준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박취문의 일기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이다. 신궁(神弓) 수준이다. 한 사례로 박취문의 1645년 12월 6일 활쏘기 시합 결과 기록을 보면, 이날 군관 8명이 참여했는데, 50발 중 50발 명중이 2명, 49발·48발·47발이 각각 1명, 45발이 2명, 43발이 1명이었다. 8명 전원이 이순신보다 활을 잘 쏘았다. 심지어 이들 무인들은 냇가에서 활을 쏘아 연어를 잡기도 했다. 이는 아마도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거친 뒤였기 때문에 무예 훈련으로 활쏘기의 비중이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활쏘기 시합과 관련해 《난중일기》에는 진 편이 술을 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없다. 이순신의 일기와 달리 박취문의 일기에는 당시 무인들의 활쏘기 전후 풍속이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우승자는 상품을 받았다. 쌀·좁쌀·콩 등의 식료품이나, 술 혹은 백별선(부채의 한 종류)와 참빗, 항아리 같은 물건을 받아 생활용품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또 아주 잘 쏜 사람, 즉 50발 중 50발을 다 맞힌 사람에 대해서는 장난삼아 거꾸로 매달거나, 기생을 시켜 볼기를 치게 하기도 했다.

진 사람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진 사람은 술을 냈고, 광대 옷이나 죄인을 다루던 군사가 입던 옷인 군뢰복을 입어 군관의 체면을 구기게 만들었다. 심한 경우는 곤장도 때렸다. 또 활쏘기에서 진 군관 대신, 그 군관의 변경 생활을 돕던 기생(방직기)를 잡아와 발바닥을 때리기도 했다.

무인들이 그렇게 많이 활을 쏘았다면, 임금들은 어땠을까? 확인 가능한 최고의 명궁은 정조다. 1792년 10월부터 12월까지 모두 9차례 활을 쏜 기록이 있고, 활쏘기 성적도 남아있는데, 50발 중 49발이 3회, 45발이 1회라고 한다. 정조의 경우 마지막 한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정조는 50발 중 50발 명중이 3회, 46발이 1회라고도 할 수 있다. 신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다. 선조의 경우도 22살 때에는 활쏘기를 즐겨했고, 잘 쏘았다. 50발을 쏘면 45발을 맞혔다고 한다.

조선 시대 임금부터 문인과 무인 모두 활을 즐겼던 이유는 활쏘기 자체가 군사 훈련을 넘어 여가활동이었고, 자기 수양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군자는 다투지 않아야 하지만, 다툴 경우는 활쏘기로 다투라.”고 했고, 맹자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뒤 활을 쏘고,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내가 맞히지 못한 원인을 찾아 반성하라”라고 했다.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예기》에서도 “활을 쏘아 스스로 덕을 이루었는지 살펴라(射以觀盛德)”고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활은 누군가를 죽이고 상하게 하기 위한 수단 이전에 자기 자신의 마음밭을 갈고 닦는 수단이었다. 활을 쏘는 진짜 목적은 삶의 목표라는 과녁을 찾는 과정이고, 삶의 목표에 집중하는 훈련이며, 목표라는 과녁을 통쾌히 관통해 삶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근처에 있는 활터를 찾아가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혹은 이순신처럼 활을 쏘며 마음을 단련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또 활이 아니더라도, 그 무엇이든 자신이 마음을 비우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이라면 활쏘기와 똑같은 행동이 될 수 있다. 삶의 과녁, 마음의 과녁, 삶의 목표에 온 정성을 다해 마음의 화살을 날려 명중시켜보자.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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