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preview.html?news_idx=2007041321270083593
“고구려 주력 개마무사는 당대 최첨단무기였다”
입력 : 2007-04-13 21:27:00 | 수정 : 2007-04-13 21:27:00
개마무사 가공할 전투력이 동북아 호령 고구려 대제국 가능
고구려가 대륙을 호령하면서 사상 최대의 강대국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로 흔히 청야전투(淸野戰鬪)와 산성전투(山城戰鬪)를 꼽는다. 하지만 청야전투와 산성전투의 전술은 지세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오로지 수비만 가능한 전술이다.
수비에 의존하는 전술로 어찌 고구려가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청야 전투와 산성 전투를 강조하는 것은 고구려가 공세적이기 보다 수세에 몰려 방어에 치중했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고구려 개마무사는 우리 민족이 중국 중원왕조와의 패권 타툼에서 밀려난 허약한 존재들이 아닌 오히려 두려워 떨게 했던 공포의 대상이었다.
최근 동북공정을 주도해온 중국의 ‘중국사회과학원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이 다른 연구기관의 명칭으로 이름을 바꿔 더욱 치밀하게 고구려 역사를 침략하고 있다고 한다. 때맞춰 서점가에 나온 <한국의 7대 불가사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고구려 역사가 결코 중국의 변방에 속한 지방정권으로 예속될 수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담고 있다.
강력한 군사국가 고구려를 지탱한 힘
역사적으로 주지하다시피 고구려 사직 705년이 이어지는 동안 중국에서는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숫한 나라들이 멸망하기를 거듭했다. 그렇기에 최근 동북공정을 통해 705년의 역사를 지닌 고구려가 중국 중원왕조에 종속돼 조공을 받친 신하로서 활동한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주장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구려가 중원을 떨게 하면서 동북아의 패자 자리를 놓고 중국의 여러 나라들을 무너뜨린 것은 물론 지금의 베이징까지 영토를 확장한 데에는 수세적인 방어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역사다.
고구려가 중국을 상대로 지방정권으로 예속된 나라였다면 태조 추모태왕(중국명 주몽) 때부터 한나라를 이 땅에서 축출하고 후대에 이르러 연나라와 수나라를 멸망시키는 우를 범할 리 없었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에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영광을 이어받은 당당한 자주 국가였다. 외세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중원의 오랑캐를 정복했던 동시대 최강대국이었다. 고구려가 중국 중원왕조를 상대로 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이면에는 앞선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한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왕조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고구려의 최첨단 무기는 다름 아닌 주력부대인 개마무사. ‘개마’란 기병이 타는 갑옷을 입힌 말을 일컫는다. 개마를 탄 기병까지 철갑옷을 중무장한 기병을 두고 ‘개마무사’라고 했다.
함경도 개마고원은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개마를 타고 달리는 것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런 점에서 개마무사는 한반도에 뿌리를 둔 우리 민족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단어이지만 과거 중국 왕조들에게는 자다가도 몸서리는 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5천의 개마무사 중무장 하려면 강철 최소 500톤
말을 탄 기병이 아무리 용감무쌍해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그 위용도 무용지물인데 개마는 이를 보완한 최상의 공격무기였던 셈이다. 개마의 머리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왔다.
고구려 개마무사는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하고 개마와 혼연일체가 되어 그 체중을 실어 적 보병을 향해 돌진하면 적군의 대형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가공할 공격력으로 무장한 개마무사의 주된 임무는 적진 돌파와 대형 파괴. 개마부대는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기계화 사단으로 당시 적군은 거침 없이 돌진하는 개마부대가 자체적인 방어진으로는 도무지 저지할 수 없는 탱크와도 같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주름 잡았던 동북아의 천하는 결코 중국 왕조들의 공세 맞서 수세적인 방어로는 불가능했고 대제국을 영유할 수도 없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는 고구려의 경제력과 철기 문명이 뒷받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광개토태왕(고구려 19대 태왕)이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기틀을 다졌던 동천태왕(고구려 11대 태왕)은 당대 중원의 패자 중 하나였던 위나라(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나라)와 치렀던 전쟁(AD.239~240)에서 개마무사 5,000명을 포함 2만의 대군을 이끌고 격파했다.
그렇다면 개마무사 5천을 무장시키려면 얼마의 철이 소모됐을까.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기병의 갑옷 20킬로그램, 기타 무기와 장비 10킬로그램을 무장했다면 최소 70킬로그램의 강철이 소요된다.
5천의 개마무사가 무장하는 강철의 양은 단순 계산해도 350톤. 예비량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최소 500톤에 달한다. 현대 제철기술로는 500여 톤의 강철은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다. 하지만 2천여 년 전 이 정도 분량의 철을 생산하고 가공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국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개마무사의 강철 갑옷은 가죽 편에 철판을 덧댄 미늘을 가죽 끈으로 이어 붙인 것이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가죽 장화를 신었다.
개마무사의 주 무기는 창.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槊)’이라고 한다. 중국의 삭은 길이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해 고구려 개마무사의 삭은 평균 길이가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이었다.
이 시대의 개마무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 시대의 개마무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동시대 최첨단의 기계화사단과도 같았던 이 개마무사의 위력은 광개토태왕은 드넓은 만주를 호령했고, 당대 동북아 절대 강자의 용감무쌍한 위용으로 중원의 오랑캐들을 매일 밤 공포심에 가슴 졸이게 했었다.
2000여 년 전 추모태왕이 압록강 지류에 세운 나라 고구려는 한족의 중국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며 만주와 한반도를 지켜냈고, 동북아 최강국을 건설했다. 개마무사의 실체에서 드러나듯 고구려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군사 국가였다.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나라 고구려가 지금 고구려 존속 기간 내내 전쟁을 해왔던 중국이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고 중원왕조에 굴복했던 지방정권을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동북공정’을 총지휘해온 중국사회과학원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이 옌볜대학에서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동북변강지구 국정(國情)조사 연구기지’라는 긴 이름의 간판만 바꿔 달고 계속해서 동북공정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북공정의 세부 공정 단계에 접어든 중국은 개마무사가 중원을 토벌하기 위해 달렸던 백두산을 ‘장백공정’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둘 씩 고구려 역사를 폄하하고 복속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옌볜대학은 현재 백두산(중국명 長白山) 천지를 심벌 사진으로 삼은 이 연구기지의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민족의 뿌리까지 말살하려는 중국의 역사 침략 날조 앞에 저들의 침략성을 잠재울 이 시대의 개마무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남의 나라 역사까지 제 나라 역사라고 우기는 중국의 잠재된 침략 본성을 바라보며, 삼한과 만주를 누비고, 중원왕조들을 오금 조리게 했던 옛 고구려의 영광, 광개토태왕의 개마무사들이 그리울 따름이다.
고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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