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주간조선 1999.10.14 /1573호
고구려 정복로 1만 3천리를 가다 2
보병-기병 5만으로 후연 정벌 …요서 곳곳에 고구려군 흔적 생생
드넓은 만주의 동북평원은 남과 서로 장대한 병풍 산맥들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의 따싱안링(대흥안령) 산맥과 남쪽의 창바이(장백)산맥이다. 그리고 두 병풍이 남쪽과 서쪽을 향해 달려 한군데로 모이는 끝자락에서 나란히 물줄기가 하나씩 발원한다. 다싱안링에서는 시랴오허(서요하)가, 창바이산맥에서는 뚱랴오허(동요하)가 각각 시작되는 것이다.
▲ 랴오허에 깃든 민족사의 영욕(營辱)을 아는지 모르는지 흐르는 강물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떼가 그저 무심하기만 하다.
그 물줄기들이 수천리를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한 곳에서 만난 뒤 발해만으로 흘러드니, 중원 대륙과 만주를 가르는 이 강이 바로 랴오허(요하)다.
'가깝고도 먼 강.' 중국 현지에서 랴오허를 찾은 답사단의 첫 느낌은 그랬다. 민족사와의 깊은 인연을 생각하면 한없이 가까워야 할 이 강이 지금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지도 없이는 '랴오허가 어디'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은 마치 지금 알렉산더대왕의 후손들에게 "저 넓은 인도 땅이 과거에 당신들의 것이었노라"고 했을 때 그들이 느낄 생경스러움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생경스러움을 핑계로 외면하기에는 랴오허가 가진 역사의 무게는 너무도 무겁다. 이 강 유역의 넓은 벌판이 바로 고조선의 기름진 터전이었고, 고구려가 사방에서 밀려드는 이민족과 치열한 격전을 치르며 이곳을 확보함으로써 제국으로 발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랴오허를 열수라고 부르며 북벌을 꿈꾸지 않았던가.
고구려 정복로 학술답사단이 탄 지프와 소형 마이크로버스는 지난 7월 6일 오후 랴오허 중류의 짱황디대교(장황지대교)를 건넜다. 전날 푸순 (무순)의 신성)을 출발해 요동의 철강산지 안산, 요동성이 있는 랴오양 (요양) 등 고구려 요새들을 차례로 거쳐 드디어 랴오허에 도달한 것이다. 대낮 땡볕이 더운 김을 푹푹 뱉어내는 한여름이었다. 더위를 피해 나온 아이들이 랴오허에 뛰어들어 물놀이에 한창이었다.
▲ 후연 정복로와 랴오허 주변의 격전지
그러나 시간은 16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영락17년(서기 407년)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의 대군을 보내 이 랴오허 건너편 수백리에 걸쳐 있는 후연에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영락 5년의 거란 정벌 이후 12년간 계속돼온 후연과의 공방전에 종지부룰 찍는 승전이었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은 "정미에 교지를 내리시어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견하여 적을 참살·소탕하니 적으로부터 노획한 갑옷이 1만여벌에 이르고 군수품과 장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이 '12년 전쟁'의 승전보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후연이 결코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연을 건설한 모용 선비족은 서요하 상류와 따싱안링 남쪽 산록 일대에서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던 유목민족. 3세기말 봉상왕 때 처음 고구려를 침략한 이후 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15년간 요동벌을 놓고 끊임없이 공방전을 벌여온 고구려의 숙적이었다.
광개토대왕 이전까지만 해도 양측의 싸움은 오히려 연의 우세였다. 4세기에 이른바 철갑기병의 밀집부대로 북중국에서 한족 세력을 몰아내고 오호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이 군사강국에 고구려가 번번이 패퇴했던 것이다. 고국원왕 때인 342년에는 푸순의 신성을 통해 침략해온 모용황의 군대에 의해 수도인 국내성이 함락되고 왕모가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대왕이 재위에 오를 즈음 후연은 노쇠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북중국의 또다른 오호 왕조인 북위에 밀려 랴오허까지 그 세력이 밀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노쇠한 후연이었지만 중원의 왕조답게 만만찮은 저항을 했다. 402년, 404년 대왕은 숙군성, 연군 등 후연 도성(현재의 차오양) 부근의 요지들을 공략하면서 결정타를 날렸지만 질기게 그 생명을 이어오다 408년이 돼서야 내분으로 멸망했던 것이다.
랴오허를 건너면 이제 그 치열했던 후연 공략의 격전지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 랴오허 주변의 여러 고성에는 고구려군의 체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사진은 삽질 자국이 흉하게 남아 있는 무려라성(위)과 요서지역의 첫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개주성의 해자(垓子).
답사단이 랴오허를 건너 처음 만난 토성은 신민시 까오타이즈 (고태자)향에 있는 무려라성이었다. 한나라 때 축조된 후 후연, 고구려가 거점 성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랴오허 강변의 성은 이미 넓은 옥수수밭으로 변해 있었다. 그 한쪽에 높이가 2∼6m에 이르는 성벽이 300m 가까이 남아 이곳이 한때 크기가 3만평에 이르는 거성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성벽에는 삽질 자국이 흉하게 남아 있었다. 인근 도로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단단한 성벽의 흙을 퍼다가 도로에 깔고 있다고 했다.
답사단은 옥수수밭 고랑 사이로 혹시나 하고 기와나 토기 조각들을 찾아다녔다. 고구려 고유의 붉은 색 도는 기와편들도 다른 시대의 벽돌이나 기와 조각과 함께 흙둔덕 사이에서 간간이 발견되곤 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인 듯 불에 까맣게 그을려 겨우 붉은 빛만 남아있는 한 기와편은 답사단을 때 아닌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저 불탄 고구려 기와처럼 고구려가 쓰러져갔던 것일까."
무려라성에서 랴오허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따안(대안)현 신카이허(신개하)향에서 손성자성을 만난다. 고조선의 고성인 험독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요하평원의 길목에 해당한다. 답사단은 요하평원에 서서히 땅거미가 내릴 즈음 거름 냄새가 확 풍겨오는 전형적인 중국 시골 마을 뒷동산에 자리잡은 이 고성을 찾아들었다. 마을의 한 할머니는 "무덤 같이 불룩 솟아오른 곳이 있고 부근에서 놋그릇, 토기 조각 같은 게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의 흔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옥수수밭으로 덮여 버렸다. 옥수수밭 둔덕에 쓰러진 채 버려져 있는 문화재 보호 표지판만이 이곳이 성임을 짐작케 했다.
▲ 후연의 수도였던 랴오닝성 차오양시. 도심에 우뚝 솟은 요탑(遼搭)이 고도(古都)의 향수를 자아낸다.
랴오허 강변의 고성들을 점령한 광개토대왕의 대군은 이제 서쪽으로 진군을 계속한다. 그곳에는 요하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평원이 끝나는 이우뤼산 산록의 베이닝(북녕)시 부근에 있는 무려성은 후연 공략을 위해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는 곳. 현장에는 옥수수밭 뒷편 언덕 위에 가시나무가 울창한 자그마한 동산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은 거성 안의 돈대 (망대라고도 함)로 성밖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감시하는 고성의 설비 중 하나"라고 고구려성 전문가인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말했다. 15m 정도 되는 돈대에 올라서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 왔다. 비교적 높은 언덕 지형에 자리잡은 이 돈대 위에서 노도처럼 밀려오는 고구려의 대군을 목격한 후연의 병사들은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을까.
정복군의 진군로는 어느새 랴오허 서쪽에 있는 또하나의 큰 강인 따릉허에 이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답사팀은 후연의 고성으로 추정되는 홍정현 유지를 찾아냈다.
요서의 후연 고성들은 하나같이 10년도 못돼 사라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곳곳이 옥수수밭으로 덮여 가고 있었다. 몇십미터, 몇백미터 정도 남은 저 고성의 흔적마저 사라진다면, 토성의 성벽이 도로공사용으로 파헤쳐진다면 훗날 사람들은 어떻게 대륙의 고구려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까. 정복군의 최종 목표지였던 차오양으로 향해가는 발길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답사단은 그곳에서 잠시 길을 비켜 랴오닝성(요녕성)과 내몽골자치주 경계선에 있는 중국 춘추시대 연나라 장성의 유적지를 살펴본 뒤 차오양에 도착했다. 따릉허(대릉하)가 시 동쪽을 관통하는 랴오닝성의 고도 차오양은 바로 후연의 수도. 지금도 연도(연도·연의 수도)라는 이름이 이 고도의 시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 도시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숙군성이 답사단이 찾는 마지막 성이었다. 바로 그곳이 문헌 기록에 나타나 있는 고구려 정복군의 최종 공격 목표지점이었다. 푸순의 신성에서 이곳까지의 여정이 무려 500km. 하지만 그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보람도 없이 숙군성은 그 흔적을 끝내 내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보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따릉허 하류에 있는 이수안진(의현진)의 카이저우촌(개주촌)에서 요서 지역의 고구려 거성을 처음으로 발견해 냈기 때문이다. 현지 사람들이 '명당'이라며 공동묘지로 쓰고 있는 성 서쪽의 언덕 위에는 13기의 고구려식 돌널무덤떼가 펼쳐져 있었다.
무덤이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아야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숙군성은 찾지 못했지만 대왕이 이곳 요서에 깃발을 꽂았음을 개주성은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랴오허로 잡고 있는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도 그보다 훨씬 서쪽인 이 따릉허 유역으로까지 확대돼야 할 것이라고 동행한 학자들은 지적했다.
답사단은 그 뒤 다시 한번 랴오허를 건너올 기회가 있었다.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노을 지는 랴오허는 답사단에게 묻고 있었다. "그 많은 역사의 현장을 보고도 그대들은 계속 이 랴오허를 외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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