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364297
적리성, 여-수.여-당 전쟁시기 고구려 중요한 전초기지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18>
데스크승인 2010.05.10
수나라 내호아군이 혼났던 고장, 결국 당나라 장량군이 함락
성산산성은 여·수, 여·당 전쟁 시기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요동반도 황해 해안선의 전초기지다.
수나라 대업 8년(서기 612년), 수양제는 100만 군사를 거느리고 수로와 육로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수나라 원정군 총사령인 우익위대장군(右翼尉大將軍) 내호아(來護兒)는 수로군을 이끌고 산둥반도의 동래를 떠나 요동반도 남단의 해안선을 따라 동진을 거듭하며 압록강 하구에 이르자 진로를 남으로 바꾸어 대동강 하구 연안에 상륙했다. 내호아는 육로군과 협동작전으로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돼 있던 당초 계획을 무시하고, 요동성 공방전에서 고전하는 육로군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독단적으로 수로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육로로 진공하다가 기습공격을 가하는 고구려군의 계책에 빠져 참패를 당하여 회군하기에 이른다. 회군 길에 적리성 지역을 지나던 내호아는 평양전에서 실패한 굴욕을 씻기 위해 이 성을 치기로 한다.
내호아가 벽류하를 거슬러 적리성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앞에서 두 고구려 병사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벽류하 강물에 뛰어들어 적리성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 필시 무슨 연고가 있으리라 짐작한 내호아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잡아오게 했다. 두 고구려 군사를 잡아다 심문해보니 비사성에서 적리성으로 정보를 보내는 전령병이었다. 내호아는 이 두 고구려 전령병을 이용해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적리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그 고구려 전령병을 앞세우고 동·서 양쪽으로 동시에 성을 치기로 한다.
이날, 내호아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을 썼다. 서쪽으로 성을 치려고 간 내호아의 장수 한 명이 일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잡아둔 고구려 전령병 한 사람을 앞세워 적리성 서문 밑에 이르렀을 때였다. 성문까지 다가간 그 고구려 전령병이 갑자기 품에서 우각(牛角)을 꺼내어 불어대지 않는가. 그 우각소리가 멎기도 전에 성 위에서 갑자기 통나무와 돌들이 쏟아져 내려 수나라 군사들이 갈팡질팡하다가 많이 쓰러진다. 한편, 내호아는 서쪽에서 공격하려는 군사들이 떠나간 뒤, 주력군을 몰래 동쪽 성문 근처에 배치해 놓고 포로가 된 고구려 전령병으로 가장한 손아래 장수 한 명과 다른 한 명의 고구려 전령병을 함께 앞세워 동쪽 성문 앞에 가서 성문을 열라고 시켰다. 내호아는 성문이 열리는 틈을 타서 대군으로 들이닥칠 심산이었다. 그런데 성문 앞에 이른 그 고구려 전령병도 갑자기 우각을 꺼내어 불어댔다. 그러자 성문이 열려 앞에 선 그 두 사람이 들어가자마자 성문이 쾅 닫히는 것이었다. 고구려 전령병으로 가장한 수나라 장수는 성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포박을 당했고 혹독한 고문 끝에 성을 치려던 세부적인 작전계획을 실토하게 됐다.
적리성 안의 고구려군은 역시 장계취계로 성문 위에 백기를 내걸었다. 이를 본 내호아는 들어갔던 그 장수가 고구려군 설득에 성공한 줄 알고 군사들을 모두 성 밑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자 성 위에서 갑자기 통나무와 큰 돌덩이가 마구 쏟아져 내리고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와 수군 장졸들이 무더기로 쓰러지게 되었다. 내호아는 황급히 철수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나 서기 645년 당태종이 육로와 수로로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할 때, 당나라 평양도행군 대총관 장량(張亮)의 수로군이 적리성을 함락했다는 설화가 있다. 현지 자료에 의하면 당시 장량의 수로군이 비사성을 함락한 후 적리성을 공격했다 한다. 장량은 고구려 말을 할 줄 아는 부장(副將) 궁극(宮克)을 시켜 식량난으로 어려움에 시달리는 적리성의 두 장수, 즉 전성의 연개소영과 후성을 수비하고 있는 이대위(李大威) 사이에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하고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전성과 후성을 모두 점령했다고 한다.
적리성이 함락된 후 당 건봉(乾封) 원년(서기 666년) 당 고종이 요동을 공격할 때 군량미와 마초를 뱃길로 황해로부터 벽류하를 거쳐 적리성으로 실어 들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적리성은 후에 당나라군의 후방 군량미와 마초 보급기지가 됐다.
고구려가 축조한 적리성은 그 후 여러 시대에 걸쳐 사용되어 왔다. 요나라·금나라 시기, 요나라를 반대해 나섰던 봉기군 장수 후개(侯槪)와 오당천(吳撞天)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주둔하면서 금나라와 맞서 싸웠고, 명나라 홍무(洪武) 초기 장수 상우춘(常遇春)이 이곳에서 침략해 들어온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며, 명 홍무 4년(서기 1371년) 명나라 대장 엽왕(葉旺), 마방(馬方)은 납합출(納哈出)이 이끄는 북원(北元)군과 벽류하 강기슭에서 격전을 벌여 대승했다고 한다.
적리성 소재지 장하, 대도시로 부상 중
장하(庄河)는 부락(庄)마다 강(河)이 있고 강마다 물이 맑아 불리는 지명이다. 남쪽에는 푸르른 황해바다요, 북쪽에는 천산산맥이라, 여름에는 무더위가 없고 겨울에는 혹한이 없어 이상적인 피서지로 유명하다. 요동반도 최남단 도시 대련에서 황해 해안을 따라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 단둥으로 가는 중간 위치에 자리한 장하시는 유서 깊고 아름다운 도시다.
장하는 1913년에 현으로 설치되고, 1994년에 현급 시로 바뀌었다. 장하에는 신석기시대의 문화유적과 유물, 고구려시기의 옛 성, 근대 청일해전 터 등 많은 역사유적이 있는가 하면 환경과 자연생태가 좋고 산야(山野), 전원(田園)과 해양풍경이 한 데 농축되어 있는 관광지기도 하다. 여기에는 천하에 경치가 제일이라는 중국 남방지역 계림의 경치와 비슷하여 ‘요남의 계림’으로 불리는 장하의 국가 4A급 관광휴원지 빙욕구가 특이한 석영암지모(地貌)와 아시아에서 제일 큰 원생형(原生型) 적송림으로 국내에서 이름을 떨치고, 첩첩산중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요남지역의 제1봉으로 불리는 보운산(步雲山) 온천관광휴원지, 그리고 또 천문산(天門山) 풍경구, 석불산(石佛山), 은석탄(銀石灘) 국가삼림공원, 용천호 등 명승지와 해왕구도(海王九島), 석성도(石城島), 흑도(黑島), 합리도(蛤리島), 귀산도(龜山島) 등 아름다운 섬 풍경이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장하시 경내에는 저수지 44개와 하천 79갈래가 있어 담수자원이 풍부하고 오염되지 않아 벌써부터 대련 등 대도시용 수원지로 확정됐다. 장하시는 유명한 해산물과 농수산물 기지다. 285km의 해안선과 갯벌 2.6ha를 갖고 있어 해수산물이 많이 나는데, 대하 생산량은 전국에서 1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조개는 외국으로 많이 수출되고 있어 ‘동방의 패창(貝倉)’이라고도 한다. 또 전국 상품양곡 생산기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하에는 900여만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어 ‘사과의 고장’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서 나는 대골계(大骨鷄)와 융산양(絨山羊)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브랜드 상품이다.
이밖에 장하에는 규석, 황금, 마그네사이트 등 지하광산물이 풍부하고 공업도 발달하여 연간 1만 대 이상의 선반기계를 출하하며 근년에는 가구, 화학섬유, 전자, 해산물 저장과 가공 등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그 중 대련 화풍목제가구 수출량은 전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우전자의 규소봉(二極管)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장하는 황해 북안(北岸)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해구(海口) 35곳과 하구(河口) 10여 곳을 비롯해 자연항구가 많고, 항만 수면이 6천600여ha다. 몇 해 전에 건설한 장하항구는 1만t급과 5천t급 부두에다 연간 화물통과량이 100만t으로 국제 개방항구의 기준에 도달했다.
장하시의 총 면적은 4천34㎢로 대련지역 총 면적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며, 인구 90만으로 대련지역 총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전국적으로 가장 일찍 개방한 도시 장하는 지금 요남지역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대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얼마 전 장하시는 승격하여 시내 인구만 해도 100만이 넘는 도시로 건설하기로 했다. 이 작업을 다그치는 장하시는 황해 북안 경제벨트 개발을 포함한 요령연해경제벨트 건설이 국가의 전략으로 된 데 힘입어 현대화, 국제화한 도시건설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기존의 공업과 산업을 토대로 항만건설과 임항임해(臨港臨海)산업단지 건설을 중점으로 추진하며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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