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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404
고구려 영양왕, 수나라 침대 대비 왕삼락 시켜 축성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17>
데스크승인 2010.05.03
영양왕이 적리성을 쌓게 한 까닭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후연(後燕) 등 북방 여러 세력과 겨루며 국토를 넓혀 요동성과 현토성을 점령하면서 요동지역을 모두 손에 넣었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23년(서기 581년), 중원에서 세워진 수(隋)나라가 점차 강대해져 서기 589년에 남진(南陳)을 멸망시키고 북방으로 관심을 돌려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수나라는 북방 변경지역의 돌궐, 거란 등 이민족집단을 세력권 안에 넣기 위한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중원 통일왕조의 막강한 군사력을 내외에 과시하면서 요동 등 지역에 강대한 군력을 가지고 있는 고구려를 복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고스란히 운명을 남에게 줄 리 만무하다. 이런 과정에서 고구려는 중원의 패자인 강대한 수나라와 무력대결이 불가피하게 됐다.
바로 이때, 고구려 평원왕을 이어 즉위한 영양왕이 수나라의 공격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골몰한다.
하루는 영양왕이 꿈속에서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사냥을 나갔는데 수풀이 우거진 벽류하(碧流河) 기슭에 한 무리의 사슴이 보였다. 영양왕이 활시위를 당겨 사슴을 쏘려는 순간, 수풀 속에서 괴이하게 생긴 짐승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그 짐승은 사슴 같이 생겼는데 꼬리는 쇠꼬리 같았고 머리에는 날카로운 뿔이 나 있으며 온 몸에는 비늘이 있었다. 저것이 무슨 짐승이냐? 영양왕이 놀라 호위병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모르겠다고 하였다. 영양왕은 호위병들에게 일제히 그 짐승에 활을 쏘라고 명령했다. 이때 그 짐승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희는 옥기린(玉麒麟)입니다. 여기서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대왕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수나라군의 공격을 막을까 하는 대책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대왕님께서는 어찌하여 벽류하 양안의 준험한 곳과 그 주변에다 산성을 쌓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그곳에 산성을 쌓으신다면 산세를 이용해 평원의 적을 소멸할 수 있고 해상에서 침범해오는 적들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고구려는 78년 동안 유지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옥기린은 자취를 감추었다.
영양왕이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옥기린은 봉황새, 거북이, 용과 함께 상서로운 ‘4령(四靈)’에 속하는데, 꿈에 나타나는 건 왜일까, 무엇을 암시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대로 해도 될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영양왕은 조정 대신들이 모인 조회에서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하며 연유를 물었다. 대신들은 일제히 옥기린의 말대로 산성을 쌓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옥기린이 현몽인 데 대해서는 대답을 피하면서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한 대신이 우회적으로 영양왕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노애공(魯哀公) 14년 봄, 그가 사냥하다 기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공자에게 그 뜻을 물었습니다. 공자께서는 ‘기린은 상서로운 짐승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나타나는데 지금 나타났으니 아마 난세인가 봅니다. 그러므로 기린을 만난 사람 자신의 성도(聖道)가 실현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일 겁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듣자니 공자님께서 편찬한 사서(四書) 《춘추(春秋)》가 그 해에 절필(絶筆)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영양왕은 그 뜻이 고구려의 쇠락과 함께 난세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옥기린의 말 대로 대대적으로 산성을 축조하고 곡식을 모아두며 군사를 훈련시켜 수나라와의 전쟁준비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영양왕은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요동지역 19곳에 선후로 산성을 축조했는데, 그 가운데 6곳이 벽류하 양안에 있다. 그 6개의 산성은 장하의 적리성을 제쳐놓고 보란점시의 고력성산성(高力城山城)과 위패산성(魏覇山城·즉 오고성산성<吳姑城山城>), 개주시의 적산산성(赤山山城)과 전둔촌 고력성산성(田屯村高力城山城), 손가와보산성(孫家窩堡山城)이다. 이 산성들은 훗날 여·수, 여·당 전쟁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영양왕 즉위 시, 서기 598년 수나라 30만 대군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해서 서기 614년까지, 수나라는 선후 4차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적리성에서도 대패한 바 있다). 신통한 것은 영양왕이 적리성을 쌓기 시작한 서기 590년부터 고구려가 망한 서기 668년까지 고구려는 정말로 그 옥기린의 말대로 78년만 유지됐다.
장수 왕삼락이 축성공사 시행
영양왕이 꿈에서 옥기린을 만난 후 벽류하 기슭에 성을 쌓기로 하고 대장(大將) 왕삼락(王三樂)을 보내 지형을 살펴보게 했다. 왕삼락이 부하들을 데리고 벽류하와 협하가 만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세찬 급류와 양안의 험준한 산세에 감탄했다. 이때 홀연히 몸에 보검을 지닌 백발의 도승이 파도를 타고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의 신발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왕삼락은 신통한 고승임을 알아차리고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선사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혹 법호를 어떻게 부르시는지요?”
“이응겁(李應劫)이라고 하오. 그런데 장군들이 여긴 무얼 하러 왔소?”
왕삼락은 이곳에 온 사연을 자초지종 이야기하며 가르침을 바랐다. 도승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동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을 쌓기 좋은 곳이 바로 저곳이오.” 말을 마치자 도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왕삼락 일행은 선사가 사라진 쪽을 향해 거듭 감사의 절을 했다. 왕삼락은 산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성곽설계 약도를 그려 영양왕에게 보고했다. 영양왕은 왕삼락에게 1천명의 군사와 1년 동안 먹고 쓰는 배급과 축성 도구를 내어주며 3년 내에 산성 축조를 끝내라고 명했다. 만약 완수하지 못할 경우 참수죄로 다스리겠노라 했다.
왕삼락은 군사 1천을 끌고 성아산 아래 자리를 잡고 주둔했지만 걱정이 태산 같았다. 삼 년 간 성을 쌓으라면서 식량은 1년 치밖에 안 되고 산세가 험악한 이곳에 성을 쌓자면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왕삼락이 고민에 빠져있는데 뜻밖에 이응겁 선사가 나타났다. 왕삼락은 날듯이 기뻐하며 선사를 장막 안으로 모시고 난관을 헤쳐 나갈 방도를 물었다.
“이건 쉬운 일이오. 첫해에는 700명을 성을 쌓는데 쓰고 300명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면 이듬해 먹을 식량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흉년이 든다고 해도 사냥한 것과 산열매로 보충할 수 있을 것이오. 이듬해에는 900명이 성을 쌓고 100명이 농사를 지어 성벽 축조가 더욱 빨라질 수 있을 것이오. 성을 쌓을 석재는 성 안에 많지 않소. 북쪽 성벽은 산세가 높고 가파르니 성 안의 석재를 쓰고, 남쪽과 동쪽은 비교적 평탄하니 성 밖에서 석재를 채취하여 성벽을 쌓으면 될 것이오. 군사들이 혹 사상사고가 생길 수 있지만 상서로운 ‘7 7에 49’ 숫자를 잘 이용하면 될 것이오. 착공 전 먼저 성안의 사람이 잘 다니는 곳에 49개의 성혈(星穴)을 뚫어놓고 그 성혈마다 한 사람씩 보내어 내가 시키는 도법대로 따라 한다면 앞으로 사상(死傷)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오.”
왕삼락은 곧장 사람을 시켜 성안에 자리를 선택하여 49개의 성혈을 뚫고 49명의 건장한 군인을 성혈마다 배치했다. 도승은 성혈을 밟으면서 주문을 외워 도법을 쓰고 난 후 왕삼락에게 “이 성은 2년이면 다 끝낼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선사의 말대로 성곽은 2년 만에 축조했고,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성곽이 준공된 후 왕삼락은 사람을 성문에 파견하여 이응겁 선사를 맞아들이게 했다. 사전에 승낙한 대로 찾아온 이응겁 선사는 왕삼락과 마주앉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 사이의 인연이 모두 세 번인데 매번 만날 때마다 나는 장군께 기쁨(樂)을 한 번씩 드렸소. 이번엔 마지막으로 이 성의 이름을 적리성이라 지어주겠소. 그 이유는 첫째 황해 용왕의 딸 적리공주가 이곳에 거주했고, 둘째 이 성을 쌓으면서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1년 앞당겨 끝내 장군의 목숨을 보존했으니 대길하고 이로운 징조요, 셋째 현명한 군주는 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아둔한 군주는 그것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니 이 성은 50년 이상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친 선사는 품에서 지필과 먹을 꺼내어 ‘적리성’이란 세 글자를 써주었다. 낙관은 ‘영양왕 2년(수 개황[開皇] 11년, 서기 591년) 가을, 방사 이응겁’. 왕삼락이 절을 올리려 했을 때는 이응겁 선사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왕삼락이 적은 인력, 물력으로 1년 앞당겨 성을 완성한 것으로 하여 영양왕의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후에 왕삼락은 이응겁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적리성 안 장군각에다 이 선사의 화상을 모시고 그를 기렸다고 전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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